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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ura Aug 11. 2019

잊기 좋은 이름 - 김애란 02

2019.08.04 필사

책장을 열면, 당신의 인물들이 기우뚱한 욕망을 안고 내 쪽으로 절름거리며 다가온다. 나는 이들을 잘 알아본다. 허영이 허영 알아보듯, 타락이 타락을 알아채듯 제법 간단히. 어떤 악은 하도 반가워 나도 모르게 큰 소리로 아는 체할 뻔하기도 한다.


이들의 절뚝거림이 이들의 불편이자 경쾌다. 그 엇박 안에서 어떤 흠은 정겹고, 어떤 선은 언짢아, 당신의 인물들은 이윽고 한 번 더 사람다워진다.


무엇보다 나는 그 모든 말들이 내려앉는 저 마지막 자리가 좋았다. 과정이 생략된 뜬금없는 결말과 낙차가 좋았다. 그 한 줄 속에 이미 많은 이야기가 깃든 것처럼 혹은 그 한 줄이 이미 독립된 서사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나는 ‘아홉 개의 종이 있는 마을’이 무엇인지 모르면서 이미 ‘아홉 개의 종이 있는 마을’을 아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코앞에 생전 처음 듣는 합창 소리에 나는 말을 잇지 못했다. 노역 중 모차르트 곡 <피가로의 결혼>을 들은 <쇼생크 탈출> 재소자처럼 그랬다. 유리창 밖 어둠 사이로 조용히 눈이 내리듯 사람들 가슴팍에도 순식간에 수북 음이 쌓였다.


언젠가 두보가 쓴 <곡강>을 두고 학생들에게 얘기한 적이 있다. 단순히 ‘꽃잎이 떨어진다’라고 생각하는 삶과 그렇게 떨어지는 꽃잎 때문에 ‘봄이 깎인다’라고 이해하는 삶은 다르다고, 문학은 우리에게 하나의 봄이 아닌 여러 개의 봄을 만들어주며 세계를 더 풍요롭게 감각할 수 있게 해 준다.


이해란 비슷한 크기의 경험과 감정을 포개는 게 아니라 치수 다른 옷을 입은 뒤 자기 몸의 크기를 다시 확인해보는 과정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타인을 향한 상상력이란 게 포스트잇처럼 약한 접착력을 가질 수밖에 없다 해도 우리가 그걸 멈추지 않아야 하는 이유 또한 거기에 있지 않을까. 그런 얇은 포스트잇의 찰나가 쌓여 두께와 무게가 되는 게 아닐까 싶다.


‘이해’란 타인 안으로 들어가 그의 내면과 만나고, 영혼을 훤히 들여다보는 일이 아니라, 타인의 몸 바깥에 선 자신의 무지를 겸손하게 인정하고, 그 차이를 통렬하게 실감해나가는 과정일지 몰랐다. 그렇게 조금씩 ‘바깥의 폭’을 좁혀가며 ‘밖’을 ‘옆’으로 만드는 일이 아닐까 싶었다.


우리가 누군가의 얘기를 ‘듣는’ 다는 건 수동적인 행위를 넘어 용기와 노력을 필요로 하는 일이 될 것이다. 다만 뭔가를 자주 보고, 듣고, 접했단 이유로 타인을 쉽게 ‘안다’라고 해선 안 되는 이유도, 누군가의 고통에 공감하는 것과 불행을 구경하는 것을 구분하고, 악수와 약탈을 구별해야 하는 까닭도 그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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