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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의 온기 Oct 24. 2024

시어머니가 온다.

시댁과 위아랫집으로 살기

“ 띵동띵동 띵동띵동 ”

“ 얘가 어디 갔나?”

  어머님이다. 아마도 반찬을 주러 오신 거겠지. 아들이 좋아하는 매콤한 김치찌개나, 너무 매워 딸국질 나오는 오징어볶음 그것도 아니면, 애들 먹으라고 달달한 고구마를 쪄오셨을지도 모른다. 조용히 숨을 죽인다. 굳이 숨을 필요는 없지만, 가끔은 그냥 혼자 있고 싶다. 얼마나 지났을까? 밖이 조용해졌다. 다시 3층으로 올라가셨나 싶어 빙긋 웃으며 기지개를 켠다. 애들도 남편도 다 보냈으니 환기나 시켜볼까? 하고 안방 창문을 열어본다. 

“ 어머, 너 집에 있었니? ” 

“ 어...어머님, 일찍 나오셨네요?” 우리는 갑작스레 인사를 나눈다. 

  우리집은 1층인데, 안방 창문 앞은 화단이다. 그러니까 나는 그저 우리집 창문을 연 거고, 어머님은 그저 자기 집 화단에 물을 주러 오신거다. 그리고 우리는 마주 보고 있다. 창문을 잡고 있는 손에서 열이 나는 것 같다. ‘아차 창문은 열지 말걸...’ 늦은 후회가 밀려온다. 선량한 어머님과 게으른 며느리의 어색한 만남이다.      



  결혼해서 애 키우고 살아본 분들이라면 한 번쯤 생각해 봤을 것이다. 시댁과 같이 살게 되면 어떨까? 생각도 하고 싶지 않다는 사람이 대부분이겠지만…  굉장히 현실적인 이유로  자처해서 시댁과 위아랫집으로 살아본 경험이 있다. 우선, 새로 분양받은 집이 완공될 때까지 시댁에서 산다. 그리고 지금 살고있는 집의 전세금을 새 집 분양금으로 밀어넣고 선납할인을 받는다. 나름 똑순이 새댁스러운 계획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내 발등을 내가 찍었지. ’ 싶지만.


  한 집에 같이 사는 건 상상도 못 하겠기에 위아랫집으로 살았었다. 첫째 낳고 들어가서 둘째 낳고 키우다 셋째 생기고서 나왔으니 약 6년 정도 살았나 보다. 처음엔 이렇게 오래 전업맘으로 시댁에 붙어살 생각은 없었다. 분양받은 집이 완공될 때까지라는 기간이 있었다. 하지만, 워킹맘이 될 예정이니 시댁 가까이에 쭉 사는 것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한 켠에 있었다. 그런데 연이어 임신이 되면서 복직은 자꾸자꾸 미뤄져만 갔다. 그리고 나와 시댁의 관계는 가까워진 거리만큼이나 멀어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한계에 다다랐을 때, 우리는 분양받은 집이 완공되어 아름다운 이별을 고하며 이사를 갔다.      


  시댁 가까이에 사는 동안 쭈욱 전업맘이었기에, 사생활 없이 불쑥불쑥 만나지는 만남이 부담스럽기도 했고, 잘해주시는 것도 불편하게 느껴질 때가 있었던 게 사실이다. 감정을 숨긴 채 살아야 했고, 남편과 사이가 안 좋을 때에도 시댁에 가서는 웃어야 했다. 그런데 무엇보다 가장 힘들었던 건 아이를 키우는데 있어 정해둔 규칙과 한계를 여지없이 허물어버릴 때였다. 식사 전 간식 금지, TV는 하루에 한 시간만, 엄마 허락 없이 사라지지 않기 등 사소한 듯 사소하지 않은 규칙으로 이루어진 엄마의 권위를 ‘이런게 있었나?’ 싶게 투명하게 만들어 버리곤 했다. 그리고 그 규칙을 지키지 않아 아이가 밥을 잘 안 먹거나, 말을 잘 듣지 않을 때는 잘못 키운 엄마탓이 되곤 했다. 워킹맘이었으면 좀 덜 힘들었을까? 삶의 목적이 아이들이었던 전업맘이었기에, 존재감이 흐려지는 날이면 더 많이 우울하고 힘들었다.      


  난 정말 힘들었는데, 애들 사정은 또 달랐나보다. 어떻게 한 이사인데, 이사온 지가 벌써 얼만데, 아이들은 할머니집을 그리워하며 가보자고 조르는게 아닌가. 당황스러움 그 자체였던 창문 앞 화단도 아이들에게는 그저 잊지 못할 추억거리였고. 하긴, 생각해보면 담을 넘어가 물총놀이를 하고 흙장난을 했던 날들을 잊을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모든게 허용되고, 모든게 자유롭던 시간. 내 집 드나들듯 현관 번호키가 닳도록 드나들던 아이들, 아이들에게 할머니집은 그저 따뜻한 놀이터였다. 맞다, 애들은 이 집 며느리가 아니지, 잊고 있던 사실이 떠올라 씨익 웃어본다. 

     

  근데 시댁살이가 나에게도 정말 그렇게 별로였나? 문득 생각해본다. 우리 어머님은 직설 화법의 대가이시라 며느리 입장에서 어려워서 그렇지, 인간적으로는 참 좋은 분이셨다. 어려운 사람 보면 도와줄 줄 알고, 아이와 강아지 그리고 꽃들을 참 좋아하셨다. 음식 솜씨도 좋으셔서 거의 매일 저녁을 시댁에 올라와서 먹으라며 맛난 반찬을 해서 우리를 부르셨다. 우리가 가지 못할 상황일 때는 반찬을 주러 오셨다. 아이를 낳고 키우는 일의 고단함을 알아서, 애는 내가 봐줄 테니 운동도 하고 친구도 만나고 오라며 며느리에게 자유시간을 주시기도 했다.  


  “영원한 것은 없다.”고 했던가. 영원할 것만 같던 시간도 공간도 사람도 결국에는 끝이 난다. 지금 시댁과 가까이 살기를 고민하고 있는 분이 있다면 경험자로서 말해주고 싶다. 시댁살이는 전업맘 며느리에게는 별로고, 애들에게는 좋다. 남편은 좋기도 하고 싫기도 할 거 같다(와이프에게 볶여서?). 워킹맘이라면 선택의 여지가 없이 시댁이 가까이 있으면 안심이 된다. 너무 겁먹지 말고, 너무 걱정하지 말고, 조금 가볍게, 조금 즐겁게 선택하고 담담하게 살기를 바란다. 끝으로 나에게 다시 한 번 시댁살이를 해보라면. ‘다음 생애에 살게 되면 안 될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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