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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유리 Jan 07. 2019

“핑크 원피스를 남자 버전으로 입는 법, 없을까요?”

30대 초반 남성을 위한 패션 힐링 컨설팅  스토리


01. “여름에 티셔츠 두 장, 그게 다예요.”


한일 월드컵 열기가 뜨거웠던 해, 20대 초보 교사였던 나에게 즐겁게 ‘사회’를 배우던 소년 H가 있었다. H는 그때 썼던 내 석사 논문에 등장한 인터뷰이이기도 하다. 나는 논문에서 데이터로 쓰기 위해 학습에서 도전을 수용하는 학생들의 태도를 측정했는데, 최고의 리스크 테이커(risk taker)는 바로 H였다. 학교에서 화학 영재로 통하던 H는 몇 년 후 의대에 진학했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H는 나의 팬임을 자처하며 타 대학까지 원정 와서 내 어설픈 인류학 강의를 청강했다. 의대 수업이 너무 고등학교 수업 같아서 수업다운 수업을 듣고 싶었다나.


2016년. 30대의 H는 모 병원 외과 레지던트가 되었고, 난 곧 출간을 앞둔 작가이자 ‘패션 힐링 컨설팅’을 업으로 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여전히 H는 엉뚱했다. 그 바쁜 레지던트 생활 가운데에도 내 블로그에 자주 들어와 댓글을 남겼으니. 어느 날 나는 얼굴에 안 어울리는 가로로 긴 사각 안경을 쓴 녀석의 인스타그램 사진에 장난스럽게 댓글을 남겼다.


“넌 안경부터 바꿔야 한다.”

“어떤 걸로 바꿀까요, 선생님?”

“컨설팅 신청하면 알려줄게!”


물론 나는 기대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 며칠 후 그는 컨설팅 신청서 작성은 물론, 칼같이 입금까지 완료해 줬다. 바쁜 레지던트가 내 블로그에 오는 것도 모자라 컨설팅 신청까지 하다니. 며칠 후 나는 그를 만나 블로그 방문 이유부터 캐물었다.


“선생님 블로그 재밌어요.”


외과 레지던트인 그는 수술방 앞에서 대기하며 내 블로그를 본다는 것이다. 핫핑크 크록스 슬리퍼를 신은 ‘패알못’ 남자 외과 레지던트가 수술방 앞에서 스마트폰으로 패션 블로그를 들여다보는 상황이라니.


“뭐가 그렇게 재밌어? 내가 남자 옷 얘긴 거의 안 하잖아?”

“저한테는 아무래도 쌤이 하시는 거라 그렇구요. 다른 사람들 컨설팅 스토리를 쓰셨잖아요. 그걸 읽을 때 뭔가 미지의 영역에 대해 점점 알아가는 재미? 그게 큰 것 같아요. 그리고 패션 쪽 사람들 하는 말에 ‘비싼 게 좋은 거다’, ‘패션은 불편을 감수해야 하는 거다’, ‘요란한 아이템 그거 하나 있어야 좋다’ 뭐 이런 게 있잖아요. 그런데 선생님은 그런 거를 다 깨 주시니까. 재밌더라구요. 그래서 사람들이 경험했던 그 흥미로운 걸 ‘내가 하면 어떨까?’라는 호기심이 컸죠.”


역시나 최고의 도전 수용자답게 H는 호기심이 많다. 기존의 틀을 깨는 새로운 법칙을 알아가는 재미, 패션이라는 미지의 영역에서 베일이 벗겨지며 앎의 범위가 확장되는 재미. 그것이 우선적으로 밝혀진 그의 컨설팅 신청 동기였다. 이어서 자신의 의생활의 역사를 설명한다.


“제가 옷을 진짜 안 사요. 여름에 이거랑 다른 거 하나 그렇게 딱 티 두 장으로 버티거든요.”


7월이었던 그날 H가 입고 나온 면 티셔츠는 정말 낡아 있었다. 두께는 원래의 1/3 정도로 추정되었고 목 부분이 늘어나 있었다. 얘기 중 티셔츠에 음식이 튀자, 뭐 묻어도 전혀 아까워 보이지 않는 그 티셔츠를 참 신경 써서 닦는다.


“저 이거밖에 없다니까요. 어렸을 때, 제 옷은 반팔, 아니면 완전 두꺼운 거 그 두 종류밖에 없었어요. 왜냐면은 제가 추위를 안 타 가지고. 고등학교, 그리고 대학교 때 초반까지는 얇은 잠바류, 가디건 뭐 이런 게 하나도 없었어요. 저는 그때는 옷을 생활의 필요에 맞춰서 샀던 거죠. 그... 계절의 목적에 맞춰서 하는 1차적 목적 있잖아요. 저에겐 옷이 패션이 아닌 그... 체온 유지와 노출 최소화? 음하하하. 그 목적을 위해 옷을 입었고. 대학 들어가서 슬슬 옷이라는 것을 그런 목적 이외에도 입어볼까 했는데 엄마가 제 옷에 많이 개입을 했죠. 그렇게 사서 다른 거 안 사니까 그런 옷들을 오래 입었죠. 그러다 버리기도 하고. 버리는 옷들은 너무 오래 입어서 목 늘어나서 버리는 옷이죠. 하하하하. 오래 입어서 뜯어진 거 버리고.”

“싫증 나서 버리는 옷이 아니고?”

