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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ura Sep 28. 2019

당신이 옳다 - 정혜신 03

2019.04.30 필사

감정 통제를 잘해야 어른이고, 그래야 성숙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감정은 이성으로 얼마든지 통제 가능한 것이라고 믿는다. 마음에 관해 가장 널리 알려진 잘못되고 위험한 통념이다. 그런 인식 때문에 우리는 일상에서 너무 많은 대가를 치른다. 도대체 우리는 어떤 비용을, 얼마나 치르고 사는 걸까.


“저는 제 마음을 한 번도 제대로 말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주변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며 그들의 마음에 들려고만 했습니다. 그래서 징징거리거나 불만을 토로하는 사람, 어떤 문제가 생기면 짜증부터 내는 사람들을 잘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자기 마음, 자기감정을 드러내는 것을 사실은 안 좋게 생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답답하게 느껴지고 한심하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습니다.  어리석게도 저는 제가 독립적이고 철이 빨리 들어 제 앞가림을 잘하고 살았다고 믿었습니다. 열심히 살아왔다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게 아니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일수록 공감에 실패할 확률이 더 높아진다. 관계가 깊어질수록 사람은 더 많이 오해하고 실망하고 그렇게 서로를 상처투성이로 만든다. 서로에 대한 정서적 욕구, 욕망이 더 많아서 그렇다.

 옆집 사는 이웃에게는 친절하고 배려심 있게 대해도 내 배우자에게 그렇게 대하는 것은 쉽지 않다. 더 어렵다. 남에게는 특별한 기대나 개인적 욕망이 덜해서다. 그러나 내 배우자나 가족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그로부터 받고 싶은 나의 개별적 욕구와 욕망이 있다. 그 욕구만큼이나 좌절과 결핍이 쌓인다.


친구가 받을 사달라고 하면 살 수 있지만 만약 내게 갚을 돈이 있는데도 갚을 생각은 안 하면서 밥을 사달라고 한다면 돈이 있어도 사지 않을 것이다. 내가 받을 것이 있다고 믿는 사람에게 더 빼앗기고 휘둘리는 건 더 억울한 일이다. 부아가 치민다. 줄 것은 주지 않으면서 계속 요구만 하고 있다는 생각은 사람들이 자기 가족이나 연인처럼 관계가 밀접한 상대에게 갖는 공통적인 감정이다. 나만 가족이나 연인에게 그런 마음을 가진 것이 아니라 내 가족이나 연인도 나에게 비슷한 감정을 갖고 있다.


그럼에도 포기할 수 없는 건 이런 욕구와 욕망이 채워지지 않고서는 삶이 1밀리미터도 제대로 굴러가지 않아서다. 서로의 사랑에 대한 욕구를 지겨워하지 않고 비난하지도 않고 정면으로 마주한 채 기꺼이 공급하며 공급받는 일은, 우리 모두가 자기 삶의 동력을 마련하는 일이다. 미룰 수도 외면할 수도 없는 일이다.


“나중에 딴소리 마라, 후회하거나 힘들단 소리 하지 마라”는 강요성 다짐은 아이의 퇴로를 막은 거나 마찬가지다. 진로는 몇 회 까지 바꿀 수 있다는 법 조항이라도 있는가. 없다. 직업은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 열 번, 스무 번 계속 바꾼다고 안 될 이유가 없다. 

 계속 바꾼다는 건 흔히 생각하듯 게으르거나 끈기가 없어서만은 아니다. 자기를 찾기 위한 고민을 계속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 고민 속에서 ‘왜 나는 한 가지 일을 진득하게 오래 하지 못하는 걸까?’라는 생각도 늘 함께 들어 있다. 사람은 그런 존재다. 당사자는 그런 자신에 대해 남보다 더 많이 자책하며 생각한다. 그러니 “나중에 후회하거나 힘들다고 하지는 마라”같은 강요는 아이의 퇴로를 막고 철창에 가두는 것과 마찬가지다.


내가 선택했어도 열 번 백 번 무를 수 있고 바꿀 수 있다. 바꿔도 되는 공인 횟수가 따로 정해져 있지 않다. 사람마다 다르고 상황마다 다르다. 그걸 인정해 줘야 한다, 바꿔도 된다는 충분한 인을 받는 사람이 가장 빠르고 안정적으로 자기의 최종 선택지에 닿는다.

 옆에서 누가 채근하지 않아도 ‘내가 선택했으니 내가 책임져야 하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지나칠 만큼 하는 것이 사람이다. 누가 애써 일러주지 않아도 그런 식의 바르고 옳은 생각들은 우리 사회에 공기처럼 자리 잡은 명제다. 옆에 있는 사람, 사랑하는 사람이 해야 할 일이 있다면 공기처럼 강박적으로 스며드는 그런 생각들에 당사자가 휘둘리지 않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그래야 여유 있게 자신을 점검하고 숙고해서 판단한다. 그렇게 하는 판단이 그에게 가장 좋은 판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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