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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ura Sep 28. 2019

당신이 옳다 - 정혜신 02

2019.04.30 필사

누군가 고통과 상처, 갈등을 이야기할 때는 ‘충고나 조언, 평가나 판단(충조평판)’을 하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대화가 시작된다. 충조평판은 고통에 빠진 사람의 상황에서 고통은 소거하고 상황만 인식할 때 나오는 말이다. 고통 속 상황에서 고통을 소거하면 그 상황에 대한 팩트 대부분이 유실된다. 그건 이미 팩트가 아니다. 모르고 하는 말이 도움이 될 리 없다. 알지 못하는 사람이 안다고 확신하며 기어이 던지는 말은 비수일 뿐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우리 일상의 언어 대부분은 충조평판이다.


“그런 생각은 잊어. 너한테 좋을 게 하나도 없어” -충조

“그럴수록 네가 더 열심히 하고 배우려는 자세를 가져야지” – 충조

“긍정적으로 마음을 먹어봐.” – 충조

“그건 너를 너무 사랑해서 한 말일 거야” – 평판

“네가 너무 예민해서 그런 거 아니니?” – 평판

“남자는 다 거기서 거기다, 별다른 사람 있는 줄 아니” -충조평판


내 고통에 진심으로 눈을 포개고 듣고 또 듣는 사람, 내 존재에 집중해서 묻고 또 물어주는 사람, 대답을 채근하지 않고 먹먹하게 기다려주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상관없다. 그 사람이 누구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그렇게 해주는 사람이 중요한 사람이다. 그 ‘한 사람’이 있으면 사람은 산다.


공감은 내 등골을 빼가며 누군가를 부축하는 일이 아니다. 그 방식으론 상대를 끝까지 부축해 낼 수 없다. 둘 다 늪에 빠진다. 공감은 너를 공감하기 위해 나를 소홀히 하거나 억압하지 않아야 이루어지는 일이다. 누군가를 공감한다는 건 자신까지 무겁고 복잡해지다가 마침내 둘 다 홀가분하고 자유로워지는 일이다. 너를 공감하다 보면 내 상처가 드러나서 아프기도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나도 공감받고 나도 치유받을 수 있는 기회가 된다. 공감하는 사람이 받게 되는 특별한 선물이다.


공감과 관련된 일종의 클리셰가 있다. 공감은 누가 이야기할 때 중간에 끊지 않고 토 달지 않고 한결같이 끄덕이며 긍정해 주는 것, 잘 들어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니다. 전혀 잘못짚었다. 그건 공감이 아니라 감정 노동이다.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들어주다 보면 지친다. 참다 참다 인내심을 잃고 폭발하거나 폭발하지 않더라도 지치고 짜증이 나서 다시는 그 사람을 만나고 싶지 않게 된다. 일방적으로 쏟아낸 사람도 집에 돌아가면 찜찜한 마음이 생긴다. 너무 내 얘기만 길게 늘어놓은 건 아닌가, 내 말만 너무 많이 한 건 아닌가. 두 사람 모두에게 유쾌하지 않은 경험으로 남을 수 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 상처 입은 마음을 치유하는 힘 중 가장 강력하고 실용적인 힘이 공감이다. 가장 빠르고 정확하고 효율적이다. 공감은 수십 년간 천문학적인 연구비를 투입하여 최첨단 의학, 약학, 뇌과학, 생리학, 유전학, 생물학 등의 연구 방법론을 통해 개발된 어떤 항우울제보다 탁월하다. 동시에 그런 약물과 다르게 부작용이 전혀 없다, 압도적인 효과가 있는데 부작용도 없으니 비교가 무의미하다. 


감각적 반응 그 자체가 공감은 아니다. 한 존재가 또 다른 존재가 처한 상황과 상처에 대해 알고 이해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그 존재 자체에 대해 갖게 되는 통합적 정서와 사려 깊은 이해의 어울림이 공감이다. 그러므로 공감은 타고난 감각이나 능력이 아니다. 학습이 필요한 일이다.

악의가 없어도 얼마든지 타인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 그래서 공감은 배워야 할 수 있는 것이다. 미투 운동을 지지한다면서 자신도 모르게 피해자에게 2차 가해를 하는 사람이 많은 것도 그래서다. 배워야 아는 고통, 배워야 공감할 수 있는 고통이 세상에는 더 많다, 그래야 최소한 그런 고통을 겪는 사람에게 의도치 않게 상처를 주지 않을 수 있다.


먹고사는 힘은 자기를 지켜내는 힘에서 만들어진다. 자기 학대와 모멸을 스스로에게 강제하는 사람은 끊임없이 자해하는 사람이다. 국경을 침범한 사람이 무서워 그의 비위를 맞춰주면서 살아야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잠시는 목숨을 부지할 수 있지만 식민지의 국민으로 비참한 삶만이 기다릴 뿐이다.


“그래도 계속 만나야 하는 사이인데 그런 상사와도 잘 지낼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라고 묻는다면 다시 말할 것이다. 질문이 잘못됐다. 상사를 상수로 놓고 나만 변수로 취급하는 불평등한 인식의 구도 안에서 내가 제대로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없다. 상사가 중심이 아니라 내가 중심이 된 질문으로 질문 자체를 바꿔야 한다. 내 삶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나를 잘 보호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하는 것이 나를 지키는 일일까”

상사를 파악하고 살피는 것도 그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궁극적으로 나를 지키기 위해 하는 행위다. 상사가 아니라 그 어떤 관계도 그 관계를 유지하는 것 자체가 관계의 목적일 수는 없다. 그래서도 안된다.


감정은 판단과 평가, 통제의 대상이 아니다. 내 존재의 상태에 대한 자연스러운 신호다. 좋은 감정이든 부정적인 감정이든 내 감정은 항상 옳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은연중에 좋은 감정과 나쁜 감정이 따로 있다고 여긴다. 좋은 감정은 수용하지만 나쁜 감정이라 믿는 것은 없애거나 억누르려 한다. 후회나 짜증, 무기력, 불안, 두려움 같은 것은 나쁜 감정, 없애야 하는 감정이고 유쾌하고 잘 웃는 마음, 매사 긍정적이고 좌절하지 않는 마음은 좋은 감정이다. 북돋우고 강화시켜야 마땅하다고 믿는다. 나쁜 감정을 어떻게 해서라도 좋은 감정으로 정화시킬 수 있어야 멘탈이 좋은 사림이라고 생각한다.

 항상 긍정적인 마음으로 사는 것은 종은 일인가. 좋을 때도 있지만 아닐 때도 얼마든지 있다. 때로는 위험하기도 하다. 긍정적 감정은 자기 합리화와 기만이 만들어내는 결과일 때도 있고 자기 성찰의 부재를 뜻하는 신호이기도 하다.


성찰이 깊고 스스로에게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면 불안하고 흔들리게 된다. 상황을 더 깊고 입체적으로 보는 과정에서 만나는 불안은 불가피한 것이다. 깊은 성찰은 여러 갈래의 길과 전망을 보여준다. 복잡한 갈래 길들을 바라보며 인정하고 통합하는 과정은 불안을 전제로 진행되는 것이다.

 그런 과정을 거치며 심리적 토대는 더 튼실해진다. 이럴 때의 불안은 건강한 불안, 건강한 혼란이다. 입체적 통합을 위한 필수 과정이다, 건강한 불안을 외면하면 이 모든 과정이 생략되고 사라진다. 좋은 감정이 항상 좋은 것만은 아니듯 부정적인 감정도 항상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상황마다 다르다. 고정값이 아니므로 개별적 상황마다 다시 성찰해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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