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 100일만 곱씹기로 했다

이별한 김에 쓰는 글

이게 얼마 만에 이별인 건지

이별한 김에 감정들을 남겨볼까 한다

살면서 앞으로 내가 이성과 이별할 일이 또 생길 것 같진 않아서 어쩌면 이런 감정은 또 안 올 수도 있잖아

이런 바보 같은 모습도 내 인생이니까 기록해 봐야지



이별을 결심한 건 사실 뭐 그리 크지 않다

크게 싸우지도 않았고 엄청 잘못한 사람이 있어서도 아니다

불꽃이 튀게 싸우고 하룻밤새에 그 사람을 죽였다가 사랑했다가 뜬눈으로 지새우면서 혼자 헤어지고 만나고를 반복할 때는 이미 지났으니까

5년 넘게 만났으니 이제 서로 홀대할 때가 됐지 뭐


이별을 결심한 건 같이 있는데 외로웠다

더 이상 자기 얘길 하지 않고 하나마나한 회사얘기와 우리랑 상관없는 뉴스얘기들로 그 짧은 데이트시간을 애써 때우는 날이 많아졌다(출퇴근 같이 하는 게 데이트의 전부인 날이 많았다)


돈이 없다며 더 이상 주말에 데이트를 하지 않게 됐다

돈은 내가 내면 된다 해도 눈치가 보인다고 했다

그런데 또 평일 친구들 술약속은 간혹 잡는 것 같았다

나랑 퇴근할 때는 당장 집에 가야 할 사람처럼 서두르고 집에 도착하면 더 이상의 연락이 없었다

어느 순간 연인이라기보다는 카풀에 가까웠다

아마 그때부터였나 보다 같이 있는데 외로워지는 그 데자뷔를 느끼기 시작한 게


더 이상 우리의 일이 없었고 너의 일과 나의 일이 늘어났다

같이 있어야 사랑이라고 느끼는 뜨거운 나와

사랑은 그냥 서로의 존재만으로 힘이 되면 된다는 미지근한 그는 중간쯤에서 맞춰질 거라 믿었던 온도가 나는 더 이상 인화물이 없어 소화되고 그는 식어갔다

뭐 연애패턴이란 게 특별한 게 있나 다 그런 식인거지

내 연애라고 관식이 애순이 마냥 평생 지고지순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주호진 도라미처럼 매 순간이 에너제틱해야 하는 건 아니니까

사랑이 다 거기서 거기지 뭐


DAY 1


나는 헤어지잔 문장을 장황하게 보내고 어지간하면 "뭐래"라고 답해주던 그가 나에게 장문의 글들 안에 "넌 이기적이야 너밖에 몰라"라는 말을 날카롭고 신경질적으로 정성스럽게도 구석구석 때려 박아 답장을 보내왔다


답문으로 이기적이었던 내 행동을 미안하다 말하고

그래도 사랑할 때 너무 행복했어서 그때의 너와 지금의 너는 다른 사람인데 사랑만 해주던 널 놓지못하고 집착했노라 사과했다


네가 준 사랑이 고마웠고 행복했다고 그래서 변해가는 네가 불안했다고 그럴수록 더 다정하던 네가 소중해서 못 놓았었다고 다시 그때의 너로 돌아오지 않을까 널 다그쳤다고...


돌아보니 고마운 사람이었고 내가 이기적인 것도 맞아서 반박의 여지도 없고 해서 감사했다는 인사와 미안했다는 사과를 담아 답장을 보내고 그냥 그렇게 이별했다


아무렇지 않았다

그냥 좀 답답하고 그냥 카톡을 다시 읽고

이제 끝이라고 몇 번씩 날 정신이 바짝 나게 혼내고

그냥 숨이 좀 안 쉬어져서 1시간쯤 이어폰 볼륨을 최대로 높이고 추운 바람 가르면서 걸었다

몸이 힘들면 잡생각이 안 나겠지?


지금은 미움이나 원망보다는 고마움이 크다

아마 불안형인 나는 그 무언의 외로움의 시간에 미리 엄청 연습했던 덕인 것 같다


첫날은 견딜만하다. 아직은 그렇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봄냄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