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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유리 May 12. 2017

“스타일링의 로직을 알고 싶었어요”

 30대 IT업계 남성 패션컨설팅  스토리


#1 “화성 땅을 밟아 보고 싶어요.”


블로그와 학교 게시판에 스타일링 컨설팅을 시작한다는 글을 올리고 나는 한꺼번에 많은 글을 읽어야 했다. 조절의 필요를 느꼈고, 나는 블로그에 내 스케줄이 꽉차서 더 이상 곤란하다는 글을 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은 신청자들이 사연을 올렸는데 ▽▽군은 그 중의 하나이다.


안녕하세요 저는 ▽▽▽입니다. 나이는 30살이며 남자입니다. 현재 학교 선배들과 같이 IT벤처를 해오고 있습니다. 회사 일을 주로 B2B로 진행하고 있기 때문에, 벤처 대표 혹은 공무원 분들을 많이 뵙고 있습니다. 대부분 저보다 나이 많은 분들이지요. 일주일에 3~4번의 미팅이 있으며, 이외의 시간에는 사무실에서 관리업무를 합니다.

제가 즐겨 입는 옷은 대부분 흰색, 회색, 검정색이며 검정색을 가장 좋아합니다. 피부톤이 검어서 검은 곳을 특히 선호하는 것 같습니다. 상의로는 티 혹은 셔츠, 하의로는 면바지 혹은 청바지를 입고 있습니다. 심플하고 편하게 입는 것을 선호합니다.

키는 177cm, 몸무게는 73kg입니다. 최근 운동을 하면서 일부로 찌웠는데 술을 좋아해서 뱃살이 약간 나왔습니다. 체형은 전형적은 약간 마른 남자 체형인 것 같습니다.

저의 옷을 사는 패턴을 보면,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옷이 있으면 선호하는 브랜드 유니클로 같은데 가서 즉흥적으로 구매하는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특별히 옷에 대해서 많은 관심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다만 몇 번 입어보고 저랑 잘 어울리는 옷을 구매하는 방식으로 저를 표현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제 좀 더 체계적으로 어떤 색상이, 어떤 옷의 형태가 저한테 더 잘 어울리는지 체계적으로 알고 싶습니다. 혹시나 추후에 시간이 되시면 연락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_^

▽▽군의 연락처를 저장하고 나서 페이스북에 접속했는데, ‘알 수도 있는 사람’으로 ▽▽군이 추천되었다. 본의 아니게 미리 얼굴을 확인하게 되었다. 쌍꺼풀 있는 눈, 약간의 장난기가 보이는 미소년 같았다.


그를 만나기 하루 전 그의 ‘나만의 곡’을 물어봤다. 토이의 ‘그럴 때마다’, ‘여전히 아름다운지’를 좋아하는데 부르는 곡으로는 윤종신의 ‘동네 한 바퀴’도 좋아한단다. 이건 뭔가. 남자가 대놓고(?) 감성적이다. 물론 내가 이런 성 고정관념에 갇힌 말을 하면 안 되지만. 어쨌든 이런 감성을 갖고 있다니 또 궁금하다.


드디어 그를 만나는 날. 압구정동의 한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그는 청바지, 검정 이너 탑, 가죽 재킷을 입고 앉아있었다. 그의 얼굴에서 내가 본 페이스북의 미소년을 찾기 힘들었다. 그냥 어엿한 청년의 모습이다.




어떤 이유로 운동을 했고 몸을 키웠는지 궁금해졌다. 그는 게임 캐릭터의 마른 몸이 건장하게 변하는 모습, 레알 마드리드의 축구 선수 호날두의 모습에 자극을 받아 운동도 하고 영양 보충제도 먹으며 몸을 키웠다.


어떤 계기로 컨설팅을 신청하게 되었는지 궁금했다. 그는 평소 한 인터넷 카페에서 패션 트렌드에 대한 정보도 얻고, 가격 대비 품질 좋은, 소위 가성비 좋은 아이템에 대한 정보를 얻곤 했었다. 그러던 차에 컨설팅을 시작한다는 나의 글을 읽고 자신의 패션 지식을 업그레이드 시켜보고 싶은 생각, 특히 (공대 출신 답게) 패션에 대한 체계적인 지식, 로직을 알고 싶었다고 밝힌다.


컨설팅 신청자들을 만날 때마다 나는 ‘XX라이프(필자의 모교 게시판 이름)는 끊을 수 없어요.’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XX라이프’가 어떤 공간인지 개인적으로 연구 주제로 삼아야 할 만큼 흥미로운 공간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에게 ‘XX라이프’는 어떤 공간인지 질문했다. 그는 거의 자기 전에 한 번은 들어가서 본다. 내 글을 발견했을 때는 심적으로 외로운 상태였다. 자신이 외롭다고 느낄 때 ‘XX라이프’에 더 들어가게 된다고 했다. 그렇다면, 외로울 때 하필이면 왜 ‘XX라이프’에 들어가는지 궁금했다. 그는 사람들이 짬날 때 웹툰을 찾아보는 심정과 유사하다고 대답한다.


그럼 웹툰과 ‘XX라이프’ 간 컨텐트의 차이가 있는지 묻자, 웹툰은 단순 흥미 위주의 내용이 많아서 흘리게 되지만, ‘XX라이프’에는 재밌는 글뿐만 아니라 삶에 대한 통찰력을 주는 인상적인 글들이 많단다.


