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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ura Sep 26. 2019

글자풍경 - 유지원 02

2019.08.11 필사

나 자신을 다른 공간에 위치시키면, 나의 좌표가 달라지면서 세계라는 공간이 내게 재편성된다.


가끔은 당연한 것도 굳이 상기하지 않아서, 그것이 의식의 수면 위에 떠오르면 새삼스러워질 때가 있다.


유럽에서는 전반적으로 같은 로마자를 쓰더라도 그 스타일에는 영국식, 프랑스식, 플랑드르식, 독일식, 이탈리아식 등 지역색이 있다. 예컨대 프랑스 글자체들에서는 대문자가 소문자보다 뚜렷하게 크고 두드러진다. 그와 반대로 독일 글자체들은 대문자가 소문자에 비해 너무 부가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인다. 독일어에서는 모든 명사가 대문자로 시작하게 때문에, 대문자가 너무 크면 눈에 덜걱덜걱 걸리는 게 많아 시선의 흐림이 매끄럽지 않고, 지면 낭비도 심해져서 그렇다.


글자들은 지역을 호흡하며 공공의 글자 생태계를 다채롭고 풍요롭게 한다.


독일의 교육은 나의 뿌리가 생성된 곳을 끊임없이 되돌아보게 했다. ‘너는 어디서 왔는가?’, ‘무엇이 자연스러운가?’, ‘잃어서는 안 될 가치란 무엇인가?’. 독일과 프랑스 등 유럽 대륙의 지식 사회는 자기반성적인 정서가 강했다, 본인들의 장점이라 해도 타인이 이를 비판 없이 흡수한다면 그런 태도를 경계했다. 영어권 세계의 단일화 경향에 대한 경각심은 독일의 이런 정신적인 환경 속에서 내게도 부지불식 간에 싹트고 자라왔던 것 같다.

 획일화한 글로벌의 지배는 토착 문화 속 일상을 희생시킬 수 있다. 표준화는 중요하지만 불가피하게 소외를 낳고 다양성의 박탈을 가져온다. 거대 기업화와 성장 위주의 담론만이 전부는 아니다.


질문은 여전히 남는다. 헬베티카는 정말 잘 디자인된 글자체인가? 이런 질문에 이르면, 글자체를 순수형식적인 완성도에서 판단하는 비평적인 안목을 근거로 답을 해야 한다. 헬베티카의 비례, 곡선을 가진 글자들의 커브, 커브가 끝나는 커트의 처리, 하얀 속공간의 탱글한 긴장감, 글자들 간의 어울림에는 빈틈이 없다. 무표정한 듯도 하지만, 조화와 리듬감을 갖춰 경직되어 있지 않다.


가까운 서울시로 눈을 돌려보면, 서울의 사인 시스템 디자인에 본격 활용되기 시작한 서울서체 중 고딕체 계열인 서울 남산체가 다른 한 도시의 인상을 대표하는 산세리프인 헬베티카와 비견할 만하다. 서울 남산체에는 장점이 많다. 도시의 인상을 단아하고 부드럽게 보여 준다.

 그러나 처음 개발될 당시에 워낙 여유 없이 촉박하게 만들어진 터라, 아쉽게도 낱글자들의 완성도가 들쭉날쭉하다. 특히 ㅎ은 글자체의 개성을 과도하게 드러내려다 무리가 생겼다. 동그라미 위로 두 개의 획이 쌓이는 등 가뜩이나 다른 자소들에 비해 획도 몰려있는데, 오른쪽 끝을 열어 두려다 보니 더 복잡해졌다. 이렇게 글자의 개성을 내세우면 브랜딩의 측면에서 서울시가 뭔가 일을 했다는 표가 나긴 하지만, 이런 자의식은 시민들의 미적 쾌감 및 편의와는 별 관련이 없다.


표준화는 다양성을 희생시킬 수 있고, 필연적으로 어느 한쪽이 다른 쪽을 주도하게 된다. 지금의 다국어 타이포그래피에서는 아무리 양 문자문화 간의 균형을 잡고자 의식해도, 일반적으로 서구의 로마자가 주도적이고 일방적인 영향을 행사하는 경향이 크다.


홍콩에서 로마자와 한자가 공존하는 방식을 바라보면서, 우리가 낯설고 이질적인 타자와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갈 때 어떤 태도와 관계를 취하면 좋을지, 여러 생각이 들었다. “너도 나처럼 하면 더 좋다”라고 권하는 것이 배려라고 여길 수도 있다. 하지만 타자의 방식이 다소 이해되지 않고 불편해 보여도 “너는 너대로, 다르면 다른 대로”라고 존중하는 것은 어떤가? 각자가 각자의 영역에서 편한 대로 부대끼며 살아가면 또 어떤가. 그러한 홍콩의 글자 풍경에는 묘한 해방감과 자유로움이 깃들어 있다.


지금의 유니코드로 지구상의 각종 문자들이 통합되어, 이제 하나의 코드 체계 속에 공존한다. 글자들은 분쟁을 거두고 시대와 지역을 넘어 하나로 모이고 있다. 그래서 한때 ‘언어의 바벨탑’이 무너졌다면, 21세기에는 유니코드를 통해 이제 ‘문자의 바벨탑’을 세워가고 있다고도 한다.

“키보드 저 아래 심연에는 우리가 예감도 못했던 보물 같은 글자와 부호들이 묻혀 잠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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