“그런 거요? 저는 없어요. 음하하하. 대학교 때까지만 해도 제 옷장은 ‘유리 옷장’이었어요. 친구들은 저 무슨 옷 있는지 다 아는 그런 거요. 맨날 입는 그 옷이 그 옷이니까. 제가 그 옷을 입으면 애들이 ‘아 이 계절이 왔구나’ 뭐 그런 거죠. 또 지금은 놀러 다닐 일이 없다 보니까 옷을 안 사게 되고. 그래서 병원 밖으로 나올 때마다 똑같은 옷이죠.”


이렇게 옷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 굳이 돈 들여서 이 컨설팅을 신청한 이유는 뭘까?


“나는 그래서 니가 이걸 굳이 왜 신청했는지 모르겠어.”

“그렇게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지만! 너무 재밌어요. 쌤 블로그. 흐흐흐흐.”

“신기하다. 패션에 관심 없는 니가 봤을 때도 재밌어?”

“그렇죠. 저는 진짜 관심 없거든요. 저는 사실 관심 없는 것도 없는 건데 약간 좀 어떤 거냐면 ‘그래 뭐 나도 한번 멋있게 차려입으면 좋을 것 같다.’ 했죠.”


아무리 옷에 무관심한 사람이라도 자기표현에 무관심하진 않은 법. 옷이 멋의 수단이기 이전에 자기표현의 수단이기에, H는 옷이라는 언어로 자기를 제대로 표현해 보고 싶었던 것이다.


“유니클로에 딱 갔는데, 스타워즈 티셔츠를 보면 ‘앗 저건 사야겠다!’ 해서 사요. 근데 저는 옷 하나를 자주 입으니까 금방 헤지죠. 스타워즈 티 세 장을 사서 두 장은 다 헤져서 잠옷으로 입구요. 그리고 이것도 이제... 거의 잠옷? 됐죠. 원래 이 티셔츠가 이렇게 얇지 않았어요. 되게 많이 빨아가지고 이렇게 됐어요.”


스타워즈 티셔츠는 H가 본능적으로 끌렸던 옷이다. 그러나 H는 그 외에는 자기를 표현할 다른 방법을 몰랐기에 석 장의 티셔츠를 돌려 입었고, 얼마 안 가 그것들이 낡아버리는 걸 경험해야 했다. 이어서 그는 엄마와 자신의 옷에 대한 견해 차이를 얘기한다.


“사실 저희 엄마는 항상 저에게 뭔가 주입시키는데, 제가 이런 티셔츠 입는 거 되게 싫어하세요. 엄마 말씀이 ‘너는 이제 나이가 들었고, 그런 거 입으면 초딩 같아 보인다. 너는 이제 니 얼굴 나이에 맞는 그런 옷을 입어야 한다’ 약간 그런 식으로 말씀하시죠. 그런데 저는 그냥 티셔츠가 편하죠. 또 워낙 안 입어 봤으니까 엄마가 좋아하는 옷을 내 옷걸이에 걸었을 때 어색함? 이런 것도 있고. 가끔씩 엄마가 되게 잇 아이템? 이런 걸 사 주세요. 예를 들면 버버리 트렌치코트. 엄마는 ‘이런 게 이쁘다, 너한테 어울린다’며 사주시죠.”


옷 못 입는 자녀를 향한 엄마들의 사랑은 종종 이런 식으로 표현된다. 상당수의 엄마들은 자녀가 있는 그대로의 자기를 존중하고 표현하도록 돕기보단 선물이란 이름과 ‘어울린다’는 듣기 좋은 말로 본인의 취향을 강요한다. H는 자기 정체성을 입기 위해 어찌 보면 큰 결심을 한 셈이다. 그의 두 번째 컨설팅 신청 동기는 바로 자기 정체성 입기. 스타워즈 티셔츠로만 표현되어 왔던 자기 정체성을 조금 더 다양한 옷으로 세련되게 표현하는 것이다.


“제가 그동안은 진짜 일만 하고 살았거든요. 일하고 공부하고, 일하고 공부하고 논문 쓰고. 컨설팅을 신청하게 된 건 이제 윗 연차라 시간도 좀 있고 ‘내 삶을 이제 즐겨야겠다’ 이것도 커요. 특히나 저는 패션에 대한 관심 여부 이런 걸 떠나서, 제가 쌤의 법칙을 배우고 패션 지능을 습득하면 재밌겠다 한 거죠. 그리고 또 선생님이니까! 더더욱 신뢰. 어차피 이게 단기간에 속성으로 지능이 확 향상되는 것도 아니고 배운 다음에 혼자 시행착오도 겪으면서 훈련해 나가면... 결국 좋아지겠죠. 흐흐흐흐 하하하하.”


노벨상 수상이 꿈이라는 자칭 천재 H는 영화 <아마데우스> 속 모차르트의 웃음소리를 들려주며 컨설팅에 임하는 각오를 밝혔다. 우선 4가지 스타일링 법칙을 배우며 앎의 즐거움을 경험함과 동시에 그 법칙을 자기 것으로 만들고, 시간이 걸리더라도 자기 힘으로 정체성을 표현하는 옷 입기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




02. ‘왜’를 사랑하는 외과의사


이제 그의 정체성을 파악할 차례. 물론 난 H를 안다. 그는 최고의 리스크 테이커, 탐구를 즐기는 사람이다. 그는 에니어그램 5번 탐구자형 인간임이 거의 확실하다. 그래도 그의 얘기를 들어보기로 했다.


