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적인 생각 노트
1.
유아교육 교수인 엄마 밑에서 자란 영향이 큰 것인지, 원래 내 성향이 그런 것인지, 어릴 적부터 엄마가 되고 싶었다. 마음에 드는 남자사람이 영 없었던 한 때는 남편 없이 아이만이라도 낳고 싶다고 생각했다. 아기도 아이들도 딱히 안 좋아했지만, 아주 막연하게 여자로 태어나서 엄마가 되어볼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2.
너무 기뻤던 출산 소식 후에는 행여나 유산이 될까 조마조마한 16주가 있었고, 임신중기에는 임신한 것도 가끔 잊을 정도로 편안했다. 임신말기에는 매일낮과 밤으로 역류성 식도염과 커진 배 때문에 고단했고, 아기를 위한 물건, 병원비, 조리원비 등의 지출을 보니 아기를 원했던 막연했던 내 바람이 돈으로 환산하면 꽤 비싼 결정이었다는 것을 실감했다.
3.
그렇게 조금은 담백(?)해진 감정상태로 출산일을 맞이했고, 하루가 나왔다. 스스로를 생각했을 때 엄마라는 역할에 몰입하는데 시간이 좀 더 걸릴 줄 알았다. 그런데 첫 모자동실 시간에 아기를 보자마자 나도 몰랐지만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일처럼 아기에게 사랑에 빠졌고, 그렇게 엄마가 되었다. 나이 다 들어서 낳아서일까?
4.
아기를 낳은 후 내 사고구조는 완전히 재조립되었다. ‘갑자기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이 나에게 생겼는데, 이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연약하고 작은 사람이야’이라는 친구의 표현이 와닿았다. 이 약하디 약한 생명체를 잘 지켜내기 위해 짧은 시간 동안에 내가 아는 모든 지식과 아직 있지도 않은 경험을 총동원하다 보니 극도로 예민해졌다. 주변의 엄마나 남편과 같은 내 인생의 1촌 같았던 사람들조차 아기에게 해가 될 것 같으면 철저하게 2촌으로 밀려났다. 이렇게 짧은 시간 안에 이토록 크게 삶의 우선순위가 바뀌는 경험이 또 있을까.
5.
출산을 하고 나니 ‘아가씨’와 ‘아줌마’의 전환점이 출산에 있는 이유를 비로소 이해하게 된다. 출산은 전혀 아름답지 않았다. 덜 아팠다면 이 적나라한 경험을 의사와 간호사와 같은 타인 앞에서 하는 게 수치스러웠을텐데, 너무 큰 고통에 부끄러움 따위의 감정이 낄 자리는 없었다. 조리원에 가서는 내 방에서 모유수유할 때 직원들이 아무렇지 않게 들락날락하는 경험을 또 거치게 된다. 내 몸은 찬장의 관상용 그릇에서 학교 교실에서 쓰는 화분 받침대가 되어버렸고 (매우 실용적!) 주변의 거의 모든 나이든 여성들은 내 몸을 모유짜는 기계로 취급했다. 집에 돌아와서는 아기를 돌보면서는 기저귀를 갈아주고 코를 빼주는 등 또 처음 해보는 원초적인(?) 경험들을 하게 된다. 어색할 줄 알았던 첫 누드크로키 수업이 하나도 어색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냥 순리대로 자연스럽게 하게 된다. 아줌마가 되니, 아가씨 때 불편했던 주제들에 대해 얘기하는게 거리낌이 없어지고 생존능력은 강화된다. 하지만 현시점, 이 많은 변화들과 함께 딸려오는 부작용은 쓸데없이 아기의 똥과 관련된 에피소드들이 자꾸 늘어가고 부끄러움은 없어지고 사회성이 떨어진 상태로 이 얘길 주변에 나누려 한다는 것. 어떻게 하면 더 재밌게 전달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아무도 듣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아 그만뒀다.
6.
하루를 낳고 나니 독생자를 보내신 하나님과 십자가에서 죽어가는 자신의 아들을 지켜봐야 했던 마리아의 마음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됐다. 서툴지만 자신이 아는 최선의 방법으로 키운 아들이었을 텐데, 그의 아픔을 바라봐야 한다는 게 얼마나 큰 고통이었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