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8.11 필사
유지원은 디테일의 세계로 우리를 끌어들인다. 그동안 한 번도 유심히 보지 않았던 것들의 세부로 우리를 초대하고 미묘한 차이를 음미하자고 유혹한다. (..) 유지원은 과학자의 머리와 디자이너의 손과 시인의 마음을 가진 인문주의자다. _ 박찬욱 <추천의 글> 중
‘수동적인 가죽 장정 대신 능동적인 독서를’. 책이 부르주아와 귀족의 비싼 서재를 그 호사스러운 가죽 장정으로 장식하는 역할에서 벗어나, 모든 독자의 손에서 능동적으로 펼쳐지도록 함으로써 편안한 독서를 제공하는 역할로 거듭나도록 하겠다는 것이 바로 ‘타이포그래피의 근대정신’이다.
나는 이 책을 글자들의 생태계처럼 조성하고자 했다. 글자들의 숲, 종이들이 이파리처럼 나부끼고 먹의 묵향이 번지는 곳, 인쇄기가 덜커덕덜커덕 구슬땀을 흘리며 근대로 향하는 정신의 텍스트를 힘차게 찍어 내는 곳, 싱싱한 생명의 피처럼 기계를 돌리는 기름 냄새가 풍기고, 기계의 견고한 육신이 장인들의 노동과 온기에 힘입고 삶의 온도를 생생히 유지하는 곳, 갓 떠낸 검은 잉크가 피부의 윤기처럼 반짝이며 그윽한 체취를 풍기는 곳, 활기가 넘치는 거리 위 네온이 반짝이는 곳, 지구상 다양한 양태의 정신들이 글자로 응결되어 맺혀 있는 곳..
“사방의 지역마다 자연의 풍토가 다르다.
따라서 지역마다 사람의 발성과 호흡도 달라진다.
그러니 언어가 달라지고, 이에 따라 글자 또한
서로 달라지는 것이 자연스럽다. 억지로 같게
만들려고 하면 조화에 어긋난다.”
글자의 생태적 성격을 이보다 잘 드러내는 고전 문헌이 또 있을까? 타당하고 아름답다. 그는 세종 시대 집현전 대제학을 역임한 정인지(1396-1478)였다. 그의 이런 생각은 <훈민정음> 해례본의 서문에 남겨졌다. 글자는 지역적 생태성을 가진다.
중세적 토양에 여전히 발을 디딘 <42성서>로 신중하게 점화된 구텐베르크의 불씨는, 인쇄기의 삐거덕거리는 소음을 싣고 일파만파 번져 나갔다. 이른바 미디어 혁명이었다. 지식과 사상이 대량으로 복제되고 신속히 보급되도록 한 이 기술적 혁신을 바탕으로, <95개 논제>는 지식인들의 책장만이 아닌 거리를 향해 기운찬 망치 소리를 울렸고, <루터 성경>은 일상의 쉬운 언어로 식자층이 아닌 이들에게도 다가갔다. 이 소리들은 전 유럽에 힘차게 퍼져 나갔다. 언어 혁명과 종교개혁을 지핀 루터의 불길은 이렇듯 근대를 밝히며 맹렬하게 타올랐다.
1890년에서 1910년에 이르는 벨 에포크는 새로운 예술을 필요로 했다. 이때 등장한 미술과 디자인, 건축 사조가 ‘아르누보’ 양식이다. 이름 그대로 ‘새로운 예술’이라는 뜻이다. 이 양식은 유럽 여러 국가에서 각자의 이름으로 불렸다. 독일어권에서는 잡지 <유켄트>의 이름을 따서 ‘유켄트 슈틸’, 즉 ‘청년 양식’이라고 했다. 이 사조의 미학은 청년과 같은 젊음과 대담함으로 ‘삶의 기쁨’을 누리는 것이었다.
디자인의 역사는 아름다움이 쓸모와 관계를 맺어 온 역사다. 순수미술과 달리 응용미술은 조형에 기능적 쓸모를 응용한다.
한 주간 쓸모로 점철된 일정을 보냈다면, 주말이나 휴일 하루 정도는 작심하고 쓸모없어져도 괜찮다. 잉여는 새로운 쓸모를 만든다. 그리고 순수하게 쓸모없어지기란 그리 쉽지만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