“제가 왜 이렇게 도전을 즐기는 사람의 성향을 갖게 됐는지 생각해보니까 어떤 경험을 하건 그걸 실패나 불행으로 보진 않아요. 지금 돌이켜보면 저의 3수 과정도 실패가 아니었어요. 오히려 저는 그 시기를 거쳐서 도달한 지금의 이 지점, 지금 직업도 좋아요. 그래서 그런 어떤 리스크를 별로 거부하진 않아요.”

“어머님은 너가 이런저런 시도를 해보는 것에 대해서 응원을 해주셨니?

“그쵸. 그게 되게 큰 것 같아요. ‘엄마, 나 뭐 해.’ 말하면 ‘그래?’ 정도. 제가 뭔가 어떤 결정을 하는데 있어서 엄마가 한 번도 직접적인 개입을 한 적이 없어요. 항상 서포트였어요. 서포트. 대신에 저는 이제 그... 엄마가 직접적인 개입을 하지 않도록 고민도 하고 노력도 했죠. 저는 정면돌파 스타일이에요. 어릴 때부터 엄마랑 정말 많이 싸웠어요. 대립되는 어떤 쟁점이 생기면 그럴 때마다 피 터지게 싸웠어요. 내가 어떤 근거로 그렇게 생각하는지 말씀드리죠. 살아가는 방식이라든지 정치라든지 대인관계라든지. 엄마는 절대 제 의견에 동의 안 하시죠. 그래도 제가 아무 대책 없이 뭔가 하지 않는 것도 아시는 거죠. 그러니까 응원하시는 것 같아요. 저는 생각이 자유롭다 보니깐 그런 토론이 좋아요.”


어릴 때부터 부모의 강한 메시지에도 굴하지 않고 꿋꿋이 토론하며 자기 생각을 지켜왔다는 H의 자유로움, 그리고 그 이면의 자기애가 참 부럽다. 그것이 실패를 두려워하기보단 도전을 꺼리지 않고 눈앞의 탐구 대상을 흥미롭게 뜯어보는 사람으로 그를 성장시킨 듯하다. 뭐야, 내가 알던 것보다 멋진 녀석이었잖아?


그가 좋아하는 음악은 언젠가 연주하고 싶은 슈만의 피아노 협주곡과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2번 3악장이다. 그는 몇 해 전 연주회에서 쇼팽 발라드를 연주한 적이 있다. 그 외에도 자신이 좋아하는 노래 몇 곡을 알려주었는데 그중 이지형의 ‘산책’은 내가 아는 H를 음악으로 들려주는 것 같았다. 일렉트릭 기타와 드럼 그리고 베이스의 심플한 편곡. 아침 햇살 산책길에 좋아하는 여성을 뒤따라 걸어가는 설렘이 정말 싱그럽다. 결국 난 마지막 후렴구 “워오워 예에에”에 완전 전염되어 버렸다.


그가 화가 나는 순간은 언제일까. 자신의 머릿속에 어떤 작업 회로가 그려져 있는데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그걸 이해 못하고 귀찮게 자신의 시간을 낭비할 때란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일하다 보면 그들이 본인의 무지함을 인지하지 못하고 H에게 뭔가 반박할 때가 있는데 그럴 때마다 화가 나서 말이 없어진다고 했다. 자칭 천재답게 타인이 자신의 전문성을 방해하거나 무시할 때 화가 나는 것이다. 남들 눈에 약간 건방져 보이긴 해도 탐구자형 인간이라면 느낄 수 있는, 어찌 보면 당연한 분노 포인트 같다.


가장 좋아하는 영화는 <스타워즈 에피소드 3>. 상상력을 자극하는 영화라 최고로 꼽는다고. 좋아하는 문학 작품으로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 그리고 <몽테크리스토 백작>,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를 꼽는다. 감동보단 흥미로운 스토리에 끌린다.


H가 전공으로 외과를 선택한 이유가 궁금했다. H는 인과 관계를 따라가는 게 좋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우리 몸에 어떤 체계가 있고, 어떤 약을 어떤 기전에 의해서 처방할지 인과관계가 분명한 의학을 좋아한다. 남들은 괴로워하는 해부 시간이 특히 좋았던 건, 이론으로 배웠던 해부학적 구조를 실제로 자신이 파서 확인할 수 있어서였다. 외과는 수술을 하면서도 내과적 처방을 할 수 있어 매력적이었다. 또 외과는 수술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해부학적 구조에 대한 이해가 필요할 뿐 아니라 생리학적 이해도 복합적으로 필요한 분야라 재밌었다. 늘 자신이 학문적인 영역에서도 꿈꿔왔던 ‘왜’를 찾는 작업을 외과의사로서도 할 수 있어서 좋고, 결국 그 능력이 자신만의 큰 무기가 될 수 있을 거라고 밝힌다.


H는 학교 후배들 대상으로 그냥 하는 것 같아 보이던 내 컨설팅이 언제 이렇게 체계화되었는지 신기해한다. 그리고 이런 얘긴 남 앞에서 한 번도 이렇게 길게 해 본 적이 없는데, 상담 한번 하면 클라이언트와 내가 친해질 수밖에 없겠다는 말도 덧붙인다. 나는 그의 말에 문득 장난기가 발동했다.


“몰랐어? 너 나랑 지금 데이트하는 거잖아.”


화들짝 놀라는 H. 자긴 선생님인 나와 절대 그럴 수 없다며 말을 더듬는다. H는 탐구자형 인간이면서 (사회 규범에) 충실한 자이기도 한 걸까?


