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일 차 : 어둠, 관찰-살아있음의 증명

특별하지도 평범하지도 않은, 조용하게 별난 대학원생의 85일간의 제주산책

by 여현

어둠


새벽에 눈을 뜨는 일은 새로운 시공간을 만나는 일이다. 남들이 말하는 소위 '미라클 모닝' 그런 게 아니다. 자연스럽게 눈 뜨는 대로 사는 일상에 어떤 유행어나 상투적인 의미를 붙이고 싶지는 않다. 의지적인 것도, 부지런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깟 '갓생'이 아니라 한가로운 일상이며 자연스러운 일상이다. 해 뜨면 시작되고 해가 지면 끝날뿐이며 생체시계에 따라 배가 고파서 깨고 배가 고파지기 전에 잔다.

그럼에도 아침이 있는 삶을 넘어 새벽이 있는 삶을 살게 된 이후 만난 변화나 달라진 의미가 있긴 하다. 예전엔 같은 시간에 눈을 떠도 부족한 잠과 피로에 이불속에서 홀로 괴로워했다. 하지만 지금은 새벽같이 일어나도 개운하게 요가를 하고 하고 싶은 일, 만들고 싶은 일상을 말하면서 아침을 먹고 일어나 준비운동을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이제는 어둠이 두렵지만은 않다. 별빛이 사라지는 게 아쉬워 불을 켜지 않고 움직이는 데 익숙해졌고 차단되지 않은 새벽의 빛에 의지해 움직이곤 한다. 그러다 보니 완전한 암흑이란 없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었다. 도시는 너무 밝아서 어둠이 두려웠는데 여기서는 해가 지면 그 자리를 채우는 어둠이나 희미한 달빛, 별빛이 너무나 당연해 두렵지가 않다. 어쩌면 어둠은 인공적인 빛 없이 마주할 때 진짜 빛과 함께 그 따스한 진면목을 드러내는 것이 아닌지.

모두가 잠든 바닷가에 위치한 작은 방에서, 캄캄한 어둠 속에서 자유롭게 막춤을 추다가 서서히 밝아오는 하늘을 보고 달리러 나간다.



관찰-살아있음의 증명


매일매일 내 모습을 살피고 사진으로 남기는 게 이렇게 즐거운 일인 줄 몰랐다. 나는 늘 내가 세상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질까 두려웠다. 한강의 소설 『검은 사슴』에서 출생 신고조차 되지 않아 이 세상에서 없는 존재로 살아온 인물을 보고 가슴이 먹먹해 견딜 수 없었던 건 같은 두려움을 안고 있기 때문이었으리라. 만들어진 인적사항으로 제대로 된 직업도 갖지 못한 채 살아가던 그가 거짓된 삶과 증명할 수 없는 자신의 존재를 견디지 못해 모든 걸 벗어던지고 나체로 교차로를 달리던 장면이 마음속 깊이 박혀왔다. 아마 세상에 대한 두려움이 언제나 '이제 네 차례야.' 하는 목소리와 함께 혼잡한 교차로로 등을 떠밀리는 환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세계, 아무도 나를 인정해주지 않는 그런 세계가 두려워서 다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었다. 그렇게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고 누구보다도 잘 살고 싶었기 때문에 오히려 다 멈춰버리고 싶었던 때가 있었다.

차라리 다 멈추고 내 손으로 모든 걸 지워버리면 덜 억울할 것도 같았다. 포기할 용기가 나아갈 용기보다 더 커지는 그런 두렵고 무기력한 순간을 아프게 마주했었다.


물론 이젠 아니다. 하나하나 남기려고 한다. 『검은 사슴』에서 나를 울린 그 인물은 매일 하루를 마감하면서 일기를 썼다. 고심 끝에 고른 가장 적확하고 간결하며 명료한 언어로 자신의 하루를 온전히 기록하려고 했다. 그것만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준다는 듯이 절박하게 썼다. 나 역시 그런 마음으로 내 하루하루를, 나의 모습을 여러 가지 언어로 남기고 싶어 졌고 그래도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소설 속 인물과 달리 나는 더는 슬프지 않다. 여전히 내 존재를, 나라는 사람을 증명하고 싶고 그래야만 숨 쉴 수 있을 것만 같지만 그 욕구가 짐이 아니라 내가 읽고 쓰고 생각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저 내가 없는 것 같아 견딜 수 없었던 때와는 전혀 달라졌다. 나는 지금 내가 어떤 형태로 살아있음을 느낀다.


무엇보다도 예전과 달리 오늘의 나는 누구의 시선도 의식하지 않고 내가 먼저 나를 보려고 애쓰고 있다. 그런 나의 시선에 포착된 내 모습들을 하나하나 다시 살펴보면 뿌듯해진다. 특별히 보정하지 않고서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담기만 해도 스스로에게는 충분히 좋은 사진을 건질 수도 있게 되기도 했다. 그 사실이 그렇게 기쁘다.


타인의 시선보다 나 자신의 시선을 더 많이 의식하고 있는 오늘의 몸은 평소보다 더 가뿐했다. 모레는 더 잘 달릴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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