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는 하루
평소 나는 보통 늦어도 새벽 한 시쯤 잠들고 여덟 시 무렵 일어나는 편이다.
내가 잠들고 새벽 두 시 반, 새 대본이 넘어와 있었다.
문제는 그 대본을 아침 여덟 시에 확인했다는 거다.
아침에 확인한 메시지에서 새로 집필하신 대본 두 편과 함께 달려있던 추신 메시지는
오전 열 시, 늦어도 오전까지는 검수본을 확인하고 싶단 말씀이 적혀있었다.
지금은 아침 여덟 시 반. 와. 나 진짜 어떡하지?
메시지를 확인하자마자 눈앞이 아찔하다.
씻는 것도 사치다. 서둘러 작업실 책상에 앉아 작가님께 연락을 보낸다.
새벽 메시지는 확인하지 못했고, 지금 일어났고, 남은 시간 동안 최선을 다해 진행하여
검수가 되는대로 바로 관련 내용을 전달드리겠습니다.
나 오늘 엄마랑 브런치 하자고 꼬셨었는데…
작가님께 메시지를 보내곤 당장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미안한 마음으로 약속을 취소한다.
너무 간단히 취소된 약속에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곧장 대본을 확인한다.
보통은 여유 있게 재택으로 9-6 근무 생활을 진행하는데, 작가님께서 대본을 제작사에 넘기거나 배우에게 넘기실 땐 상황이 조금 달라져, 낮밤이 사라지곤 한다. 오늘도 급작스레 급박해진 상황이었다. 이렇게 보면 유연근무제의 적용이 다소 극단적인 이쪽 생활이다.
부디 내 능력치가 최상으로 실현되게 해 주소서.
맞춤법과 문장 부호, 띄어쓰기를 확인하고는 대본 상에 적힌 씬넘버와 지문, 대사를 꼼꼼히 확인한다.
보조사, 주격 조사, 목적격 조사는 내가 잘 넘기는 부분이니 이건 한 번씩 더 살피고,
글 구성이 편집됐을 경우엔 문장 목적어와 인물들이 올바르게 매칭되어 있는지 추가적으로 살핀다.
내가 보작으로 임하는 작품은 시대극이라 시대에 맞는 단어와 각주가 쓰였는지 상세히 살펴야 하고 마지막으로 새로 등장한 장소나 역사적 사건이 있다면 고증이 제대로 되었는지 확인한다. 이외에 기타 등등…
위 내용을 토대 삼아 대본을 검수를 진행하고, 검수 시 대본은 평균 5-6회 이상 정독하는 것 같다.
하지만 그래도 뒤늦게 보이는 이슈들이 있다. 나중에 검수를 진행한 뒤에 한 번씩 대본을 더 읽곤 하는데 그럴 때 발견하지 못했던 이슈 내용들이 나오면 정말 자책하게 된다….
보조작가가 된 지 2년, 곧 3년을 앞두고 있는데도 여전히 서툰 점들이 많다.
드라마는 보면 볼수록 더 어렵고, 내 대본은 줄거리 한 줄, 작품의도 쓰기가 더 지옥 같다.
할 땐 죽겠는데 또 하면 재미있어서 여전히 하고 있는 것 같다.
아무튼 그렇게 폭풍 같았던 오전 시간이 흐르니 열 두시 반.
작가님께 이후 일정을 전달받고, 특정 자료를 열렬히 신경 써서 준비해 달라는 요청과 함께 통화가 끝났다.
잠옷바람에 꼬질한 머리, 눈곱 바람, 기름진 얼굴로 앉아 겨우 쉬어보는 한숨.
아, 화장실 가서 거울 보기가 민망하다. 배도 고프고.
일이 막 끝나니 아침에 급하게 약속을 취소한 엄마에게 미안한 마음이 슬며시 고개를 내민다.
배가 고픈데. 엄마 밥 먹었나. 냉큼 엄마한테 전화를 걸어본다.
“엄마 뭐 해?” “나? 더 자고 일어났어.”
“밥은” “아직 안 먹었는데?”
“올… 씻었어?” “아니. 히히”
“ㅋㅋㅋㅋ역시. 엄마 씻고 나와. 밥 먹자.”
역시 엄마도 실은 이 쌀쌀해진 오전에 브런치 약속이 사알짝 귀찮았나 보다.
폭풍 같은 오전을 보내고 느지막이 엄마를 만나 천천히 밥을 먹고 양껏 수다를 떨며 커피를 마셨다.
아. 오전부터 보람차게 시간을 꽉꽉 채워 보내는 느낌이다.
몸이 붓는 게 걱정이니 너무 오래 앉아있지 말라는 엄마의 다정한 말을 들으며 집에 돌아와
다시 작업실에 앉는다. 오전에 대본 검수를 마치고 오후엔 작가님의 차기작 자료 조사를 빽빽하게 진행해야 했다. 대본 집필 일정이 확정된 것은 아니지만, 시작된다면 분명 빠듯한 일정일 테니 내가 선단에서 최대한 많은 일을 해둬야 그만큼 수월하게 흘러갈 것이다.
무수한 자료 속으로 다시 대항해를 갔다가 정신 차리니 저녁 여덟 시다.
간단히 닭가슴살을 녹여 양상추와 곁들여 샐러드 정식을 만들고 감 두 개도 깎아 곁들여 먹었다.
오늘 짝꿍은 저녁 약속이 있어 늦게 올 예정이지. 일이나 더 해야겠다, 싶었는데 아홉 시쯤 집으로 돌아오고 있단 메시지가 날아온다. 일찍 오네. 보고는 좀만 더 일 해야지 했는데 벌써 열 시.
하던 일을 멈추고 부랴부랴 오늘 하루를 생각해 본다.
Q. 오늘 하루는 어떻게 보냈나. 보람이 있었나.
A. 역시 그렇듯 잘 채워진 하루였다. 특히 근처에 있지만 자주 보진 못했던 엄마를 만나 가진 국수 한 그릇과 커피 한 잔은 가을 햇살과 어우러져 더할 나위 없이 풍요로웠다.
Q. 오늘 남은 일정은 어떻게 보낼 예정인지.
A. 오래간만에 전 직장 동료들을 만난 짝꿍이 집에 돌아와서 이야기보따리를 풀었다. (그들은 사내 CC로 결혼한 부부로 그녀 역시 그의 전 직장 동료들을 아주 잘 알고 있다). 아마 밀물 글쓰기를 업로드하면 짝꿍이 씻고 나올 때까지 스퍼트를 올려 업무를 좀 더 보다가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다가 하루를 마무리하지 않을까. 소확행으로 마무리하는 하루가 될 것 같다.
Q. 내일은 어떨 것 같은지
A. 내일도 오늘처럼. 아니 오늘 이상으로 바쁠지도 모르겠다. 내일은 밀물 글 쓰는 시간도 만들고 내 개인 극본 작업을 구상하는 시간도 좀 생겼으면 좋겠는데 모르겠다. 부지런히 또 보내봐야지.
이상. 이렇게 하루 마무리를 준비하는 재택러의 일상.
양껏 불타는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