“됐어. 나도 너처럼 소심한 남자, 별로야.”




03. “가장 아름다운 건 우주의 무중력 상태가 아닐까요?”


며칠 후 내 메일로 H의 버킷리스트 숙제가 당도했다. 숙제를 받은 그 시각 이후로 난 H의 옷장 컨셉인 ‘별칭’을 찾으려 애썼다. 뭐라고 불러야 이 녀석의 옷이 그려질 것이며, H가 내 도움 없이도 자신의 옷장을 꾸려갈 수 있을까. ‘별칭’을 찾기 위해 H의 상담 내용도 들여다보고, 그의 ‘나만의 곡’도 듣고, 가장 화가 나던 순간도 떠올려 봤다. 우선 버킷리스트부터 훑어볼까. 일부를 공개하면 다음과 같다.


 히말라야 다시 오르기. 지금까지 여행을 많이 해보지 않았으나, 네팔의 안나푸르나는 내가 가봤던 곳 중에 가장 아름다운 곳이다. BaseCamp까지 힘든 등산이었지만, 다시 한번 그곳에 오르고 싶다.

아프리카 사파리. 동물들이 뛰어다니는 모습을 보고 싶다. National geographic이나 동물의 왕국을 즐겨보는 편은 아니지만, 죽기 전이라면 꼭 한번 보고 싶다.

우주여행. 우주에 가서 무중력을 느껴보고, 우주를 보고 싶다. 이보다 아름다운 것은 없지 않을까.

번지점프. TV에 나오는 엄청 높은 폭포 같은 데서 하는 번지점프를 해보고 싶다. 스릴과 재미가 대단할 것 같다.

유럽 음악여행. 내가 좋아하는 클래식 음악들을 유럽 각 국가별로 돌아다니면서 듣고 싶다.

미슐랭 3 스타 레스토랑 가서 밥 먹기. 유럽에 갔는데, 안 갈 수 없다. 무조건 가야 한다.


세상에나, 무중력 상태가 아름답다니. 그러고 보니 안나푸르나 등반이나 아프리카 사파리의 동물, 번지점프와 무중력 상태는 뭔가 일관성이 있다. 그가 동경하는 아름다움엔 뭐랄까 몸을 사리지 않는 고통을 감내하는 순간들이 필요하다. 슈만 피아노 협주곡 연주를 꿈꾸는 것도, 인체의 신비를 파헤치기 위해 해부 실습을 즐기던 것도 맥락이 같다. 이런 H의 미학을 반영하는 꼭 맞는 단어가 무엇일까? 그때 내 머릿속에 날아든 단어.


‘오로라’


오로라는 몸을 사리지 않는 극한의 추위를 견뎌야만 만날 수 있는 감탄과 경이를 자아내는 심미적 대상이다. 그리고 호기심 많은 그에게 즐거움을 선사할 과학적 탐구 대상이기도 하다. ‘오로라’는 아프리카 동물이든 무중력 상태든 번지 점프든 인체의 신비든 아름다운 순간을 만날 때까지 그 과정에서 오는 고통이나 불편함은 충분히 감수하겠다는 리스크 테이커인 H의 성향을 함축하는 단어이다.


그리고 그의 클래식 음악 여행이나 미슐랭 3 스타 레스토랑 탐방에선 스스로를 타인보다 높은 곳에 올려두길 바라는 살짝 거만한 자기애가 엿보인다. 제삼자의 눈엔 살짝 재수 없어 보일 수 있지만 외과의사로서 독보적인 위치에 오르길 원하고 노벨상 수상까지 꿈꾼다. 그는 미래에 ‘왕’이 되려고 수련 중이지만 아직은 ‘왕’이 아닌 ‘왕자’이다.


 ‘왕자’는 스스로 쌓은 성 안에서 성 밖의 무한한 세상을 동경하며 자유로운 상상을 한다. 그의 취향에는 싸구려와 최고급의 극단이 공존한다. 타인과 언제나 동등한 토론을 벌일 의향이 있으나 무지한 자의 무례함에는 침묵한다. 성 안에서는 자신의 상상을 현실화하려 한다. 과정이 힘들더라도 즐겁다. 그리고 그럴수록 성은 더 높아지고 견고해진다.


오로라 왕자


카톡으로 별칭을 알렸다. 물론 그는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내가 딱 예상했던 반응이다. 그러나 내게 설명을 듣고 얼마 후 그는 채팅창을 이렇게 장식해 주었다.


“헐, 대박!”

“완전 대박!”

“역시! 선생님은 천재십니다.”


자칭 천재는 남 칭찬할 때도 천재라고 한다. 고마워.




04. “쌤, 핑바는 안 돼요!”


드디어 다음 약속 날이 되었다. 쇼핑리스트를 작성하기에 앞서 ‘오로라 왕자’의 ‘왠지 끌리는 룩’을 체크하는 날이다. 그는 10개의 룩을 골라 왔다.



‘왕자’ 답게 포멀한 옷이 섞여 있긴 하지만, 전반적으로 ‘오로라’의 자유로운 분위기가 보인다. 겉옷을 오픈했을 때 삐딱하게 사선으로 떨어지는 느낌이나, 스웨이드나 데님 소재를 좋아하는 것에서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그의 정체성이 드러난다.


핑크 드레스가 포함된 ‘왠지 끌리는 룩’이 흥미롭다. 그건 내가 블로그에 포스팅한 적이 있는 콜라주였다. 그걸 보여주면서 하는 말.


