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하지도 평범하지도 않은, 조용하게 별난 대학원생의 85일간의 제주산책
입도
27kg. 예상하지 못한 수하물의 무게만큼이나 발길이 무거웠다. 자유롭기 위해 떠나는 긴 여행에 설레고 기쁜 마음이 넘쳤지만 막상 출발하니 현실적인 문제들이 쏟아졌기 때문이다. 상상하던 여행과 실제로 일어난 여행. 그 사이에는 어마어마한 거리가 있다.
생각지도 못한 눈에 항공편이 지연되었다. 그래도 덕분에 하게 된 꼼이와의 산책은 즐거웠고 바닥에 찍힌 발자국 도장은 눈물 나게 귀여웠다. 꼼이 없으면 누나 어떡하지, 그 말을 일주일 내내 되뇌고 또 되뇌었다. 그러지 않기를 바라면서도 한편으로는 엄마가 내가 꼼이를 그리워할 마음 이상으로 나를 그리워하기를 바라면서.
단지 지연일 뿐인데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괜히 좋은 날에, 제사도 있는 설날에 술병이 나서 드러누운 동생에게 뾰족한 눈을 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나는 작은 것에도 예민해진 상태였다. 계속 늘어가는 짐과 출발 전부터 지연되었던 항공편, 생각보다 더 무거운 짐에 다른 짐까지 부치기로 결정하면서 예상은 또 빗나갔다. 그리고 또 지연. 잘 앉은자리에서 괜히 일어나는 바람에 30분을 서서 기다려야 했다. 겨우 올라탄 비행기에서는 노트북이 든 가방을 짐칸에 싣지 않으려고 머뭇거리다 그 가방보다 더 위태로운 에코백을 짐칸에 올려두게 되었다. 쏟아질까 봐 얹듯이 담아두었던 작은 차 상자는 꺼내고 가방을 올렸다. 내 무릎 위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오설록 차 한 박스를 보면서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이제 남은 일은 무사히, 말 그대로 탈 없이 사고 없이 제주에 내려서 짐을 찾고 택시를 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예상을 빗나가는 일들이 연달아 벌어지고 있는 와중에 나는 불안보다 설렘을 잡고 싶었다. 부디 행복하기를, 무탈하기를. 안녕, 서울. 안녕? 제주. 그렇게 마음으로 인사하며 마침내 섬에 발을 디뎠다. 하지만 남은 일 하나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형 캐리어, 큰 짐가방, 큰 물건들이 든 에코백, 어깨에 맨 무거운 배낭까지 짐을 이고 지고서 뒤뚱거리며 택시 승차장을 찾아갔으나 줄이 어마어마하게 길었다. 아빠의 친구분이시자 펜션에서 지낼 수 있도록 도와주신 삼춘이 전화를 주셔서 제주시와 서귀포시로 가는 택시 줄이 다르지 않냐고 하셨는데, 줄이 너무 길어서 내가 볼 수 있는 건 이 줄이 택시 기다리는 줄임을 암시하는 택시 승차장 방향을 안내하는 표지판들뿐이었다. 줄이 두 개인지 한 개인지 확인할 수 있는 거리에 있지 않았던 나는 멀거니 대형 캐리어를 바라보며 기껏 내 차례가 되었는데 캐리어가 짐칸에 안 들어가면 어떡하나 그런 고민이나 하고 있던 차였다. 삼춘이 콜택시의 존재를 알려주지 않으셨다면 나는 계속 바보처럼 거기서 긴 시간을 낭비했을지도 모른다. 삼춘 덕분에 택시를 호출해 무사히 숙소 앞에 도착했다. 커다란 캐리어도 아슬아슬했지만 어떻게든 짐칸에 실을 수 있었다. 무겁다며 혀를 차는 기사님 앞에서 멋쩍게 웃었다. 걱정은 현실이 되지 않았다. 나름대로 순조로웠다.
택시에서 내려 다시 무거운 짐들과 함께 숙소 입구 겸 마당에 홀로 남게 되었을 때 내가 본 것은 어둠이었다. 6시 반 정도였는데 이미 섬은 잠들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어둠 속에서 저편에 바다가 있다는 것을 가늠해볼 수는 있었지만 그 모습과 늠름한 범섬의 형상은 전혀 그려볼 수가 없었다. 숙소의 가로등 한두 개만 빛나는 가운데 내가 바다보다 먼저 마주한 건 짙은 밤하늘과 도시보다는 확실히 많은 별이었다.
소심함을 숨기지 못하고 어색해하면서 바로 옆에 있던 사무실도 발견하지 못하고 물어 물어 겨우 숙소를 안내받을 수 있었다. 내가 3개월 혹은 그 이상 머무를 숙소. 그 시간 동안 내 방으로 만들어가야 할 공간은 생각보다 넓었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단출했다. 허기조차 날려버릴 정도로 지친 몸은 깔끔한 화장실 및 욕실과 걱정 없는 수압, 단정하게 정리된 큰 침대에 마침내 안심한 것처럼 무너져 내렸다. 무슨 정신으로 씻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데 그 와중에 가져온 실내복 등판에 ‘Free Dobby'라고 적힌 걸 보고 의도치 않은 대학원생의 자유 선언을 사진으로 남겼다. 너무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저편을 바라보다 커튼을 치고서 쓰러지듯 잠들었다.
그렇게 예상치 못한 어둠 속에서 시작되었다, 나의 도시 탈출기, 우울증 투병기, 휴학생으로서의 자유학기, 막춤처럼 달리기, 그리고 바다와 함께하는 산책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