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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소담유리 Apr 27. 2020

작가의 명함을 가지다.

육아 9년 차 경단녀의 꿈을 찾기 위한 도전!

9년의 육아, 집순이 주부, 어느덧 30대 후반 경단녀!


나는 30대 후반 4살, 9살 두 아들을 키우고 있는 엄마이자 9년 차 집순이 주부이다.

하루 종일 집안일과 두 아들의 육아로 늘 쉴 틈이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낸다.

매일 똑같은 일상이지만 할 일은 많고, 시간은 부족하며, 만년 만성 피로에 시달린다.

'두 아이 키우는 게 뭐 그리 힘드냐?'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나는 육아가 정말 힘들다.

남들보다 에너지가 2배나 더 넘치는 두 아들을 키우는 일은 쉽지 않다.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몸이 약한 엄마는 아이들을 이길 재간이 없다.

늘 뒤처져 있어 하루하루 지날수록 육아는 점점 더 힘들다.

그러다 보니 긴 육아의 시간 동안 육아 외에 다른 것들은 생각해보지 못했다.

나를 위한 시간도, 조금의 휴식도 없는 독박 육아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경단녀로 만들었다.

결혼과 두 아이의 출산, 집순이 주부로 육아에 지쳐 하루하루를 보낸 나는 10년의 경력단절로

할 수 있는 일도, 하고 싶은 일도 없었다.

참 슬픈 현실 속에 갇혀 살고 있었다.


육아 우울증, 수술 후유증 그리고 독박 육아!


첫째 아이 출산 후 6개월 만에 갑상선암 수술을 받았다.

출산으로 인한 몸의 변형과 암수술로 인한 수술 후유증으로 내 몸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임신과 출산으로 17kg이나 살이 쪘고, 수술 후유증으로 갑상선 호르몬 수치는 불안정했으며,

칼슘 수치는 현저히 낮았다. 약으로만은 채워지지 않았다.

손발이 저리거나 기력이 떨어지고, 미칠듯한 피곤함을 느끼기도 했다.

그런 상황에 신랑의 회사 이직으로 연고도 없는 곳으로 이사를 했고,

아이가 8개월이 될 무렵부터 혼자서 독박 육아를 해야만 했다.

초보 엄마였고, 생애 첫 수술로 수술 후유증이 있을 거란 생각조차 못 했다.

아이는 이쁘고 사랑스러웠다. 하지만 몸이 아픈 엄마에게 육아는 힘들기만 했다.

아이가 커가면서 엄마의 할 일은 점점 더 많아졌다.

의식주의 해결뿐만 아니라 같이 놀아주는 친구가 되어야 했고, 교육을 시키는 선생님이

되어야 했고, 아이의 사회성을 담당하는 매개체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가끔은 아이를 위한 놀이 기구가 되어 주기도 했다.

에너지가 넘치는 아이의 육아를 하다 보면 늘 체력전에서 밀렸다.

거기에 수술 후에 겪게 된 미칠듯한 피곤함은 심각한 문제였다.

독박 육아라 아이와 단둘이 생활을 하는데 엄마가 피곤함에 지쳐 쓰러지게 되니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그렇게 육아를 하는 내내 수술 후유증에 시달렸고, 몸이 많이 아팠다.

설상가상 아픈 몸으로 독박 육아를 하다 보니 도움을 요청할 곳도 없었고, 육아는 벅차기만 했다.

연고 없는 곳에서의 생활은 활동적이었던 내게 외로움까지 함께 가져다주었다.

그런 생활 속에서 나는 육아 우울증을 심하게 앓게 되었다.

독박 육아의 길은 참 멀고도 험난 했다.


8년 만의 외출... 그곳에서 찾은 꿈!


육아 우울증을 오랫동안 앓게 되면서 집에서의 은둔생활이 길어졌고, 무기력함은 점점 더 커졌다.

어느 순간 무기력함이 나의 생활 깊숙이 자리 잡아있어 나를 점점 더 집이라는 철창 없는 감옥에

가둬두고 있었다. 답답함 느꼈고. 무기력함에 억눌린 생활이 싫어 벗어나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무기력함에서 벗어나고자 책을 읽고, 강의를 열심히 들었다.

나와 비슷한 처지의 누군가의 경험담을 듣고, 공 한 많은 이들의 성공담을 읽었다.

변화와 성공을 거듭한 사람들의 강연은 직접 찾아가 듣는 열의도 보였다.

그러다 우연히 인터넷을 통해 눈에 띄는 강의 모집글을 보고 일일 특강을 신청하게 되었다.

육아 8년 만에 내 돈을 주며 강의를 들으러 가는 일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나는 강의를 듣는 내내 재미있고, 즐거웠다.

그동안의 내 생활에서는 느끼기 힘들었던 재미와 즐거움... 그리고 왠지 모를 설렘도 함께했다.

강의 중 강연자의 "당신도 할 수 있다."라는 말 한마디에 가슴이 뛰었다.

경단녀인 나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니 너무 좋았다.

그 강의는 다름 아닌 '누구나 책을 쓰는 작가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심어주는 강의였다.

" 작가! 나도 책을 쓰는 작가가 될 수 있어."

그렇게 강의를 통해 내 마음에 희망을 품게 되었고, 엄마로만 지내던 내게 작가라는 꿈이 생겼다.

" 나는 작가가 될 거야!"

나는 내 심장의 반응에 따라 작가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



꿈을 향해 내디딘 발걸음.