한편, 그는 늘 예술을 동경해왔다. 이런 저런 음악 동아리에 가입해서 활동하기도 했지만, 몸이 따라주지 않아서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그만 두었다. 동아리 한 곳에서는 그나마 오래 활동할 수 있었는데 나오게 된 이유는 병역 문제 때문이었다며, 거기선 아주 못했던 건 아니라고 멋적게 얘기한다.


영화는 어떤 장르를 좋아하는지 궁금했다. 그는 전쟁 영화만 빼면 어떤 장르의 영화든 다 즐겁게 볼 수 있는데 특히 SF 장르를 좋아한다. 상상이 현실로 이루어지는 것을 매력으로 꼽는다.


컨설팅이 어떻게 진행될지 궁금해 할 ▽▽군을 위해 간단히 커리큘럼(?) 안내를 했다. 처음에는 옷 얘길 하지 않고,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구체적으로 하게 된다고 알려줬다. ▽▽군에게 다음 시간까지 자신의 별칭을 정해 오는 것을 숙제로 내주었다.


별칭을 정하는 것은 어렵다. 그래서 내가 함께 내주는 숙제는 3개월 안에 죽는다고 생각하고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한 버킷리스트 작성이다. 그 버킷리스트 속에 ▽▽군 자신의 정체성이 있고, 그로부터 별칭을 도출할 수 있을 거라고 안내했다.


고개를 갸우뚱하는 ▽▽군. 3개월 안에 죽는다는 상황에 대한 몰입이 쉽지 않아 보였다. 다른 신청자들에게는 그런 얘길 하지 않았지만, ▽▽군에게 나는 특별히, 만약 몰입이 쉽지가 않다면, 영화 <버킷리스트>를 볼 것을 강력 추천했다.


영화 <버킷리스트>의 줄거리를 짤막하게 소개하면 이렇다. 2인 1실인 병실 짝꿍으로 만난 사이인 시한부 삶을 선고받은 두 할배. 둘은 치료를 포기하는 대신 죽기 전에 꼭 해봐야 할 일, 즉 버킷리스트를 작성해 보기로 한다. 그리고 병실을 나와 리스트에 포함된 일들을 함께 해보기로 한다.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때 내가 그 영화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점은 버킷리스트에는 어떤 의무나 상황 때문에 포기했던 자기 자신이 있더라는 것이다. 사람이 죽음의 순간이 오면, 이전에 자신이 붙들고 있던 체면, 겉치레, 업적 등은 벗게 되고, 사랑이나 우정 같은 내면의 문제로 돌아오게 된다. 거기에 자기 자신이 가장 중시하는 내면의 가치가 존재하는 법.


3개월 안에 죽는다는 생각까지는 해보지 않았지만, ▽▽군은 그 무렵 본 영화 <마션>을 매우 감동적으로 봤다며 하는 말. “화성 땅을 밟아 보고 싶어요.” 내가 컨설팅 과정에서 들은 말 중 가장 신기한 말이었다. 난 지구 밖을 벗어나는 건 상상도 하기 싫다.


왜 그런 생각을 했냐고 묻자,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는 것이 좋다고. 패러글라이딩과 번지점프는 도전해봤고, 패러글라이딩이 생각보다 시시해서 스카이다이빙도 기회가 되면 도전해보고 싶단다. 도전을 좋아하느냐고 물어보자, 도전해서 성취하는 걸 좋아한단다.


그에게 ‘인생의 행복 = 성취’이다. 그러고 보니 도전하겠다고 한 것이 높은 곳에서 내려다볼 수 있는 것들이다. 성취감이란 게 위에 도달해서 내려다볼 때 느끼는 감정과 비슷한 건지도 모르겠다.


한 번 어떤 지점을 찍어 보는 것과 찍어 보지 않는 것의 차이는 그 지점에 도달해본 사람만이 아는 것인데, ▽▽군에게는 그런 지점에 도달해 보는 것이 중요하다.


▽▽군에게 행복에는 두 가지 종류가 존재한다. 짧고 깊은 행복과 길고 잔잔한 행복. 성취는 짧고 깊은 행복이지만, 길고 잔잔한 행복도 자신에게는 중요한데, 그 길고 잔잔한 행복이 자신에겐 결혼과 가정생활이라는 얘기도 한다.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싶다고.


어릴 시절 기억 속에 가장 남는 어떤 장면에 대해서 물어봤다. 물론 자신이 직접 본 건 아니지만 아버지께서 너무나도 작은 갓난아기 같은 ▽▽군을 안고 계시는 사진이 있다며. ▽▽군 자신이 그렇게 작았다는 점도 낯설지만, 아버지께서 그렇게 자신을 안고 계시는 장면도 낯설었나보다. 누나가 많은 ▽▽군의 가정에는 아직도 아기자기한 이벤트가 잦다.


왜 대학 진학 때 공학을 선택했냐고 묻자, 고등학교 때 게임을 좋아했는데 게임 안에서 자신 만의 세계를 만들어가는 느낌이 좋았다고 했다. 그런 메커니즘을 좀 더 체계적으로 공부하고 싶어서 공학을 선택했다고.   


