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하지도 평범하지도 않은, 조용하게 별난 대학원생의 85일간의 제주산책
반가운 지루함
요즘 달리기 강도가 세져서 그런가 종아리도 발목도 풀어달라고 쉬어달라고 아우성이다. 어떻게든, 페이스를 낮춰서라도 끝까지 해보려고 하는데 부상을 입으면 말짱 헛것이 되니 조심해야겠다.
부상을 방지하고 근육을 풀어주려고 격일로 달리는데 달리는 날이 아니더라도 눈만 뜨면 달리러 나가고 싶어 안달이 난다. 근래 잠드는 시간은 늦어지고 깨는 시간은 그대로라 수면의 질이 썩 좋지는 않은 편이다. 그럼에도 눈을 뜨면 몸을 풀어주는 습관이 생겼고 자연스럽게 물이라도 뜨러 밖으로 나가는 일련의 행동양식이 개운한 아침을 열며 나를 지탱해주고 있어 다행이다.
몸을 풀고 창을 열어보니 잔뜩 흐리고 습도가 높은 날이다. 바람이 습기를 머금어 무겁고 가라앉은 것들이 많아서인지 세상은 보다 고요해서 파도 소리가 크게 울린다. 장을 볼 것도 없고 빵집이 문을 열려면 한참 남았는데 벌써 나갈 준비를 마치고 앉아있는 나는 분명히 바람이 잔뜩 들었다. 외출을 그토록 힘들어했던 내가 이렇게 나가고 싶어 안달인 걸 보면 선생님은 분명 놀라실 텐데. 그리고 칭찬해주실 텐데.
슬슬 찾아오는 지루함이 반갑다. 글쓰기는 아직 모르겠지만 책을 읽을 준비가 된 것 같아 전자책을 몇 권 빌렸다.
익명의 다정함
학교 정문과 작은 공원 사이에 사는 소녀상은 겨울만 되면 목도리, 장갑, 모자 같은 방한 용품을 선물 받는다. 학생들이나 시민들이 전하는 마음의 표현이다. 우리는 그런 소녀상을 보며 과거의 고통스러운 기억과 살아남은 분들의 목소리를 잊지 않기로 약속했다. 그리고 온기를 나눠 받았고 눈이 쌓이면 털어주기도 했다. 그런 사람들의 마음은 어딜 가나 비슷한가 보다. 이곳의 잠녀상에도 스카프가 둘러져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비가 오든, 눈이 오든, 폭풍이 몰아치든 잠녀상은 항상 법환포구 옆 작은 광장에 묵묵히 서 있다. 동화 속 행복한 왕자 동상처럼 언제까지나, 온몸이 벗겨질 때까지도, 누가 허물어버릴 때까지도. 결코 스스로 사라지지는 않는다. 무엇이 찾아오든 잠녀상은 굳건히 버티고 있다. 사람들은 마치 석상이 살아있는 존재라도 되는 것처럼 좋아하고 아끼고 마음을 쓴다. 단순히 우리의 모습을 본따서 그렇다고만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교감이 분명 있다. 항상 거기 있는 존재와 나누는 교감이다.
거의 매일 눈앞을 지나가는 나를 그는 기억할까? 스카프를 감아준 누군가를 기억할까?
그 익명의 다정함을 느끼며 이곳을 지나는 모두가 건강하기를, 그런 소망을 석상에 담아보았다.
이해불능
다정함을 느끼며 미소 짓다가 고개를 딱 돌리자 기분이 가라앉았다. 오전에 달리기를 하면서 밤새 누군가가 벌인 술판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는 공용 벤치를 보고 할 말을 잃었었다. 이렇게까지 내버려 두다니. 완벽하진 않아도 큰 쓰레기라도 치우면 좋았을 텐데. 바로 근처에 식당이 있어서 여기 손님을 받고 덜 치운 걸까 잠시 생각했지만 굴러다니는 치킨박스에 고개를 저었다. 횟집에 치킨이라니 어불성설이다.
그리고 다시 오후에 나와보니 누군가가 모든 것을 정리한 후였다. 누구였을까, 누가 책임졌을까, 누가 또 어지러운 광경을 목격했을까. 왜 저지르는 자와 책임지는 자, 그리고 피해 입는 사람은 다 따로일까?
솔직히 말하자면 처음에 계획한 것과 달리 플로깅을 제대로 시작하지 못했다. 볼 것도 느낄 것도 많다는 핑계로 소홀했다. 잊지는 않아서 조만간, 내일은, 내일은, 해왔다. 그렇게 어지러운 광경을 보고도 지나치기만 했던 나는 어디쯤 서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