이 핑크 원피스를 남자 버전으로 입는 법, 없을까요? 


핑크 드레스와 베이지 재킷을 자신이 입을 수는 없지만 색의 조화가 맘에 들었다고 밝힌다. 나는 핑크 드레스 룩을 남성 버전으로 어떻게 구현할 것인지 설명하기 시작했다.


“내 책 원고에서 ‘분리 효과’ 설명한 부분 봤지? 유채색과 유채색이 만날 때 서로 대비가 강하거나 서로 비슷해서 뭔가 모호할 때, 유채색 중간에 무채색을 끼우면 전체 배색이 조화로워져. 그게 ‘분리 효과’야. 그때 유채색 사이에 들어가는 무채색을 분리 색이라고 하는데 프랑스 국기 중간에 들어간 흰색이 분리 색이야. 프랑스 국기에서 흰색이 빠지면 블루랑 레드가 붙어서 너무 강렬해지겠지? 그래서 토털룩에 화이트가 들어가면 왠지 멋있어지는 거야. 자, 만약 겉옷+상의+바지를 입는 남성복 토털룩에서 흰색이 들어갈 수 있는 최적의 위치는 어딜까? 맞아. 티셔츠가 들어가는 상의 부분. 바지와 겉옷이 유채색일 때 티셔츠가 흰색이면 그 룩이 왠지 멋있어 보이거든. 그럼 핑크는 바지로 입을까, 겉옷으로 입을까? 핑크가 얼굴 근처로 오면 너무 튀니까 튀는 색은 가급적 얼굴에서 멀리 보내야 돼. 그게 ‘여백미의 법칙’이야. 그렇다면 핑크는 바지로 입어야겠지? 핑크 바지에 화이트 티셔츠, 그리고 베이지 아우터. 어때?”


흥미롭게 내 말을 듣던 그는 핑크 바지라는 말에 손사래를 친다.


쌤, 핑바는 안 돼요!


핑크 색이 들어간 룩을 입고 싶다는 욕망은 ‘오로라’ 같은데, 그놈의 사회 규범을 따르려는 충실한 자의 성향이 발목을 잡나 보다. 충분히 이해한다. 아무리 ‘오로라 왕자’라고 해도 핑크 바지를, 아니 핑바를 입은 의사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을 테니.


“지금까지 니가 본 관습 같은 건 버려. 스타일링 법칙이랑 니 정체성만 생각해. 이 코스는 법칙과 정체성만으로 옷 입기를 배우는 리스크 테이킹(risk taking) 과정이니까. 오케이?”


스마트폰은 다른 사람 시선 생각하지 않고 핑크색을 태연하게 사용 중이지만 핑크 바지 까지는 아직 무리인가 보다. 아직은 지금까지 봐왔던 것이 심적으로 더 편할 테니, 시간이 필요하겠지.


네 번째 ‘왠지 끌리는 룩’도 인상적이었다. 모자 달린 외투인데, 모자와 옷이 연결된 부분이 마치 숄칼라 같다. 어떤 이유에서 선택하게 됐는지 묻자 ‘왕자’ 군은 자신의 ‘스타워즈’ 사랑을 다시 강조했다. 그 룩은 ‘왕자’군이 좋아하는 캐릭터 ‘제다이’의 옷과 유사하다. 물론 정말 유사한 옷을 사서 유사하게 입을 수는 있다. 그러나 옷장에 거의 없는 기본 아이템도 사야 하는 상황에서 유사한 옷을 사게 되면 예산이 너무 늘어날 수 있다.


게다가 ‘오로라 왕자’라는 정체성과 외과의사라는 직업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지도 관건이다. 그렇다면 녀석의 ‘왠지 끌리는 룩’으로부터 패션 취향을 추상화하고 그것을 재해석해서 현실적으로 표현해 보는 스킬이 필요한 순간.


나는 그의 ‘왠지 끌리는 룩’에 슈트 룩이 있음을 먼저 확인했다. 그건 ‘오로라’ 보단 ‘왕자’의 정체성을 반영하는 룩이다. 그렇다면 ‘왕자’ 군은 기본 블레이저나 기본 코트를 기본 아이템으로 사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런 아이템은 왠지 포멀한 룩으로만 입어야 될 것 같지만, ‘반대의 법칙’을 적용하면 꼭 그런 것도 아니다. 포멀한 아우터에 후드 집업 스웻셔츠를 이너 탑으로 입고 비니를 쓴다면 마치 할리우드 스타가 운동 끝나고 귀가할 때 입을 것 같은, 왠지 모르게 쿨한 룩이 탄생할 것 같다. 블레이저나 코트 속 후드 집업을 반쯤 오픈한 채 입고 목 부분을 포멀한 아우터의 칼라에 잘 펴준다면 현실적인 ‘제다이 룩’이 가능하다.


한편 ‘오로라 왕자’에게 <다양한 분야에 도움이 되는 배색 사전>(2015, 구노 나오미)이라는 책에서 선호하는 배색 띠 두 가지를 선택해 달라고 부탁했다. 이 책에는 125가지의 배색이 소개되어 있다. 나는 컨설팅을 체계화하며 초기 컨설팅 때와는 달리 좋아하는 배색을 직접 고객이 선택해 주실 것을 부탁한다.