나는 그에게 ‘별칭’과 ‘왠지 끌리는 룩’ 숙제를 내줬고, 일주일 후에 만나기로 했다. 그는 성실한 학생마냥 나의 숙제를 반겼다. 나는 버스 정류장에서 그와 헤어지며 “안녕!”이라며 손을 흔들자 그는 나의 ‘말괄량이’다운 격 없는 인사에 매우 당혹스러워 했다. 그의 모습으로부터 그가 ‘성취자형 인간(에니어그램 3번)’일까 아니면 ‘권위자형 인간(에니어그램 8번)’일까 궁금했다.



#2 “뭔가 저질러놓고 나서 늘 걱정하죠.”


일주일 후 두 번 째 만남. 비오는 토요일이었다. 그날은 내가 많이 늦었는데, 늦는다는 전화를 하자, 자기도 이미 늦었다며 비 오는데 차 막히니 조심해서 오시라고 나를 안심시킨다.


드디어 캠퍼스 어느 까페에서 ▽▽군을 만났다. 그는 랩탑 스크린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뭔가 하고 있었다. 나를 보자, 그 동안의 바쁜 생활 때문에 살이 빠진 것 같다는 말부터 건넨다.


나는 그의 성향이 궁금해서 에니어그램 질문지를 풀어보라고 했다. 그가 ‘성취자형 인간’인지 ‘권위자형 인간’인지 질문지의 테스트 결과를 참고하고 싶어서였다. ▽▽군은 테스트 결과 두 성향이 유사한 정도로 나타났다. 사실 그런 테스트지는 어디까지나 참고사항일 뿐이다. 스스로가 조심스럽게 자신의 성향을 탐구해본 후 찾아가는 게 내가 아는 에니어그램이라는 성격유형 모형이기 때문이다.


나는 양자를 구분 짓는 가장 핵심적인 질문을 던졌다. 성취의 출발점이 어디에 존재하는지 물었다. 성취지향성은 ‘성취자형’이나 ‘권위자형’이 공통적으로 가진 성향인데, 나는 ▽▽군의 성취동기가 내부에 존재하는 경우, 즉 나 스스로가 그것이 좋아서인 경우는 ‘성취자형’에 근접하고, 타인의 인정과 존경 같이 외부에 존재하는 경우에는 ‘권위자형’에 근접하다고 판단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의 대답은 ‘내부에 존재한다’는 것이었지만, 이후로도 나는 계속 질문을 던졌다. 그에게 성취지향적인 경향은 언제부터 발생한 것 같은지.


‘겁쟁이’군은 원래는 친구들과 함께 어울려 노는 것이 좋았던 학생이다. 우연히 고등학교 때 반에서 1등을 했던 것을 시작으로, 재수 끝에 우리학교 입학을 한 것이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단다. 몇 번의 짜릿한 성취를 맛보고 나니 그게 마약 같아서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나.



그러면 대학 입학 후 가장 좋았던 것은 무엇이었는지 질문했다. 그는 곰곰이 생각해보더니, 환경이 좋았단다. 면학 분위기, 친구들. 특히 졸업하고 보니 자신의 동기들이 다 특별한 사람들이었던 점을 떠올리며, 학창시절을 그 특별한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었다는 점이 좋았다고 답했다.


그는 지난 번 숙제, 자신의 별칭을 정해왔다.

대범한 겁쟁이


자신은 늘 뭔가 저질러놓고 나중에 걱정한다고 밝힌다.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어떤 결정이 있었는지 물었다.

아무래도 벤처 합류이다. 그 전에, 대기업에서 인턴도 해보고 중소기업에서 병역특례로 일을 하면서 그는 어차피 ‘남의 회사에서 돈은 벌 수 있지만, 내가 하고 싶은 일은 결코 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자기 사업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던 때에 제안이 와서 받아들인 것이다. 그는 맹랑했었다고 자평한다.


내가 보기에 화성 땅을 밟아보고 싶다는 생각도 참 대범하다. 내가 그 얘길 꺼내자, 그는 웃으며 (슬슬 겁이 난 듯) 화성 코스는 너무 비싸서 안 되겠고, 최근에 성층권 관광 코스가 개발되었다는 얘길 하며 눈을 빛낸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웬만한 풍경은 다 감상할 수 있을 것 같다며. ‘대범한 겁쟁이’ 맞다.


그런데 그가 아무리 (마치 성층권 관광 영업을 하듯) 그 코스의 매력을 풀어놓아도, 겁 많은 내게 성층권 코스가 그다지 매력적이진 않았다. 그런 맥락에서 보니, 그는 ‘겁쟁이’가 아니다. 어디까지나 ‘대범한’ 자기 기준에서 겁이 많은 것 뿐, 그는 용감하다.


이 맥락을 고려해 보니 흥미로운 점이 있었다. 다른 신청자들의 경우 앞의 형용사를 빼고, ‘꼰대’, ‘빙구’, ‘얌체’라고 불러도 크게 무리가 없는데, ‘대범한 겁쟁이’군의 경우 형용사를 빼고 ‘겁쟁이’군이라고 부르기에 너무 용감하다.


