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일 차 : 습기, 지붕 없는 손님

특별하지도 평범하지도 않은, 조용하게 별난 대학원생의 85일간의 제주산책

by 여현

습기


새벽에 눈을 떴는데 습기가 느껴졌다. 기상 정보에서는 건조한 날이라고 했는데 집안은 습했다. 창을 열자 젖은 듯한 바람도 불어 들어온다. 부엌 불을 켜고 커튼을 가리고 창에 붙어 잠시 어두운 하늘을 응시했지만 별이 보이지 않았다. 비가 오겠다. 흐린 날이다.


착잡한 바람이 밤의 공기를 적당히 흩트려주었다. 어제부터 읽기 시작한 단편집은 버거웠다. 강화길 작가도 좋고, 모던 고딕을 차용한, 아니 거의 『나사의 회전』을 모티프로 삼은 듯한 손보미 작가의 소설도 흥미로웠다. 그러나 계속되는 여자들의 비명을 듣는 그런 기분이었다. 그런 류의 소설만 모아둔 소설집이긴 하지만 끝없이 퍼지고 묻히기를 반복하는 그 비명 끝에 무언가 있기를 바라는 나 자신이 가장 버거웠다. 반복되고 피할 수도 없는 그런 여자들의 생 너머로 갈 수 있는 무언가가 있기를 바라고 또 바라는 나.


천희란이라는 작가명을 보고 책을 덮었다. 조용히 일어나 아침을 먹었다. 이 소설집은 오늘은 여기까지. 오늘은 들을 만큼 들은 것 같았다. 천희란 작가의 소설집을 읽은 적이 있는데, 비명소리도 없는 검붉은 현실이 날 것으로 박동하고 있었다. 지금은 그런 색과 박동을 마주할 힘이 없다.


창을 닫고 동이 트는 것을 보고 있자니 비가 기다려진다. 시원하게 비가 내려 계속 피어오르는 불씨들을 잠재워주기를. 봄비가 그친 후의 땅은 이전과 다를 테고 비명이 묻힌 그 자리에 목소리가 생겨날 것이다.



지붕 없는 손님


이 동네에서는 혼자 다니는 20대 청년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여기 혼자 사는 어린 여성은 내가 유일할지도 모른다. 나름 읍내라고 할만한 골목에서도 스쳐 지나는 젊은이들은 동행이 있는 여행객들뿐. 사실 나도 잠시 머물다 가는 여행객이니 다를 바 없다. 그저 혼자라는 점이 눈에 띌 뿐이다.


또래는커녕 여행객 외의 사람을 만날 일도 거의 없는 이곳에서 매일 같은 장소에서 볼 수 있는 커다란 새나, 마당에 늘 묶여있는(마음이 아프다) 개가 매번 반갑다. 내가 인사를 하며 지나갈 때면 이름 모를 그 개는 항상 나와 시선을 맞추고 반응해준다. 남의 집 마당에 함부로 들어갈 수는 없어 멀찍이서 손만 흔드는데 꼬리를 흔들며 다가오기를 기다리는 개를 보면 차라리 내가 아는 척을 하지 않는 것이 저 아이에게는 더 좋은 일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아니, 어쩌면 다 나만의 생각인지도 모른다. 나 혼자 반가워할 뿐일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그런 나날이다 보니 잠시 내 방 테라스에 머물다간 손님의 방문에 깜짝 놀랐다. 서울에서도 간혹 비둘기가 창가에 앉는 일이 있긴 했는데... 테라스 난간에 고요히 자리 잡은 이름 모를 검은 새는 잔뜩 젖은 깃털을 고르며 몸을 비틀다 누가 마당으로 나오자 날아가버렸다. 비록 창 너머로 만났지만 내가 이렇게 가까이 다가가도 떠나지 않은 새는 처음이었다. 영화 보다가 어찌나 놀랐지.

새가 떠나고 얼마 안 가 굵은 비가 쏟아졌다. 새들은 비가 오면 어디에서 무얼 하며 깃털을 말릴까? 지붕 없는 삶의 방식이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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