여기서 핵심은 피부 톤에 어울리는 색보단 좋아하는 색을 입는 것이다. 이 관점은 이미지 컨설팅의 관점이 아니라 컬러 테라피의 관점이다. 이 컨설팅은 객관적으로 어울려 보인다고 진단받은 컬러를 입고 외적으로만 스타일리시해지도록 돕는 과정이 아니라, 나를 행복하게 해 줄 옷, 그리고 색상을 스스로 선택해서 입음으로써 내면의 힐링을 경험하도록 돕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색’이 아니라 ‘배색’을 선택하는 것. ‘배색’을 선택할 때 좋은 점은 이런 거다. 배색을 정하고 그 범위 내에서 옷장 속 옷의 색을 제한하면, 옷장 속의 옷 몇 가지를 꺼내어 매치했을 때 토털룩의 배색이 조화롭게 마무리될 확률이 커진다. 반면 한 가지 색상이 예뻐 보여서 구매하면, 소장하고 있는 다른 색상의 옷과 어떻게 매치해야 할지 결정하기 난감할 때가 많다. ‘왕자’ 군이 고른 배색은 다음과 같다.



참 신기하게도 ‘왕자’ 군의 ‘나만의 곡’인 이지형의 ‘산책’의 무드가 그대로 좋아하는 색상에 반영되어 있다. 역시.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 





05. ‘오로라 왕자’ 입기


이젠 내가 그의 ‘왠지 끌리는 룩’에 좀 더 ‘오로라 왕자’ 다운 컬러를 입혀 콜라주 형태의 쇼핑리스트를 작성할 차례. 콜라주를 작성하기 위해 항상 물어보는 것은 상의와 하의 중 어디를 슬림핏으로 입을 것인가이다. 디테일 센 옷 하나가 주는 효과보다 심플한 옷을 입고 상하의 핏의 대비만 제대로 줘도 ‘반대의 법칙’ 때문에 스타일리시해 보이는, 토털룩의 효과가 크기 때문이다. 틈틈이 내게 스타일링 법칙을 전수받은 그는 슬림핏 팬츠와 살짝 오버핏의 상의로 자신을 표현해 보겠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에겐 안경이 시급했다. 긴 얼굴에 가로로 긴, 사각의 모범생 안경. 365일 입는 패션 아이템인 안경만 바꿔도 녀석의 얼굴이 한결 살아날 것 같다. 얼굴형이 길고 피부가 깨끗하니 동그란 해리포터 안경을 쓰는 게 어떨까? 그는 절대 안 된다며 방어한다. 그럼 한 발 물러나야지. 동그란 안경 대신 ‘오로라’의 정체성을 반영하여 레오파드 무늬이면서 ‘왕자’를 반영하여 사각의 스마트해 보이는 안경을 권해 보기로 했다.


‘왕자’ 군의 손사래에 아랑곳하지 않고 나는 핑크바지 룩을 만들어 보았다. 여름 룩으로 핑크 치노 팬츠에 화이트 티셔츠로 기본 세트를 만들고, 에어컨 바람이 너무 추울 땐 베이지 셔츠를 아우터로 걸치도록 하거나 가을이 오면 베이지 맥코트를 걸치는 게 어떨까 했다. 그의 배색을 부분적으로나마 완성시켜주려면 연두색이나 노란색 아이템이 필요한데, 핑크 바지를 산다면 연두나 노랑은 옷이 아닌 상대적으로 저렴한 양말로 선택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4켤레에 만 원 정도니 얼마나 합리적인지.


그리고 그가 병원에서 뛰어다니기에 딱이라 포기하지 못하겠다는 S브랜드의 그레이 슬립온을 대체하기 위한 신발로 뭐가 있을까 생각해 보다가 콜한(Colehaan)에서 옥스퍼드화의 디자인을 차용한 스니커즈인 ‘제로 그랜드(Zerogrand)’를 찾아냈다. 옥스퍼드화의 디자인 때문에 ‘왕자’ 같고, 신발의 전반적인 소재는 그가 ‘왠지 끌리는 룩’을 고를 때 끌린다고 말했던 스웨이드라 좋았다. 그런데 밑창이 특이하게도 빨강인 점이 포인트. 그 빨강 밑창이 ‘난 그냥 왕자가 아니라 오로라 왕자거든!’이라고 외치는 것 같다.


또 그의 배색을 고려하여 핑크 바지에 화이트 티셔츠를 이너로 입고, 하늘색 셔츠를 입는 룩도 만들어 보았다. 백팩만 멘다는 그를 위해 가방은 파스텔톤 색상에 두루두루 잘 어울리는 그레이와 베이지 중간의 스톤 색 가방을 골라 보기로 했다. 화이트 진에 하늘색 셔츠만 매치한 룩도 만들어 봤는데 역시나 빨강 밑창 스니커즈가 화룡점정이다.


‘오로라’의 정체성에 걸맞게 데님 소재를 좋아하는 그를 위해 그가 골라놓은 데님 셔츠 룩을 살펴봤다. 그의 배색을 고려하여 진청 셔츠에 블랙 팬츠보단 연청 셔츠에 화이트 팬츠 룩이 어떨까 하고 룩을 만들어 보았다. 굿!


그리고 ‘제다이 룩’을 현실적인 룩으로 구현하기 위해 블레이저와 후드 집업, 스타워즈 티셔츠를 조합해 보기로 했다. ‘제다이 룩’의 경우 자칫 가벼워만 보일 수 있어 배색은 차분히 다크 네이비 청바지와 그레이 블레이저, 그레이 후드 집업으로 선택했다. 여기서 스타워즈 티셔츠와 후드 집업 대신 이너 탑을 깔끔한 화이트 셔츠로만 갈아입으면 외과의사인 그의 직업에 어긋나는 드레스코드는 피할 수 있다.