내가 그에게 ‘겁쟁이’군 보다는 ‘겁 많은 대범’군이 더 맞을 것 같다고 하자, 자신의 별칭에는 자신의 의사결정에서 발생하는 전후 관계가 내포되어 있다고 밝혔다. 먼저 저지르고 나서 나중에 겁을 먹는 경우가 발생하기 때문에.


‘대범한 겁쟁이’군은 심사숙고해서 아무 일도 행하지 않는 것보다는 졸속으로라도 뭔가 행동으로 저질러 보는 것이 더 낫다는 글을 어디선가 봤는데 자신은 전적으로 그에 동의한다고 밝혔다.


나도 그의 말에 동의하며, 그 동안 겁만 먹고 아무 것도 행하지 않았던 내 삶이 너무도 불만스러워서, 결국 돌고 돌아 이렇게 ‘대범한 겁쟁이’군을 만나고 있다고 말하며 웃었다. 그가 스스로의 별칭에 부여한 의미를 존중하여 나는 그를 ‘대범한 겁쟁이’군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그는 내가 추천했던 영화 <버킷리스트>도 봤다. 사실 첫 번째 만남에서 ‘대범한 겁쟁이’군에게 영화를 보라고 강력추천을 하긴 했지만, 내가 예상한 시나리오는 ‘보려고 했지만 시간이 도저히 안 나서 볼 수가 없었어요.’였다. 그러나 그는 영화를 봤고, 심지어 주위 친구들에게 강력추천하기도 했다.


어떤 점에서 그 영화가 그렇게 좋았냐고 묻자, 항상 영화를 볼 때는 관찰자의 시선에서 영화를 보게 되는데, 그 영화의 경우 스스로 계속 질문을 던지며 영화를 보게 되더란다.


내가 저 상황에 처하면, 어떤 일을 하고 있을 것인가?

그런 질문을 던지는 것 자체가 자신에게는 매우 의미가 있었다고 내게 고마움을 표한다.


한편 그는 영화를 본 감상을 전하며 ‘대범한 겁쟁이’다운 이야기를 한다. 영화 <버킷리스트>에서 두 노인이 멋진 풍경을 감상하며 저녁식사를 했던 레스토랑에 꼭 가보고 싶었다나. 찾아보니 그곳은  이탈리아의 ‘포지타노’이다. 그는 나에게 영화 속 풍경과 똑 같은 ‘포지타노’의 풍경 사진까지 보여주며 말했다. “여긴 꼭 가봐야 겠네요.”


버킷 리스트 얘기를 마무리하고 그의 ‘왠지 끌리는 룩’을 볼 차례다. 화려하다. ‘젠틀한 얌체’군과는 또 다른 화려함이 있다. 포멀한 룩 보다는 뭔가 자유로운데, 돋보이고 싶어 하는 욕망이 존재한다는 인상이다. 사진을 보고 내가 그에게 화려한 룩을 좋아하는 것 같다고 하자 ‘겁쟁이’군은 자신이 화려한 걸 좋아한다고 느낀 적은 없었단다. 사람은 다 자기가 표준이고 평범한 줄 안다.


‘대범한 겁쟁이’군의 왠지 끌리는 룩 중에서 내가 가장 강한 인상을 받은 사진은 청 반바지에 화이트 셔츠, 화이트 스니커즈, 선글라스, 시계와 팔찌를 착용한 룩이다. 그와 함께 사진을 보며 멋지다는 감탄사를 연발하다 나도 모르게 내뱉은 말, “이대로 입고 포지타노에 여행가면 되겠네!”


봄-여름 버전의 포지타노 룩. 같은 색상 톤의 반바지, 재킷 없이 소매 걷은 화이트 셔츠만 입는다면 여름 룩이 완성된다.


나는 그가 ‘성취자형 인간’이면서 ‘예술가형’의 날개를 가진 사람(3w4)이 아닐까 잠정적으로 결론을 내렸다.




#3 “스타일링의 법칙(Theory), 저를 업그레이드할 수 있겠군요”


‘왠지 끌리는 룩’을 점검하고 나서 트레이닝의 시간을 가졌다.


우선 ‘반대의 법칙’, ‘빼기의 법칙과 더하기의 법칙’에 대해 설명해줬다. ‘대범한 겁쟁이’군은 그 날 자신이 멋지다고 평소에 생각해 왔던 룩을 많이 가져왔었는데, 그가 가져온 많은 사진을 보며 그 룩이 왜 스타일리시한지, 왜 어색한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예컨대 그가 가져온 ‘왠지 끌리는 룩’의 두 번째 룩의 경우, ‘빼기의 법칙’을 적용해서 검은 털실 디테일이 가미된 항공 점퍼를 선택하기 보다는 아무 디테일이 없는 항공 점퍼를 선택하는 편이 좋다. 대신 ‘더하기의 법칙’을 적용해서 신발을 조금 더 화려한 걸 신는다거나, 머플러를 화려한 걸 둘러주면 원래 분위기와 비슷한 분위기를 낼 수 있으면서도 항공 점퍼는 항공 점퍼대로 활용도를 높일 수 있다.


마지막 사진의 룩(우린 이 룩을 ‘포지타노 룩’이라고 부르기로 했다)의 경우에도 옷만보면 별 특별한 디테일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빼기의 법칙). 대신 사진 속 남자의 경우 시계, 팔찌, 썬글라스를 착용해서 화려함을 더했고(더하기의 법칙), 화이트 셔츠와 화이트 스니커즈를 신어 통일감을 주었고(색상 조화의 법칙), 셔츠 단추를 풀고 소매를 멋지게 걷어 올려 보는 이로 하여금 ‘말 걸고 싶다’는 느낌을 더했다(여백미의 법칙).


