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7.14 필사
어디로든 도망가고 싶었으나 어디를 둘러봐도 사방이 모두 똑같은 풍경이라 그게 더 무섭고 절망스럽던 몽골의 평원에서 나는 그 소년을 붙잡고 두 마리 망아지처럼 울고 싶었다.
휴게소에서 인사 기계를 마주 보고 서 있을 때, 검은 집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티모시가 외치는 장면을 떠올렸다. 나는 그 검은 집이라는 게 소설가의 재능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술집에 모여서 농담거리로 삼을 뿐 그 안에 뭐가 있는지 들여다볼 생각은 아무도 하지 않는 집과 같은 것. 소설가가 재능에 대해서 말할 때는 소설을 쓰고 있지 않을 때다. 소설가에게 재능이란 인사기계나 기도기계 같은 것, 그러니까 마치 나 대신에 소설을 써주는 것처럼 느껴지는 소설기계 같은 것이다. (..) 재능이라는 소설 기계는 소설을 만들지 않는다. 소설기계 역시 소설가의 죄책감이나 꺼림칙함을 덜어주기 위해서 고안된 기계다. 소설을 쓰지 않기 위한 방법 중에서 재능에 대해서 말하는 것보다 더 효과적이고도 죄책감이 없는 방법이 어디 있겠는가!
“그 집은 잠겨 있지 않아, 비밀 같은 건 없어. 진실만 있지” 재능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그만두고 실제로 글을 써보면 재능은 ‘잠겨 있지 않으며 비밀 같은 게 아니라 진실만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리라.
소설을 쓸 것인가 죽을 것인가. 그의 마음속에는 릴케의 말이 맴돌았다. “글을 쓰지 않고도 살 수 있을 거라 믿는다면, 글을 쓰지 마라.” 그는 글을 쓰지 않고는 살 수 없을 것이라고 믿었고, 그래서 글을 썼고, 결국에는 사십여 년 뒤 ‘백 년의 고독’을 내 서가에 꽂게 만들었다.
사랑하는 재능을 확인한 뒤에야 사랑에 빠지는 사람도 있을까? 그러니까 사랑에 빠진 젊은 소설가여, 매일 그걸 해라.
언젠가 장 콕토는 프라도 박물관에 화재가 나면 어떤 작품을 구하겠느냐는 질문을 받았소. (..) 그는 고대 그리스 작가의 글을 인용해 “프라도 박물관의 한 부분에라도 불이 붙으면, 나는 그 불을 구할 것이다!”라고 대답했다 _ 살바도르 달리
죽음이라는 게 몸을 잃는 일, 그래서 어떤 것도 감각할 수 없는 상태를 뜻한다면. 처음 소설을 쓰려고 앉았을 때, 나는 무엇도 감각하지 못하는 영혼과 같다. 그래서 무엇이든 감각하려고 애를 쓴다. 그건 ‘머리에 떠오르는 대로 빠르게’ 쓰는 행동으로 나타난다. 그렇게 조금씩 소설 속의 세계는 작가에게 느껴지기 시작한다.
어떤 사람을 둘러싼 세계에서 원인과 결과의 연결고리를 제거하면 그는 무기력해진다. 그렇다면 이건 우리 인생에 대한 은유가 아닐까. 사춘기가 지나면서 우리 인생도 조금씩 인과의 사슬에서 벗어나니까. 공부를 열심히 한다고 해서 원하는 대학에 갈 수 있는 건 아니라거나 착하다는 이유만으로 잘 살지 못한다는 걸 우리는 깨달아간다. 해서 무기력은 현대인의 기본적 소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