06. ‘오로라 왕자’의 머스트 해브 아이템


이제 본격적으로 쇼핑할 차례. 우리는 먼저 모 백화점에서 만나기로 했다. 약속 장소에 나타난 그는 그 근처 고등학교 출신답지 않게 무릎 나온 치노 팬츠에 잔뜩 땀에 전 피케셔츠, 그리고 흰 양말에 S사의 다크 그레이 슬립온 차림이었다. 아 정말. 매력적인 ‘오로라 왕자’ 정체성에 맞는 스타일 변신이 시급해!


우리는 먼저 신발을 신어보기로 했다. 나는 매장에 도착하기에 앞서 그에게 빨강 밑창 스니커즈에 대해서 설명했다. 다행히 특유의 호기심을 표현한다. 신발을 신어본 그는 신발이 정말 맘에 든 모양이다. ‘오로라 왕자’에게 딱인 신발이라며. 게다가 착용감이 훌륭해서 병원에서 뛰어다니기에도 좋을 것 같다고 소감을 밝힌다. 더 저렴한 온라인에서 사기 위해 사이즈 체크만 하고 다음 목적지인 안경이 있는 젠틀몬스터 쇼룸으로 향했다.



젠틀몬스터 쇼룸에 가면 상상력을 자극하는 인테리어와 함께 실험적인 선글라스들을 볼 수 있다. ‘오로라 왕자’는 물 만난 고기처럼 온갖 안경을 쓰며 호기심을 발산한다. 쇼핑이라기 보단 전시 관람객이 된 듯한 분위기. 그러다 동그란 안경을 써 보았다. 역시. 빨강 밑창 스니커즈는 얼굴에서 먼 발에 착용하는 아이템이라 별 부담 없이 도전을 수용했던 ‘왕자’ 군이 안경에선 방어적이다. 그의 머릿속에는 ‘동그란 안경을 쓴 의사는 없다’가 지배적인가 보다. 그래도 나는 ‘왕자’ 군의 동그란 안경 착샷을 찍어 두었다.


내가 점찍어둔 대로 이번에는 호피무늬이면서 테 부분이 살짝 각이 진 ‘던’이라는 사각 뿔테 모델을 착용해 보자고 했다. 얼굴이 길어서 동그란 테든 사각의 뿔테든 다 잘 어울린다. 약간 낯설긴 해도 범상치 않은 뿔테 안경이 ‘오로라 왕자’ 같다며 맘에 드는 눈치다. ‘마법의 안경’이라는 애칭으로 부르니까지. 오케이, 그걸로 결정!


나머지 옷을 사기 위해 한 쇼핑몰로 이동했다. 가장 먼저 간 옷은 유니클로. 콜라주의 화이트 팬츠 + 하늘색 셔츠 룩을 반바지 버전으로 입어보기로 했다.  



유니클로의 흰 반바지와 하늘색 긴팔 셔츠를 착용해 보았다. 그런데 흰 반바지의 핏이 아쉬웠다. 우리는 하의를 슬림핏으로 상의를 살짝 오버핏으로 스타일링하기로 했는데, 반바지 핏이 헐렁하다 보니 살짝 오버핏으로 선택한 긴팔 셔츠와 함께 입었을 때 뭔가 이상했다. 일단 사진만 찍고 패스.



그리고 뭐니 뭐니 해도 유니클로에서 빼놓을 수 없는 아이템이 바로 핑크 바지. 출시된 지 꽤 된 모델이라 재고가 없으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히 ‘왕자’ 군의 사이즈가 남아 있었다. 입어 보더니 내 예상대로 자기 모습을 거울에 신기한 듯 비춰보며 싫지 않은 분위기다.


헐, 대박! 헐! 선생님, 핑바가 생각보다 괜찮은데요!


내친김에 배색이나 보자며 핑크바지에 화이트 티셔츠, 그리고 베이지색 점퍼를 매치해 보았다. 핑크 드레스 룩이 그렇게 남자 버전으로 구현된다는 게 내내 신기한가 보다. 우리는 피팅룸에서 화기애애하게 이런저런 시도를 해 보았다.



베이지색 점퍼가 다소 작업복 같아서 아쉬운데, 우리는 추후에 콜라주에 넣었던 베이지색 맥코트를 찾아보기로 했다. 유니클로에서 몇 가지 기본 아이템을 고른 후 잊지 않고 형형색색의 양말도 장바구니에 담았다.


그동안 살짝 디자인이 아쉬운 S사의 다크 그레이 슬립온에 흰 양말만 신고 다녔던 ‘왕자’ 군에게 그런 양말 쇼핑은 흥미로운 도전이었다. 그는 연신 즐거워한다. 내가 찍어준 사진으로 토털룩을 점검하던 ‘왕자’군이 뭔가 깨달은 듯하는 말.


“선생님이 콜라주에서 그... 콜한 빨강 밑창 스니커즈 말고 화이트 스니커즈도 넣어 주셨잖아요. 그런데 저는 빨강 밑창 그것만 사고 화이트 스니커즈는 안 사려고 했거든요. 신발은 제가 이거 하나만 신기 때문에 하나 사면 충분할 거라 생각해서요. 그런데 사진 보니까 제가 지금 신고 있는 이 S 브랜드 실내화가 엄청 거슬리네요. 그리고 이렇게 색깔을 알록달록하게 입으면 아까 그 스니커즈를 못 신을 때도 있을 것 같아요. 역시 선생님이 화이트 스니커즈를 넣어주신 이유가 있네요.”