나의 얘길 듣던 ‘대범한 겁쟁이’군은 굉장히 좋아한다. 자신이 종종 들어가 보았던 네이버 모 카페에 올라오는 멋쟁이들의 데일리룩을 볼 때는 스타일리시함에 대한 자신의 지식이 단지 현상(fact) 수준에 머물러 있었단다. 그런데 그날 개별 팩트를 포괄하는 법칙(Theory)을 내게 배우고 나니, 특히나 공대생인 자신에게는 패션에 대한 로직(logic) 같은 체계적 구조가 만들어지는 느낌이라 좋단다.


그러고 보니 ‘겁쟁이’군은 처음에 컨설팅 신청 사연을 남길 때에도 패션에 대한 체계적 접근을 배우고 싶다고 밝힌 적이 있다. 성취자형 인간이자 공대 출신 답게 어떤 체계가 존재하는 게 편안하고, 그것이 자신을 다음 버전(?)으로 업그레이드할 수 있다는 생각을 했으려니 짐작해 보았다. 시간이 다 되어 다음 시간에 트레이닝을 이어 나가기로 했다.


일주일이 지나고, 그와 약속한 날이 되었다. 나는 퇴근 시간 9호선에서 빈대떡이 될 듯 껴 있다가 ‘대범한 겁쟁이’군과의 약속 장소인 고속터미널에서 내렸다. 나도 지친 상태였지만, ‘대범한 겁쟁이’군의 표정이 그다지 밝지 않다. 그날 안 좋은 일이 있었단다.


어떤 일이 있었는지 물어봤다. 자신의 실수로 중요한 기회를 놓치게 된 걸 그날 낮에 확인했단다. 나는 그 일에 대한 ‘겁쟁이’군의 대응 방식이 궁금했다. 그는 일단 기분이 안 좋아서 술을 마셨고, 자신이 확인하지 않았던 부분을 처음으로 찾아보게 되었다.


‘겁쟁이’군은 자신의 잘못을 빨리 인정하고 그 부분을 보완하여 발전시켜나가는 점을 자신의 장점으로 꼽았다. 내가 그의 이야기를 들어준 덕분인지 어느 정도는 기분이 풀린 눈치다.


그날 ‘겁쟁이’군은 내가 주중에 그에게 구입할 것을 권했던 유니클로의 흰 면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그는 내 추천에 따라 흰 티셔츠를 구입해서 입었지만, 처음 입어보는 아이템에 확신이 서지 않는지 내게 의견을 구했다. “이 옷이 저에게 어울린다고 생각하세요?”


나는 지난시간에 그에게 ‘여백미의 법칙’을 알려주지 않은 상태였다. 나는 흰 면 티셔츠를 배경으로 입은 이런 저런 룩을 보여주며, 흰 면 티는 항공 점퍼나 가죽점퍼, 그리고 카디건 같이 가벼운 아우터를 빛내주는 여백의 역할을 하기도 하고, 스웨터와 겹쳐 입으면 쿨해 보이는 역할을 해주는 꼭 필요한 기본 아이템이라고 알려줬다. 그의 표정이 밝아졌다.


우리는 트레이닝을 이어 나갔다. 내가 ‘색상 조화의 법칙’을 설명해 주면서 애매모호한 색상은 박쥐같아서 여기저기 잘 어울리기 때문에 기본 아이템을 애매모호한 색상으로 선택할 경우 매우 활용도가 높다는 얘길 해주었다.


마침 그 애매모호한 색상의 예로 내가 그날 신고 있었던 카키도 아니고 회색도 아닌 애매모호한 색상의 웨지힐 스니커즈를 보여주자, 반응이 즉각적이다. 애매모호한 색상의 바지를 입은 멋쟁이 중년 신사의 사진을 보여주자, ‘겁쟁이’군은 곧바로 “저 그런 색 바지 하나 사야겠네요.”


그날 나는 그의 그런 반응으로부터 평소 패션에 대한 관심 수준이 높음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는 평소 자신이 즐겨 찾는 네이버 카페에서 접하는 데일리룩으로부터 늘 ‘이건 괜찮은데. 왜 괜찮지?’ 풀리지 않던 수수께끼 같은 부분들이 있었는데 그런 의문이 풀렸다며 즐거워하는 눈치였다.


시간적 여유만 있다면, 더 많은 시간을 패션에 할애하고 싶을 만큼 패션은 항상 자신에게 중요한 어느 한 부분이라고 밝힌다.


‘스키어301’군이나 ‘우아한 4차원’님과 같은 ‘탐구자형’의 분석적인 사람들이라 내가 가르쳐준 지식 자체는 매우 빠르게 이해했지만, 막상 자기 스스로를 그 지식의 적용 대상으로 삼는 것에 대해서는, 특히 지식이 새로운 것일 경우, 꽤나 오랜 시간 동안 버티고 고집을 부렸었다.


