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리가 만난 지구인 20 _ 청소년인권활동가 가을(가명)
그녀는 만나는 시간과 날짜를 정확히 기억했다. 나는 약속한 날짜를 다른 날과 혼동했고, 그녀가 있는 커피숍으로 헐레벌떡 뛰어갔다. 조금은 새침한 기색이었던 그녀는, 이야기를 시작하자 곧 마음을 열었다. 긴 생머리가 참 예뻐서, 중학교에 다니는 동안 차별과 폭력에 혼자 맞섰다는 이야기와 그 생머리의 그녀가 같은 사람인지 잘 상상이 되지 않았다. 열정적인 10대였으며, 아직도 10대인 그녀를 만난 것은 마흔 살의 나에게 청량한 자극제였다.
Q . 자신에 대해서 소개해 주세요.
A . 청소년 성소수자예요. 탈학교 청소년이고요. 중학교 2학년까지 다녔어요. 지금은 입시 예술을 공부 하고 있어요. 중학교 1학년 때 청소년 인권 활동을 처음 시작했어요.
Q . 청소년 인권 활동에 어떻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어요?
A . 체벌이나 두발 규제 같은, 옛날에 일어난 청소년 인권침해 사례를 모아둔 책을 읽은 것이 시작이었어요. 거기에 청소년인권단체를 소개하는 페이지를 읽고, 체벌 반대 퍼포먼스 같은 걸 함께 했죠. 제가 학교 다닐 땐 정해진 체벌이 있다기보다, 구체적으로 예를 들면, 교사가 화가 나서 학생 뺨을 때린 사건이 있었어요. 걔한테 가서 청소년 인권 단체가 있으니 이렇게 이렇게 대응하자, 라고 말했어요. 하지만 학생 입장에서는 그러기가 힘들죠. 결국 무산됐어요. 그런 일을 몇 번 겪으면서 ‘폭력이 사라진 게 아니구나’라는 걸 알았어요. 지금도 다른 청소년들 얘기를 들어보면, 부산에도 체벌을 하는 학교가 아직도 있대요. 두발 규제도 있고요.
Q . 중학교나 고등학교나 대학교나, 학교생활이란 건 부당함이 꼭 따라오죠.
A . 소위 ‘지랄’을 한 적도 있었어요. 중학교 때 성추행을 하는 선생님이 있었어요. 학생인권센터에 가서 상담해도 안돼서, 신문고 싸이트에 제보를 했어요. 학교에 연락이 왔고, 익명 제보 였는데도 애들이나 선생님이나 그게 나 란 걸 다 알고 있는 눈치였어요. 제가 워낙 그런 걸 많이 하는 학생이었으니까요. 담당 선생님에게 가서 얘길 했어요. 내가 한 게 맞다, 하나가 아니라 여러 명의 피해 증언이 있다, 라고요. 실제 처벌 까지는 안 되고, 선생님이 모든 반 마다 다니면서 사과를 하는 걸로 합의가 됐어요.
세월호 때, 학교에서 기부금을 모으겠다고 무조건 천 원씩 다 들고 오라고 했어요. 기부는 그런 식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게 아니잖아요. 적은 금액이지만 기부는 스스로 하는 거죠. 그렇게 해서는 안 되다고 생각해서 청소년 인권 단체에 알렸어요. 단체에서 공문을 보내기로 했는데, 그 전에 다행히 취소가 됐죠. 하루 만에.
그리고, 방과 후 공부방 같은 게 중학교에도 있어요. 돈을 조금 내면 지원금이랑 합쳐서 꾸린 교실 이었어요. 거기서 석식을 제공하는데, 학교 밖 식당으로 담당교사와 학생들이 다 같이 밥을 먹으러 가는 식이었어요. 그런데 어느 식당 주인아저씨가 제 친구를 붙잡고, ‘너 이름이 뭐냐?’며 명찰을 이리저리 뒤집어 보는 핑계로 가슴을 만진 거예요. 친구를 데리고 담당 선생님에게 가서 얘기를 했어요. 그런데 선생님이요, 피해자인 친구한테는 ‘아버지 같은 마음이라고 생각해라’라고, 저한테는 ‘네 일 아니니까 상관하지 말라’고 했어요. 성추행 당하고 우는 애한테. 너무 화가 났어요. 정말 난리를 쳐서 피해자 친구랑 또 그 제일 친한 친구, 그 두 명만 식당에 가는 대신 도시락을 따로 시켜주겠다고 했어요. 그것도 처음엔 도시락이었다가, 나중엔 편의점 음식 먹으라고 하고, 이런 식으로 석식 금액이 점점 줄었어요. 단체에 이야기해서 행동하는 것까지는 당사자가 힘들다고 말해서, 결국엔 별다른 해결을 못 봤어요.
Q . 이렇게 인권 운동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주변 사람들이 부담스러워 하는 경우도 있지 않나요?
A . 활동하는 것 자체는 다 받아들이는데, 사소하게 성차별적 단어를 쓰거나 여성혐오적인 말을 누군가 하면 전 그걸 그냥 넘어가진 못해요. 말은 해야 해요. 그러니까 ‘그렇게까지 할 필요 있냐’, ‘프로불편러다’, 라는 말 많이 들어요. 사소한 거지만 이런 게 쌓여서 차별적 사회를 만들잖아요. 그리고 내가 말하지 않으면 그 사람은 그런 언어를 딴 데 가서 또 다른 사람에게 또 사용 할 거예요. 나는 사소한 말 한마디에 상처받는 스타일이 아니지만, 누군가는 상처를 받겠죠. 성소수자에게 당연한 듯이 ‘남자 친구 있냐, 여자 친구 있냐’고 묻고 나면, 대답할 사람이 당하는 곤란을 생각해보세요.