드디어 이놈이 토털룩에서 각각의 아이템이 이루는 조화에 눈을 뜨고 있다. 역시 책에서 이론을 배워도 몸으로 체험해 봐야 제대로 학습이 되는 법. 화이트 스니커즈는 사실 모든 남성의 신발장에 있어야 된다고 생각할 정도로 나는 화이트 슈즈가 기본 아이템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파스텔톤 의상으로 입었을 때 검정 같은 어두운 색 신발은 토털룩을 해친다. 내친김에 우리는 화이트 스니커즈를 구경하기로 했다. 몇 가지 브랜드의 스니커즈를 신어본 결과 아디다스 스탠 스미스 중 뒤꿈치에 하늘색 디테일이 살짝 들어간 것으로 선택했다.


망고로 건너가선 앞서 유니클로에서 핏이 아쉬웠던 반바지를 대체할 아이템을 찾아냈다. 라이트 그레이의 반바지가 조금 더 슬림핏이라 살짝 오버핏의 하늘색 셔츠와 핏이 조화로웠다.



그렇게 우리는 몇 가지 아이템을 더 산 후 가을이나 겨울에 만나 ‘오로라 왕자’ 룩을 완성하기로 했다. 그는 틈틈이 내게 온라인 쇼핑으로 산 콜라주 속 아이템이 도착할 때마다 착용 사진을 찍어서 보내주었다. 그는 평생 셀카를 찍은 적이 없었지만, 컨설팅 이후로 자기 모습이 너무 마음에 들어 자꾸 사진을 찍게 된다고 한다. 하루는 그는 핑크 바지를 입고 빨강 밑창 스니커즈를 신은 사진을 보내왔다.



사진이 도착한 후 바로 아래의 메시지는 이런 것이었다.


“으하하하하하하하하핳”


핑크 바지와 신발을 함께 신으니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단다. 그는 그 이후에도 병원 기숙사에서 자신의 토털룩을 자랑하는 사진을 종종 보내왔다. 핑크 바지가 너무 좋아 그것만 내내 입게 되어 병원에선 이미 ‘핑크 바지 선생님’으로 통한다는 말과 함께. 처음엔 자신의 정체성을 입는 게 어색할 수 있지만 사회적으로 학습된 틀을 벗고 자기 정체성을 입는 즐거움을 맛보게 되면 그걸 맘껏 누리게 된다. 핑크 바지를 정말 사랑하는 것 같다고 말하자 그는 이런 말을 한다.


저에겐 ‘나만의 머스트 해브 아이템’이었더라구요, 핑크바지가!



전문가들은 머스트 해브 아이템을 10개 또는 15개로 정해놓고 권하지만, 나는 그에 동의하지 않는다. 사람마다 머스트 해브 아이템은 다르다. 유사한 기본 아이템을 사야 할 수는 있지만 좋아하는 컬러도 다르고 정체성도 다른 사람들에게 꼭 사야 할 아이템은 다를 수밖에 없다. ‘조용한 말괄량이’인 내 머스트 해브 아이템이 A라인 미니스커트이듯 ‘오로라 왕자’의 머스트 해브 아이템은 핑크 바지이다.


어느 날은 혼자 백화점에서 쇼핑을 하다 ‘클럽 모나코’에서 ‘왕자’에게 딱 맞는 맥코트를 발견했다며, 사이즈는 무엇으로 할지 조언을 구한다. 사진을 보니 혼자서도 어쩜 그렇게 괜찮은 걸 발견했는지. 역시 본바탕이 똘똘하니 배운 만큼 일취월장한다. 그런데 그가 내게 한 가지 고백을 한다.


“선생님, 저번에 젠틀 몬스터에서 산 그 뿔테 안경이요. 무거워서 수술할 때 자꾸 흘러내려요. 가벼운 걸로 다시 찾아봐야겠어요.”

“그니까 애초에 내가 해리포터 안경으로 사야 된다고 했지? 그건 가벼울 걸? 처음부터 동그란 안경 말했었는데 그땐 니가 니 정체성에 적응을 좀 덜했던 것 같다. 이젠 동그란 안경 쓸 마음의 준비는 됐지?”

“네압!”


무릎 나온 바지에 닳아빠진 티셔츠를 입던 그는 이제 만날 때마다 나의 감탄과 칭찬을 받는다. 남들이 뭐라고 할까 봐,  통계적으로 자신의 직업이나 자신의 나이대의 사람들이 입지 않는 것이어서 내 정체성에 맞는 옷을 배제하는 건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이 아니다.


물론 개인의 라이프스타일을 고려하여 취향을 적정선에서 타협하는 과정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나 스스로의 욕망에 솔직해지는 것. 그것만큼 자기를 사랑하는 방법도 없다. 내가 컨설팅에서 하는 가장 주된 작업은  "You deserve it." 이 말을 옷으로 해주는 것이다.



오로라 왕자, you deserve 핑바!











최유리 작가의 목소리로 패션힐링컨설팅 스토리를 만나보세요!



오로라 왕자의 컨설팅, 3년 후 쇼핑 영상!



최유리 작가와 함께하는 '패션힐링클래스' 와  '패션힐링컨설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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