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가을. 바쁘게 출근 준비를 하고 차 시동을 거는 순간 전화벨이 울렸다. 엄마였다. 침착하지만 떨리는 목소리로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전하셨다. 전화를 끊는 순간 눈물이 주룩 흘렀다.
벌써 돌아가시다니.
남들이 호상이라 해도 할머니를 더는 볼 수 없음을 받아들이기까지 내겐 시간이 필요했다. 내 남다른 표현 본능은 외할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다. 외할머니는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미용실에서 네일 케어를 받으셨고, 그 연세의 할머니들이 감히 시도하지 않는 와인색으로 머리카락을 물들이셨다. 우리 할머니는 멋쟁이었다.
내 기억 속 외할머니의 시그너처 아이템은 파란색 반짝이 블라우스였다. 그 옷을 기억하는 이유는 너무 튀어서이기도 하지만, 내 유치원 때 소풍에 그 옷을 입고 와주셔서이다. 할머니는 그 옷을 입은 채 고깔모자 쓰고 풍선도 터뜨리셨고 밀가루 속 사탕도 찾아 드셨다.
외할머니는 엄마에겐 아들만 귀히 여긴 모진 엄마였으나 내겐 멋쟁이에 유머 감각 뛰어난 그냥 할머니였다. 내가 대학에 진학하여 본격적으로 멋을 부리기 시작했을 땐 "우리 유리 탈랜트같네!" 라며 내가 아가씨가 된 모습에 누구보다 즐거워하셨다. 장례식장으로 가기 위해 부산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돌아가실 줄 알았으면 마지막으로 뵈었을 때 더 즐겁게 해 드리는 건데.'
장례식장에 도착했다. 할머니 영정 속 할머니는 내 기억 속 할머니보다 훨씬 젊었다. 평온히 가시라는 말이 차마 나오지 않았다. 할머니와 가족들 사이에 오갔던 엉킨 감정이 떠올라서였다.
데이빗 로렌스의 소설 ≪아들과 연인≫ 속 어머니가 아들을 애인처럼 사랑했듯 우리 할머니도 그랬다. 그러나 할머니는 아들인 외삼촌이 서울로 진학한 이후 곁에 두고 즐거운 시간을 제대로 보내보지도 못하셨고 그 아들의 부인인 외숙모와는 갈등을 겪으셨다. 그리고 지금껏 바로 곁에서 할머니를 모셔 온, 그러나 할머니 때문에 하고 싶은 공부를 하지 못해 한이 맺혀버린 셋째 딸 엄마에게는 갖은 말로 상처를 주셨다.
그런 일들로 머리 속이 시끄러울 때 즈음 다시 맘을 추스르고 할머니 영정을 응시했다. 그 때 내 시선을 잡아끈 건 영정 앞에 놓인 안경이었다. 안경을 본 순간 기차 안에서부터 참았던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가시기 직전까지 코언저리에 걸쳐있었을 안경인데. 저것조차 못 갖고 가셨구나.'
≪샤넬, 미술관에 가다(김홍기, 2008)≫에는 명화 속 패션에 담긴 흥미로운 뒷얘기가 소개되어 있다. 많은 그림이 소개되어 있지만, 그 중에서 나는 제임스 휘슬러가 그린 초상화 속 여인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초상화의 주인공은 '레이디 뮤즈(Lady Meux)'라고 불린 런던 사교계의 여인이다. 세련된 스타일과 도도한 표정. 그림을 뚫을 듯 살아있는 눈빛. 비범함이 엿보인다.
이 비범함의 실체는 귀부인이 가진 여유로움이라기보단, 귀부인이 되고 말겠다는 야망에 가까웠다. 신분을 타고나지 못한 그녀는 결혼으로 신분을 얻었다. 그러나 자신은 갑작스레 신분 상승을 한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귀족인 양 고상한 이미지를 만들고 싶었다.
그러한 이미지 메이킹을 위해 그녀는 그림을 의뢰했고, 이 그림을 준비하면서 직접 옷을 고르고 다이아몬드 티아라와 망사까지 스타일링했다. 어쩌면 표정과 포즈도 연습했을지 모르겠다. 한편으론 자신의 아름다운 한때를 남기고자 하는 목적도 있었겠지.
검은 드레스에 하얀 모피, 그리고 다이아몬드. 탄성을 자아내는 룩이지만, 프릴이나 코르셋이 없는 이 드레스의 스타일은 당시 트렌드를 비껴간 것인데다가 당시로서는 다이아몬드가 천박함을 표현하는 보석이기까지 했다. 뭐 그럼 어떤가. 그저 내 눈엔 그녀의 모든 자태가 세련되고 눈부시기만 하다. 그러나 그녀의 아름다움을 향한 경탄이 왠지 모를 애잔함을 남긴다.
여느 귀부인보다 그녀를 이토록 아름답게 그린 휘슬러의 시선이 무엇이었는지 궁금해졌다. 파산 직전의 그에게 거액을 쥐여 준 은인에 대한 고마움의 시선이었을까, 아니면 야망을 품은 여인을 향한 안쓰러움의 시선이었을까.
