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일 차 : 섬 섬 섬, 우물 안 개구리?, 오일장

특별하지도 평범하지도 않은, 조용하게 별난 대학원생의 85일간의 제주산책

by 여현

섬, 섬, 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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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앞 해안에서 서쪽을 바라보면 산과 섬들이 보인다. 생각보다 제주도에는 큰 섬들이 많지 않은데 법환에서는 여러 섬들을 볼 수 있다. 서쪽으로 보이는 산과 섬들은 왼쪽에서부터 순서대로, 기생화산인 삼매봉, 긴 다리를 지나 나무가 많이 자라는 섶섬, 그리고 섬 위에는 아무것도 자라지 않는 바위섬이지만 그 아래에는 풍요로운 해양생태계가 펼쳐져 있다는 문섬이다.


밤에 삼매봉의 한 봉우리에 올라 손을 뻗으면 인간의 수명을 관장하는 별에 닿을 수 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그런데 요즘 동틀 때 보면 항상 해가 섶섬 뒤로 떠올라서(나중에 보니 해 뜨는 위치도 계절에 따라 달라진다) 새벽에 섶섬에 가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해를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섶섬과 해에 관련된 전설은 없는지 궁금하다.


나란히 자리한 섶섬과 문섬, 두 섬이 전혀 다른 생태계를 가지고 있다니 그 자체로 신비롭고 낭만적이다. 데칼코마니처럼 닮아 보이는 두 섬이 다가가서 보면 사실은 땅과 바다를 대표하는 낙원이라니. 꼭 소설에 써야지. 자연의 이야기는 늘 영감의 원천이 된다.



우물 안 개구리?


사장님은 당신을 섬에서 나고 자란, 많은 세상을 만나보지는 않은 우물 안 개구리라고 칭하셨다. 하지만 몸무게 미달로 헌혈을 하지 못할 정도로 작은 체구로도 큰 화분을 두 개씩 이고 지고 가시던 그 뒷모습처럼 가정과 여러 사업을 온몸으로 이고 살아온 분의 세상이 좁을까? 내가 아는 사장님은 보수적인 섬사람들에게 자신만의 삶의 방식과 능력을 증명해온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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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장님은 약속대로 나를 오일장에 데려가 주기로 하셨는데 오전에 제주시에 갈 일이 있으니 그때부터 동행해도 좋다고 하셨다. 나는 한가했기 때문에 기쁘게 수락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이어지는 예상치 못한 강행군이 되어서 다소 피곤하긴 했지만 정말 재밌었다. 가구점에서 가구를 골라 계약하는 과정도 구경했고 화훼농원에 커다란 방이나 다름없는 꽃 냉장고가 있다는 것도 배웠고 화분에 뿌리내린 꽃나무들을 다루는 난원이 따로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온통 새로웠다. 그 밖에도 서귀포의 신시가지와 구시가지의 변천사, 늙은 벚나무를 알아보는 법, 포구와 달리 범섬이 있어서 우리가 안전한 게 아닐까 하는 그런 이야기를 들었다.


이렇게 깊은 우물이라면, 우물을 속속들이 알고 자기만의 세계로 꾸며왔다면, 가보지 않은 우물 밖 하늘을 짐작하고 있다면, 그렇다면 참으로 멋진 개구리가 아닌지.



오일장

댕유자는 정말로 건강 관련 식자재를 파는 곳에서 취급하고 있었다. 아주 커다란 것만 있는 줄 알았는데 노지재배만 해서 그런지 모양도 크기도 제각각이었다. 10kg짜리 녹슨 저울의 바늘이 세 번 회전하는 동안 겨우살이가 뭔지, 참나무는 어디에 좋은지, 오미자청은 어떻게 담은 게 좋은지 그런 알짜배기 정보들을 주워 들었다.(그런데 기억이 하나도 나지 않는다.)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장사꾼들의 입담과 자연스러운 능청. 신기하게 생긴 묘목들과 흙내음이 남아있는 채소들. 무언지 알 수 없는 온갖 약재와 식재료, 촌스러운 옷들, 위생상태가 의심스러운 풀빵, 맛깔난 떡볶이, 달짝지근한 장아찌.


온갖 것들을 다 파는 대형할인마트에나 익숙한 나에게 재래시장은 그렇게 재미난 곳은 아니었지만 어릴 적 엄마, 언니와 떡볶이를 사 먹던 상가가 떠오르는 그런 곳이긴 했다. 상설시장이자 관광지에 가까운 올레시장과 달리 향토시장은 지역주민들 혹은 제주시에서 찾아온 장사꾼들이 정말로 생계를 나누는 그런 공간이었다. 누군가에겐 생계이지만 누군가에게는 구경거리에 지나지 않는 교환이 아니라 진짜배기 교환이 이루어지는 시장말이다.


잔뜩 지친 채로 도착해 빠르게 돌고 나오긴 했지만 생각보다 많은 이야깃거리를 얻었다. 맛있는 것들도 잔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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