특별하지도 평범하지도 않은, 조용하게 별난 대학원생의 85일간의 제주산책
장미와 빵, 그리고
3과 8. 두 숫자의 조합은 언제부터인가 다른 의미들을 갖게 되었다. 분단만을 일깨우던 숫자가 이제는 대학원 친구들과의 관계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 날의 일자, 그리고 여성들의 날로서도 선명하게 다가온다. 나에게 있어 개인, 민족, 세계가 하나로 이어지는 특별한 숫자 조합이 되었다고 할 수 있겠지.
여성의 날을 한반도에서 처음 기리기 시작한 사람들은 붓을 든 여성들이었다.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면서 토하듯 살아있음을 외친 문인들. 장미도 빵도 자신의 삶조차도 남의 것으로 정해져 있던 시절에 언어와 목소리만은 영원히 자기 것으로 지켜내고 새롭게 피워낸 사람들이다. 이 땅에서 법에 의해 인정받기까지 한 세기가 걸렸던 여성의 날이, 소수의 여성들이 생목으로 지켜 모두에게 전한 이 날이 차별주의자들의 위협에 대한 우려 속에서 기념되어야 한다는 사실이 괴롭다.
하지만 우리는 언제나 절박했고 언제나 간절했다. 그러므로 결코 되돌아가지 않는다. 그렇게 두지 않겠다고 외치는 우리는 이제 수적으로는 무시할 수 없는 연대를 해내고 있다. 그리고 그 어떤 내일이 찾아오더라도 어떤 여성의 탓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손에 쥔 장미를 놓지 않으며 빵을 집어던지면서라도 붓과 촛불을 들어 올릴 준비가 되어 있다. 장미 가시에 찔려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세계를 향한 외침을 쓴다면 무엇이 우리를 막을 수 있을까. 한 세기 전부터 이미 그래 왔던 여성들에게는 부족했던 '우리'가 이루어져 있기에.
식탁까지 먹어치우는 욕구와 타오르는 욕망
그리스로마 신화에서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 중 하나는 아이네이아스 일행이 '식탁까지 먹어치울 정도로 굶주려야 방랑이 끝날 것'이라는 하르퓌아의 저주를 받고서 실로 오랜 방랑에 지치고 굶주려 딱딱한 빵 위에 과일 등을 얹어 끼니를 해결하다 식탁까지 먹어치우는 꼴이 되었음을 자조했을 때 마침내 방랑이 끝났음을 깨달았다는 대목이다. 그렇게 아이네이아스는 신에게 버림받은 방랑자이자 저주받을 정도로 잔인한 이방인에서 평화와 동맹의 상징인 올리브 가지를 든 영웅으로 거듭난다.
과외용 기출문제집을 냄비받침 삼고 유제품이 들어가지 않아 비교적 뻣뻣한 빵에 양배추찜을 얹고 허겁지겁 먹다가 문득 아이네이아스가 떠올랐다. 지치고 굶주려 누구를 해칠 여력조차 없는 방랑자처럼, 나는 고기 없는 점심을 식탁채로 먹어치우고 있다. 어릴 때도 다른 영웅들의 방랑기보다 신화 끝자락의 아이네이아스 이야기가 그렇게 재미있었던 건 그가 수많은 실수를 거쳐 희망조차 잃어버릴 때쯤 마침내 영웅으로 거듭나기 때문이었다. 아이네이아스 일행은 자신들의 욕구를 채우고 살아남기 위해 영역을 지키려는 하르퓌아 같은 괴물들을 비롯해 너무 많은 피를 흘렸다. 아이네이아스가 외면한 디도 여왕의 결단은 하르퓌아의 저주만큼이나 강렬하게 아이네이아스의 등을 뜨겁게 달궜으리라. 서사 속 인간의 욕구와 욕망에 매료되었기 때문이었는지, 안타까운 비극으로 여겨지는 디도 여왕의 이야기조차 나에게는 욕망을 향해 모든 것을 불태운 강인한 화신의 이야기로 읽혔다.
매번 배꼽시계에 따라 허기져하며 급하게 밥상을 차리는 나는 요즘 욕구에 매우 충실하다. 그리고 욕구를 넘어서는 무언가를 향한 욕망을 찾아나가고 있기도 하다. 나도 방랑의 끝을 직감한 아이네이아스처럼 긴 투병을 넘어 약속된 운명을 만나는 어느 지점에 와있는 걸까? 영웅까진 아니지만 어찌 되었든 나의 삶은 분명 새로운 전환점에 서 있다. 매일매일이 단조로워 보이지만 실은 모두 새롭기만 한 제주도에서, 나는 디도 여왕처럼 욕망을 불태울 대상을 찾고 있다. 그러나 결말은 그와 다를 것이다.
겁 없는 날
매일 같은 길을 걷고 같은 음식을 먹으면서 매일이 왜 새로우냐고? 나는 아직도 익숙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공간에 익숙해진다는 건 어디든 걸터앉아 하릴없이 주변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내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파도에 조금 닿는 것조차 두려워하던 내가 파도가 밀려드는 여의 끝에 발을 디디고 미끄러운 이끼 위로 걸어보고 뾰족하게 솟아오른 바위 위로 위태롭게 올라도 본다. 그런 일들이 점점 무섭지 않게 되면서 나는 서귀포의 작은 해안에 익숙해지고 있다. 이 공간을 믿게 되었다.
붕 뜬 것 같은 감각 속에서 바라만 보던 곳들로 다리를 뻗는 나를 보며 웃음이 터졌다. 새로운 곳에 자꾸 나아가 보고 싶은 오늘은 겁 없는 날인가. 해녀마켓의 담벼락에 올라 아무렇게나 걸터앉았고 발을 대롱대롱 흔들며 노래를 따라 불렀다. 엄마와 통화도 하고 사진도 찍고 그러다 고요히 바람을 맞으며 바다를 바라보았다. 하염없이, 누구의 방해도 없이. 매일매일 이럴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할 것이다. 결코 지겨워지지 않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