내가 그걸 지적할 때마다 주변 사람들이 만류해요. 중학교 때도 친구들이 많이 말렸고요. 그런데 그랬던 친구들이, 자기들이 부당한 일을 당하면 나부터 찾아요. 내가 대신 말해주기를 바래요.
Q . 조금만 생각해보면 다 알 수 있는 일인데 말이죠. 그냥 애인 있냐고 물어보면 되잖아요.
A . 그렇죠. 중학교 때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을 발표하는 시간이 있었어요. 저는 ‘가족과 애인’이라고 말했어요. 그러니까 선생님이 그냥 남자친구라고 해야지 왜 애인이라고 하느냐, 그러는 거예요. 좀 어이가 없었어요. 왜 단정하는 거죠? 제가 그렇게 생활을 터놓고 지내는 편이 아닌데, 그때는 좀 똑 부러지게 말했어요. ‘내가 남자친구가 있을지, 여자 친구가 있을지 어떻게 알고 그런 말씀을 하세요?’라고요. 크게 혼 날 뻔 했죠(웃음).
Q . 뭐가 그런 편견을 가지게 한다고 생각하세요?
A . 우리나라의 전반적인 관습이, 직접 말을 하진 않으면서 눈치를 줘요. 소문은 퍼지는데 실체는 없는 식이죠. 그러니까 더 말을 꺼내기가 무거운 분위기죠. 진보적이라는 입장을 가진 사람들도 소수자에 대한 이해를 더 못하는 경우도 있고요. 활동가인 사람을 만날 때랑, 활동가가 아닌 사람을 만날 때랑 많이 달라요. 활동가들은 그런 부분을 많이 조심해요.
그리고 ‘청소년은 미성숙하다’라는 생각이요. 내가 만난 사람들 중에도 더러 말씀하시다가, ‘청소년은 아직 덜 미성숙하니까’라고 하세요. ‘나랑 지금 얘기하고 계신데, 제가 미성숙하다고 생각하고 계세요?’ 라고 물으면 생각을 다시 하세요.
Q . 앞으로의 계획은 어때요?
A . 단체에서 ‘창소년학생인권조례’에 대한 연대를 조직하고 있어요. 서울에서는 통과됐는데, 부산에서는 진보 교육감이 당선돼도 잘 안돼요. 올해 만들겠다고 했는데, 반대 단체들이 난리를 쳤어요. 반대는 할 수 있어요. 퀴어 퍼레이드에 나와서 부채춤 출수는 있어요. 하지만 소수자를 위한 법 제정에 관여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조례에서 청소년 성소수자를 차별하지 말라는 항목을 빼라는 얘기는 거의 모든 지역에서 다 나와요. 그 부분을 위해 연대체를 준비하고 있어요. 할 수 있는데 까지 해 봐야죠.
똑 부러지고 당찬 그녀. 나는 나의 고등학교 시절이 떠올라 괴로웠다. 90년대에 내가 다닌 고등학교는 체벌과 언어 폭행이 심한 곳이었다. 성추행도 왕왕 일어났다. 매일 각목으로 맞았고, 몇몇은 맞다가 손가락에 신경이 끊겼고, 여선생 하나는 언어 성폭력을 멈추지 않았다. 졸업과 동시에 나는 그 학교를 잊었다. 내 후배들도 똑같은 일을 당하리란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관여하고 싶지 않았다. 학교 욕만 부지런히 해댔다. 졸업하고 20년이 지나서야, 그 학교의 만행은 세상에 알려졌다. 재학생들이 교사의 폭행을 세상에 알린 것이다. 교사 둘이 직위해체 되고 법이 정한 처벌을 받았다. 내가 20년 침묵하는 동안 몇 천 명의 피해자가 더 생겼지만 나는 모른 척 했다. 그녀의 저항은 나처럼 몇 천 명의 피해자를 더 만들지 않기 위한 것이다. 비겁하지 않게 사는 법을 그녀는 알고 있다. 실천하는 방법도, 바로잡는 방법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모른다.
[김유리의 지구인 프로젝트]
「김유리의 지구인 프로젝트」는
부산문화재단의 문화다양성 확산을 위한 무지개다리 사업 일환으로 추진됩니다.
우리가 속칭 ‘소수자’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어쩌면, 인종이나 민족, 장애, 성별, 외모, 학력, 가족 구성, 지역, 사회적 신분 등
사회가 정한 틀에 의해 소수자로 분류된 건 아닐까요.
김유리의 지구인 프로젝트는 우리 모두 다 소수자라고 생각 합니다.
그래서 ‘부산에 살고 있으면서 사회적 편견을 경험한 40인의 지구인 에피소드’를 기록해
그동안 깨닫지 못했거나 무관심 했던 우리 안의 배타성에 대해 함께 이야기 해보려 합니다.
부디 40인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면서 마음에 작은 파도가 일렁이기를 소망해 봅니다.
_ 부산문화재단 × 김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