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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ura Aug 11. 2019

잊기 좋은 이름 - 김애란 01

2019.08.04 필사

머문 기간에 비해 ‘맛나당’이 내게 큰 의미를 갖는 것은 그곳에서 내 정서가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때론 교육이나 교양으로 대체 못하는, 구매도 학습도 불가능한 유년의 정서가. 그 시절, 뭘 특별히 배운다거나 경험한단 의식 없이 그 장소가 내게 주는 것들을 나는 공기처럼 들이마셨다.


점심때면 ‘맛나당’에 수많은 손님과 더불어 그들이 몰고 온 이야기가 밀물처럼 들어왔다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나는 우리 삶에 생존만 있는 게 아니라 사치와 허영과 아름다움이 깃드는 게 좋았다. 때론 그렇게 반짝이는 것들을 밟고 건너야만 하는 시절도 있는 법이니까.


죽는 것 따위 하나도 두렵지 않던 시절. 정말로 용감하다기보다 죽음이 너무 멀어, 죽음이 추상이라 깔봤던 때. 나 역시 다른 아이들처럼 삶을 업신여기는 방식으로 삶을 만끽하며 젊음을 누렸다.


비록 고향을 떠나긴 했기만 나는 내 몫의 그 작은 어둠과 고요가 마음에 들었다. 나는 내 몸에 꼭 맞는 육면의 어둠 속에서, 내 가슴팍을 향해 하늘에서 닻처럼 내려온 형광등 줄의 흔들거림을 바라보며 가만히 누워있는 걸 좋아했다.


노래방, 내 어미도 가는 곳. 한 번의 농담과 또 한 번의 농담, 그다음 번의 농담으로 삶의 품위를 지키려 했음에도 불구하고 나쁜 소식이 어머니를 짓누를 때, 내 어머니가 놀러 가지 않고 살러 간 곳.


세상에는 기울어져야만 넘어지지 않는 순간도 있다는 걸 알았다. 삶의 중력. 그리고 온전한 비상이지도 못한 이 한 뼘의 부력.


‘제일’, ‘가장’과 같은 최상급을 쓰면 즐거울 때가 있다. 그때 나는 ‘무척’ 진실한 거짓말을 하는 기분이 든다. 그래서 종종 다른 방법을 놔두고 단순하고 무능한 부사를 쓴다. 그의 무능에 머리를 기댄다. 부사는 점잖지가 않아서 금세 낯빛이 밝아진다. 조금 정직한 것도 같다.


겨울의 옛말은 겨울(겻+을), ‘집에 있다’란 말뿌리를 가졌다. 그러니까 겨울은 ‘집에 있는’ 시간이다. 담요를 덮고 이야기를 듣는 시간. 밤이 길어 아이들은 착해지고 이야기는 모자란 계절.


말은 제 이름을 닮기 마련인데 ‘겨울’을 발음할 땐 입 주위가 바싹 쪼그라들지 않는다. 말이 추위를 타지 않아 좋다. ‘춥다’를 강조하기보다 ‘집에 있다’란 사실에 힘을 준 덕이리라. 혹한과 불모와 죽음의 계절에 주눅 들지 말고, 집에 가서 대화나 하라고, 군밥이나 까고 대화나 좀 하면서 그 가사의 시간을 견뎌보라고 옛날 옛적 겨울을 ‘겨슬’이라 부른 사람들이 헤아린 덕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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