그러나 ‘대범한 겁쟁이’군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내가 알려준 새로운 지식을 곧바로 스스로에게 적용하기를 원했다. 나에게 배운 논리적인(그는 ‘logical한’ 이란 표현을 썼다) 법칙(theory)들로 자신의 패션을 업그레이드시키길 원했나보다.


그러고 보니 그는 뭔가를 배우고 잘하고 싶다는 말을 자주했다. 내가 SNS 채팅 도중 ‘문법 도사’라는 말을 하자 문법 도사임을 부러워하기도 하고, 나에게 글쓰기 또한 배우고 싶다는 얘기도 했다.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것이 그는 늘 즐겁다. 딱 ‘성취자형 인간’답다.


그와 비슷한 맥락으로, 그는 자신이 갖지 못한 면에 대해 종종 언급했다. 성실함을 제외하면 자기에겐 내세울 수 있는 게 없다고 얘기하기도 하고, 자신에게 세심한 면이 부족하다는 점도 이야기하는가 하면, 자신이 아주 지적인 사람은 아니라는 점도 말한다. 자신을 성장시키고 싶다는 욕망 때문에, 누가 뭐라고 하지 않더라도 자연스럽게 자신이 가진 능력이 무엇인지 자꾸 점검하게 되지 않았나 싶다.


그렇다고 자존감이 낮은 모습이나 열등감이 보이진 않는다. 다만 자신을 좀 더 성장시키고 싶은 마음이 큰 것 같다. 언젠가 ▽▽군은 이상형을 언급하며 자신에게 부족한 점을 보완해줄 여성을 만나고 싶다는 얘기도 했었다. 자신을 업그레이드하고 싶다는 생각에서 컨설팅을 신청한 것과 이상형에 대한 접근 방식이 어딘가 유사하다.


‘대범한 겁쟁이’군과 트레이닝의 시간을 마칠 때가 되자, 또 숙제를 챙긴다. 원래는 머스트 해브 아이템을 함께 구상해 보지만, 그에게는 숙제로 다음 시간의 쇼핑을 위해 본인에게 필요한 머스트 해브 아이템을 작성해보라고 했다.


이렇게 숙제를 챙기는 모습이 재밌다고 하자, ‘겁쟁이’군 스스로가 여러 상황에서 가르치는 입장이 되어 보니 학생들이 열심히 배워서 배운 걸 잘 적용하는 모습을 볼 때 가장 뿌듯하더라는 말을 했다. 무료 컨설팅의 혜택을 받는 자신의 입장에서 내게 ‘해드릴 수 있는 게 없다 보니’ 배운 걸 적용하는 모습이라도 보여야겠다는 생각을 밝힌다.


‘성취자형 인간’들은 자신이 TPO에 어긋나는 퍼포먼스를 행하는 것을 꺼린다. ‘겁쟁이’군은 나를 만나는 동안에는 늘 배운다는 입장, 받는다는 자신의 입장을 고려했고, 그 상황에서 자신에게 가장 적합하다고 판단되는 행동을 취했던 것이다.


헤어지며 그가 묻는다. “제가 뭐라고 불러드리는 것이 좋을까요?” 그는 내게 맞는 호칭을 찾느라 고심한 눈치다. 나는 웃으며 답했다.


편한 대로요. 컨설팅의 취지는 자기 자신에게 맞는 스타일을 찾는 것이라, 호칭도 각자 편한 대로 부르라고 해요. 호칭에 그 사람의 성향도 드러나거든요. 다른 사람들이 나를 부르는 호칭에는 선배님도 있고, 언니도 있고, 선생님도 있고, 유리씨도 있어요. 어떤 호칭이 편해요?


그가 내내 고민하던 결과는 의외였다.


그럼 전 누나로 할게요. 누나, 오늘 고마웠어요!

  

#4 화려함을 빛내줄 기본을 입기


일주일 후, 저녁 시간에 여의도의 쇼핑몰에서 ‘대범한 겁쟁이’군을 만났다. ‘겁쟁이’군은 자신에게 필요한 아이템으로 아이보리 스웨터, 셀비지 데님, 애매모호한 색상의 치노 팬츠, 갈색 스니커즈를 꼽았다.

나는 그를 만나기 전 그의 옷장 속 자주 입는 아이템을 찍은 사진을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나만의 머스트 해브 아이템 컬렉팅’에 따라 옷장에 무엇이 있는지(A), 그리고 어떤 룩을 염두에 둘 것인지(Y)를 생각해둬야 무엇을 살지(X)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댄디한 룩을 원한다고 했다. ‘스키어301’군도 댄디한 룩을 좋아한다고는 밝혔었다. 그러나 내가 그때까지 파악한 ‘겁쟁이’군은 전형적인 모범생 룩을 원하는 ‘301’군보다 조금 더 유연하고, 조금 더 화려한 느낌을 원한다.


그의 옷장 속 외투는 코트가 주류를 이루었다. 코트를 좀 더 멋지게 입기 위한 아이템을 찾기로 했다. 사실 특별한 것이 없다. 디테일 없는 백지 같은 아이템을 갖추는 것이 가장 기본.


컨설팅을 위한 쇼핑에서 내가 늘 그래왔듯이 그 날도 내 머릿속엔 한 가지가 더 있었다. 나는 ‘대범한 겁쟁이’군의 정체성을 대변할 아이템이 어딘가에서 튀어나올 것 같다는 기대감을 갖고 쇼핑몰 여기저기를 다녔다.


