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 하루를 살았는데,
오늘 내가 뭘 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 날이 있다.
아침에 눈을 뜨고 해야 할 일을 하고 저녁이 되면 하루가 끝난다. 분명 하루를 살았는데 마음 어딘가는 그 시간을 제대로 지나오지 못한 느낌이 든다. 특별히 나쁜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특별히 좋은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저 하루가 지나갔을 뿐이다. 이런 날들이 이어지다 보면 가끔 이런 생각이 든다.
나는 지금 정말 살아가고 있는 걸까. 아니면 그냥 시간을 버티며 지나가고 있는 걸까.
그럼에도 몸은 계속 움직이고 있다. 사람도 만나고 일도 하고 밥도 먹는다. 겉으로 보면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은 하루다. 그런데 마음 한쪽에서는 조금 멀리 떨어져 있는 느낌이 든다. 마치 내가 내 하루를 조금 떨어진 곳에서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그래서 가끔은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희미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주 사소한 순간에 그 생각이 조금 바뀌기도 한다.
퇴근길에 각오를 하고 밖을 나갔는데 생각보다 따뜻해서 몸의 긴장이 한순간에 풀릴 때.
따뜻한 커피 한 모금을 마셨는데 그 온기가 천천히 몸에 퍼질 때.
누군가와 별거 아닌 이야기를 하다 잠깐 웃음이 나올 때.
정말 아무것도 아닌 순간인데 그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아, 아직 여기 있구나.
그때 느낀 건 나도 모르게 살아 있다는 것을 너무 거창하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평범한 삶이라고 포장을 두껍게 해 놓고 막상 들여다보면 항상 의미 있는 일을 해야 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하고, 뭔가를 이루고 있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제대로 살아가고 있다고 느꼈으니까. 그런 일상을 보내지 않으면 온갖 죄책감과 자기 무력감이 몰려와 괴로웠다.
하지만 어떤 날은 그저 이렇게 작은 순간 하나로도 충분할 때가 있다.
집 가는 길 편의점 불빛,
집 앞 포장마차에 들려 잠깐 먹는 따뜻한 어묵 국물,
집에 들어와 신발을 벗고 잠깐 바닥에 앉아 있을 때도 있다. 오늘도 하루가 지나갔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그 순간들이 조용히 알려준다.
지금도 여기에서 하루를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아마 매일 하루를 살아가면서도 현실에 치여 이 사실을 자주 잊고 지내는지도 모른다. 너무 많은 생각과 너무 많은 걱정 속에서 그 단순한 사실을 놓치고 있는 것뿐이다. 그래서 오늘은 하루를 돌아보며 아주 작은 순간 하나만 떠올려 본다.
잠깐이라도 웃었던 순간, 바람을 맞으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했던 순간, 끼니를 뭘 먹을까 고민하며 설레했던 순간들.
한 순간이 있었다면 오늘 하루는 충분한 하루였을 것이다.
대단한 일이 없어도 괜찮고, 특별한 일이 없어도 괜찮다.
동기부여를 하며 스스로를 채찍질하지 않아도 괜찮다.
그래도 오늘을 분명히 지나왔기 때문에 지금 이 글도 읽고 있다.
그 사실 하나로도 오늘은 충분한 하루였을지 모른다.
그래도 아직 살아 있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