첫째 아이가 8살, 초등학교 1학년 때 아이는 농촌으로 유학을 갔다.

아이가 없는 시간 동안 여유가 조금 생겼고, 나도 활동을 해야겠다 생각하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선 작가가 되고자 여러 가지 시도를 했다.

글을 쓰기 위해 글을 쓰는 방법을 배웠고, 책 출간을 목표로 그것에 기반되는 부수적인 모든 것들을 강의를 들으며 습득했다.

글쓰기 프로젝트에 참가하며 거액을 쓰기도 했고, 퍼스널 브랜딩 코칭을 받기도 했다.

마케팅 공부도 했고, 블로그나 sns도 시작하며 크고 작은 강의들을 들으러 다녔다.

강의는 보통 서울에서 있었고, 내가 거주하는 안산에서는 적어도 1시간 30분 거리, 보통 이동 시간만 왕복 3시간 이상이 걸렸다. 3시간에서 4시간 남짓한 강의를 듣기 위해 하루의 모든 시간을 투자했다.

갑상선 암수술로 인해 늘 피곤함과 싸워야 했던 나는 그 여정이 무척 힘들었다.

하지만 꿈이 있고, 그 꿈을 향해 나아가는 배움 발걸음은 늘 가벼웠고, 신이 났다.

그렇게 나는 카페를 통해, 블로그를 통해 여러 가지 강의들을 찾아 듣게 되었고,

어설프지만 글을 쓰게 되었다. 막막하게만 느껴졌던 글쓰기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남들에 보기엔 그저 허황된 꿈이라 보일 진 모르겠지만 나는 그것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고,

내 꿈을 향해 한걸음 한걸음 어린아이 걸음마하듯 나아갔다.



엄마의 꿈... 작가!


엄마라는 이름으로 9년을 살았다. 육아 이외에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가 되어있었다.

20대에 내가 했던 사회생활도 무슨 일을 했는지 조차도 잊어버렸다.

아이는 훌쩍 커서 학교에 다니고, 할 줄 아는 것들도 많아졌는데 나는 점점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졌다.

사회생활을 하고 싶어도 아직 어린 두 아이는 걸림돌이었고, 육아로 인한 10년의 경력 단절은 이력서 조차 내밀 수 없게 만들었다.

두 아이의 엄마인 나는 할 수 있는 일도, 하고 싶은 일도 없었다.

그런 내게 '작가'라는 야무진 꿈이 생겼고, 책을 쓰기 시작했다.

나는 다름 아닌 9년의 육아 속에서 힘들었던 그 시간들을 글로 쓰기 시작한 것이다.

그동안 엄마여서 하지 못 한다 생각하며 보냈던 그 시간들이 엄마여서 할 수 있는 일로 다시 돌아 것이다.

당장 수입이 들어오는 건 아니다. 누가 알아봐 주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이, 그리고 작가가 될 수 있다는 기대감이 글을 쓰는 원동력이 되어 꾸준히 책 한 권의 분량을 만들어 가고 있다.

책을 쓰는 것은 시간이 많이 걸린다. 글을 쓰는 것이 힘들 때도 많다.

하지만, 작가라는 꿈이 있고, 엄마이지만 할 수 있는 일이 있어 너무 행복하다.

오늘도 꼭 작가가 되리라 굳게 다짐한다.


작가의 명함 첫 번째... 브런치!


몇 달간 열심히 글을 쓰고 또 썼다.

쓰고 수정하기를 반복하며 책 한 권의 분량을 만들기 위해 A4용지 기준 100장의 분량을 써내려 가고 있다.

책을 많이 읽는 사람도, 글을 많이 써 본 사람도 아니기에 책 한 권을 쓴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순간순간 막히거나 힘들어지면 잠시 쉬기도 한다.

책을 쓰면서 블로그와 인스타를 하며 나의 짧은 글들을 올려 보기도 했다.

간혹 나를 작가님이라 불러주는 사람들도 주위에 한두 명씩 생겨났다.

헌데.... 아직 책을 낸 것이 아니니 작가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 좋으면서도 내심 불편하기도 했다.

나는 진짜 작가는 아니었다. 그저 책을 쓰고 있을 뿐이지...

그러다 우연히 브런치를 알게 되었다.

브런치는 작가 심사 승인을 받아야 글을 발행할 수 있다고 했다. 좀 새로웠다.

블로그도 인스타도 그 어디에도 심사 없이 글을 쓸 수 있는데 작가 신청을 해야 한다니...

작가 신청이라는 단어를 보며 생각했다.

'여기서 통과한다면 나도 진짜 작가가 될 수 있는 거구나....'라고 말이다.

바로 실행에 옮겼다. 내가 쓰고자 하는 글의 방향성을 알렸고, 나라는 사람을 내세웠다.

걱정 반 기대 반으로 작가 신청을 했고, 하루 뒤 브런치 작가가 되었음을 알려주는 메일을 받았다.

너무 이른 합격소식이 얼떨떨했지만 기분이 좋았다.

" 나는 진짜 작가가 되었다. 브런치 작가!"

많은 사람들에게 축하를 받으며 브런치 작가에 입문을 했고, 나는 작가의 명함을 갖게 되었다.

나의 꿈을 향한 도전 그 첫 번째 작가의 명함은 바로 브런치를 통해서였고, 지금 나는 브런치 작가이다.

이젠 작가라고 불리는 것이 불편하지 않다. 작가라 불리는 것이 너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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