‘빼기의 법칙’에서 내가 늘 강조했었지만, 옷에 해당하는 기본 아이템일수록 디테일은 뺀 것이 필요하고, 만약 자신의 정체성을 표현하고 싶은 디테일을 더하고 싶을 경우, ‘더하기의 법칙’을 적용하여 장갑이나 스카프, 선글라스, 양말 같은 언제든 제거 가능한 옷이 아닌 아이템을 활용하면 된다. 나는 ‘대범한 겁쟁이’군에게는 돋보이고 싶어 하는 욕망을 충족시켜줄 ‘더하기’ 아이템이 필요함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대범한 겁쟁이’군은 가장 먼저 아이보리 스웨터를 구입하길 원했다. 이유를 물어보니, 검정과 회색 위주의 상의를 입어왔는데, 트레이닝을 거치면서 그리고 유니클로 화이트 티셔츠를 구입해서 입어보면서 ‘여백미의 법칙’이 꽤나 유용함을 새롭게 배웠다고 한다.


그런데 그 아이보리 스웨터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기본 아이템일수록 찾기 힘든 법. 그날 우리는 그 쇼핑몰에 있는 남자 아이보리 스웨터는 거의 다 입어봤다.


‘대범한 겁쟁이’군도 ‘젠틀한 얌체’군과 마찬가지로 몸 전체에 근육이 발달한 체형이다 보니, 아이보리와 같은 팽창색의 경우 근육이 두드러져 몸이 예뻐 보이지 않는 경우가 꽤 있었다. 특히 굵은 털실로 짜인 스웨터와 꽈배기가 과한 스웨터는 그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우리는 거의 포기하고 있다가 귀가할 때가 다 되었을 무렵 혹시나 하고 들어가 본 MVIO 매장에서 가는 털실로 짜인 잔잔한 빗살무늬의 스웨터를 발견했다. 그가 입고 나오자, 스웨터는 그의 몸을 슬림하게 표현해주면서도 근육을 과하게 드러내지 않아 딱 예뻤다. 그 스웨터는 나와 ‘겁쟁이’군 모두의 낙점을 받았다. 가격대가 높았지만, 그는 품질이 뛰어나다면 감수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날 우리는 유니클로에서 생지 데님도 구입했다. 살짝 스키니한 핏의 생지 데님은 사실 모든 남성들의 옷장에 꼭 있어야 하는 필수 아이템인데, 그의 옷장에는 깔끔한 네이비톤의 데님이 없었다.


그가 구입한 청바지는 바짓단에만 약간의 디테일이 가미되어 있는 셀비지 진이었다. ‘대범한 겁쟁이’답게 화려함을 좋아하지만 과한 것을 피하는 성향 때문에 아주 약간의 디테일만으로 멋을 더한 셀비지 진이 맘에 들었나보다. ‘겁쟁이’군은 셀비지 진을 입어보자 마자 구입했다.


유니클로를 떠나기 전에 의자에 앉았을 때 살짝 드러나는 패션 센스를 업그레이드시키기 위해 양말도 담았다. 회색빛 나는 하늘색, 팥죽색, 보카시 그레이 등의 양말을 저렴하게 구입했다. 유니끌로 양말은 큰 돈 들이지 않으면서도 패션 센스를 뽐낼 수 있는 최고의 ‘더하기’ 아이템이다.   


망고로 옮겨 가서는 애매모호한 색상의 치노 팬츠를 착용해 보았다. 의도적으로 나는 과감한 색상들의 바지도 다 입어보라며 그의 팔에 안겨 줬다. 그래야 정말 구입해야 하는 조금 더 안전한 색상의 바지를 구입할 용기를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역시나 그는 대범하게 시도해봤다가 겁을 냈다. 그러다 쇼윈도의 마네킹이 입은 바지를 보더니 확실히 마음이 바뀌었다. 꽤 가격대가 높다는 판단에서 세일 기회가 오면, 그 때 구입하기로 했다.


두 시간 동안의 쇼핑이 끝나고 헤어질 시간이 되었다. 나는 그 날 그의 정체성을 드러내줄  ‘더하기’ 아이템을 발견하지 못했지만, 일주일 후에 다시 만나서 보충 쇼핑을 하기로 했다.



#5 “저는 관심 받는 게 좋은가 봐요.”


2주 후, ‘대범한 겁쟁이’군을 김포의 아울렛에서 만났다.


락포트에서는 우리가 머스트 해브 아이템으로 포함시켰던 아이템 중 하나였던 갈색 하이탑 스니커즈를 발견했다. ‘대범한 겁쟁이’군은 “이건 정말 Fancy하네요.”라는 말을 한다.


아울렛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며 커피를 마시는 동안 ‘겁쟁이’군은 지난 번 쇼핑 때 구입하지 않았던 애매모호한 색상의 치노 팬츠를 구입해야 겠다며 마침 블랙 프라이데이 세일 기회를 이용해서 구입하기로 했다.


그날의 주요 목표물은 갈색 스니커즈였지만, 그곳에서 나는 좀 더 ‘대범한 겁쟁이’군의 정체성을 드러내줄 아이템을 찾아보고 싶었다. 우리는 브랜드를 가리지 않고 어디든 들어가 보았다.


마침 인터메조 매장에서 그가 마음에 들어 한 옷이 하나 있었다. 코트를 좋아하는 사람답게 코트 류를 다 훑어보더니, 마네킹이 입고 있는 밝은 오트밀 색상의 코트가 가장 예쁘다는 평가를 내리며, 입어보겠다고 했다. 디테일이라고 해봤자 스티치가 전부였지만, 핏이 예사롭지 않았다. 쌍꺼풀진 얼굴의 ‘겁쟁이’군이 운동을 열심히 한 자신의 몸에 그 옷을 걸치니 허리 부분이 딱 맞아 화려하다는 인상을 줬다.


나는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역시 ‘대범한 겁쟁이’구나 싶었다. 과한 것을 피하는 ‘겁쟁이’답게 화려한 느낌이 나는 자신의 얼굴을 고려해서 디테일은 피하지만, 색상과 핏으로 화려함은 추구하고 싶어 하니까. 그는 그 코트를 구입하진 않았지만, 꽤 오랫동안 그 코트를 잊지 못했다.


나는 우연히 들어간 커스텀멜로우에서 그를 위한 아이템을 발견했다. 잔잔한 도트가 들어간 톤 다운된 오렌지색 스카프. 오렌지색은 쿨톤보다는 웜톤 피부에 훨씬 잘 어울리는 색상이다. 나는 그 스카프가 ‘겁쟁이’군에게 어울릴 것을 바로 알아보고, 착용해볼 것을 권했다.



‘겁쟁이’군은 그날 마침 지난번 쇼핑 때 구입했던 아이보리 스웨터를 입고 온 상태라 오렌지색 스카프가 빛을 발했다. 자신이 아끼는 검정 코트에도 어울릴지 궁금하다며, 매장에 있는 검정색 코트와 함께 매치하고, 나와 사진을 찍어가며 토털룩을 체크한 후 구입을 결정했다.


그렇게 쇼핑을 마치고, 내 차를 타고 서울로 들어오는 길에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범한 겁쟁이’군은 컨설팅을 받으며, 자신에게 개별 사실로만 존재했던 패션이 법칙으로 체계화된 점을 가장 좋았던 점으로 꼽았다. 그런 법칙을 발견하고 글로 써내려간 내게 갑작스럽게 경의를 표한다. 그건 아무나 못하는 거라고.


몇 주 후, 컨설팅 이후의 변화를 카메라에 담기 위해 한 카페에서 만났다. 오랜만에 만난 우리는 반가운 맘에 꽤나 긴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이제 컨설팅이 마무리되어, 이젠 그렇게 만날 수 없음에 아쉬움을 표현한다. 나는 ‘겁쟁이’군은 다른 사람보다 패션에 대한 지식수준이 충분히 높으니, 더 이상 배울 것이 없을 텐데 뭐가 아쉽냐고 반문했다.


그래도 늘 자신은 뭔가를 배우는 게 좋고, 내가 자신에게 자신에 대한 질문을 한다는 것 자체가 좋단다. 컨설팅을 하며 자기 자신에게조차 던지지 않는 질문을 내가 던져주는 것이 또 가장 좋았던 점 중에 하나였다고 한다. 그래서 자기도 몰랐던 자신에 대해서 알게 되고, 얼굴 분위기나 양말, 신발까지 세심하게 고려해서 전체적인 스타일링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게 되어 좋았다고 밝힌다.


나는 그의 소감을 들으며, 그건 컨설팅의 효과라기보다는 주목받고 싶은 ‘겁쟁이’군의 욕망이 어느 정도 충족이 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겁쟁이 군은 관심 받는 게 좋은가 봐요.

내가 말을 건네자, 그가 어느 블로거의 글에서 찾아낸 3w4 유형의 특징을 보여주며 대답한다.


제 유형이 ‘특별한 사람들에게 관심 받는 것을 좋아한다.’는 내용이 있는 걸 보니 맞는 것 같네요.

문득 그가 내게 표해줬던 내가 만든 ‘법칙’에 대한 경의가 떠올랐다. 학과 동기들이 특별한 사람들이라 좋았다는 점, 그리고 ‘겁쟁이’군이 누군가의 인사이트를 엿보기 위해 학교 게시판 'XX라이프'를 즐겨 찾는 이유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와 헤어질 때가 되었다. 우리가 처음 만났다 헤어질 때 내가 손을 흔들며 “안녕!”이라고 인사하자 황당해했었단 얘길 하며, ‘겁쟁이’군이 ‘권위자형’ 인간이 아닐까 의심했었다고 말했다.


저 그런 꼰대 엄청 싫어하는데. 제가 5살짜리 꼬마가 아니면 언제 누구한테 그런 인사 받아보겠어요. 누나는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손 흔들면서 인사해 주세요.


그가 인터메조 코트 대신 구입한 옷은 검은색 퍼가 은근히 화려한 야상 재킷이었다. 제작 기간이 꽤 오래 걸려 아직 도착하지 않아 입고 나오지 못해 아쉬워한다. 궁금하다. 그 옷을 입은 그의 모습은 얼마나 멋질지. 그 옷을 입고 ‘성층권’에서 지상을 내려다보며 ‘생각보단 시시해서 별로’라고 생각하진 않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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