그렇게 그녀가 얻고자 애썼던 것, 그것을 얻기 위해 준비한 옷, 그리고 그녀의 아름다움. 이 모든 것은 지금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 우리에게 남은 건 그녀가 남긴 그림과 그녀가 야망을 품었다는 스토리이다. 100년 하고도 40년이 지난 그림이지만, 살아있는듯한 그녀의 눈빛을 바라보자니 한 가지가 궁금해졌다. 그녀가 평생 얻고자 애썼던 그것을 그녀는 가지고 갈 수 있었을까.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이 원작인 영화 <토니 타키타니>는 토니의 고독을 덤덤히 그려낸다. 30대 후반의 토니는 꽤 성공한 일러스트레이터이다. 22살의 한 여성을 만나기 전까지는 평생 외톨이로 살아왔지만 별로 불편하진 않았다. 그런데 바람 불면 날아갈 것 같은 그녀의 묘한 옷맵시가 이상하게 끌린다. 토니의 옷 칭찬에 그녀는 수줍게 웃으며 이렇게 말한다.
옷은 제 부족한 부분을 채워줘요. 그리고 월급 대부분을 옷 사는데 다 써버려요.
토니는 그녀가 마냥 좋다. 토니는 그녀에게 청혼하며 그녀로 인해 처음으로 자신의 고독을 깨닫게 되었음을 고백한다. 아마도 그녀는 자신의 내면을 남에게 처음으로 꺼내보였을 토니의 진솔함에 마음이 열린 것 같다.
토니의 아내는 예상 외로 완벽한 주부였다. 토니는 더이상 고독하지 않아 행복하다. 다만 그녀의 쇼핑은 도를 넘었다. 옷 사는 걸 줄이는 게 어떻겠냐는 토니의 말을 별말 없이 받아들이는 듯 했던 그녀. 그러나 또 백화점에 들렀던 그녀는 맘에 드는 옷을 향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바람에 교통사고를 당하고 만다. 토니는 그렇게 아내를 잃었다.
토니에겐 명품 옷으로 가득찬 방만 남았다. 모두 아내의 옷이건만 토니는 그곳에서 아내를 느낄 수 없다. 결국 토니는 옷을 모두 중고상에 팔고 아내를 잊기로 한다.
어쩌면 토니는 아내를 처음 봤을 때 그녀의 애잔한 옷맵시로부터 자신의 것과 유사한 결핍을 알아본 걸지도 모른다. 대학 시절 누드화를 그릴 때 인체를 로봇처럼 그린 토니. 누군가의 체온을 느껴본 적 없이 자란 토니. 그런 그가 사물을 기계적으로 표현하는 일러스트레이터가 된 건 우연이 아닌 것 같다. 토니는 자신의 고독을 외면한 채 일 중독자로 살아왔기에 아내의 가녀린 옷맵시를 접하고 나서야 자신의 고독을 깨닫게 된 것이다.
만약 토니의 아내가 옷에 대한 이야기로 자신의 결핍을 부끄럼 없이 토니에게 꺼내었더라면, 그리고 토니도 아내에게 청혼할 때처럼 그녀 앞에 자신의 내면을 좀 더 꺼내어 보였더라면. 그래서 두 사람이 함께 건강해지는 방향을 찾으려 했더라면.
그랬다면 아내는 옷만 남긴 채 잊히는 존재 그 이상이 될 수 있지 않았을까. 또 토니는 아내를 보낸 후 고독의 늪에 무력하게 빠져드는 자신을 꺼낼 수 있는 힘을 내어볼 수 있지 않았을까.
인상파 화가들은 시대가 그들을 알아주는 행운을 만나지 못했기에 평생 가난한 삶을 견뎌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크고 작은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시대와 상황에 굴복하기보단 '인상파'라는 이름으로 똘똘 뭉쳤고, 서로에게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 주었다. 그랬기에 그들은 자신들의 정체성과 작품 세계를 꿋꿋이 지킬 수 있었다.
인상파 작품이 사랑받는 이유는 그림이 객관적으로 아름다워서만은 아닌 것 같다. 그들의 유대가 붙잡아 주었던 작가 정신이 작품 속 영혼으로 우리에게 다가와 말을 걸고 울림을 주는 게 아닐까.
"누구나 영원히 살 것 처럼 살지만, 누구나 죽는다. 그리고 그 죽음을 생각해보면 어떻게 살아야할지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우연히 잡지에서 본 '웰 다잉(well-dying)' 기사의 첫 문장이다. 그림 속 레이디 뮤즈가 애써 얻고자 했던 신분은 죽어서 영혼이 되면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리고 토니의 아내가 결핍을 가리기 위해 소유했던 옷 역시 죽어서 그녀가 영혼으로만 존재할 때 아무런 힘을 발휘할 수 없었다. 한편 인상파 작가들의 가난은 어떨까. 그들에게 가난은 살아가는 동안 고통을 주었지만, 죽어서 영혼이 되었을 때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이었다.
죽음을 떠올려보니, 인상파 작가들은 레이디 뮤즈나 토니의 아내가 하지 못한 것을 했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향한 믿음, 서로 사랑한 기억, 그리고 작가 '정신'을 남길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죽어서도 그런 정신적인 가치를 품고 갈 수 있었을 것 같다.
레이디 뮤즈, 토니와 토니의 아내, 그리고 인상파 화가들에게서부터 시선을 돌려 나를 돌아본다. 내가 죽는다면, 나는 무엇을 가져갈 수 있을까. 그리고 나는 무엇을 남길 수 있을까. 내 육신이 죽고 영혼이 되어도 내가 가질 수 있는 건 아마도 내가 살면서 만들어온 건강한 자존감, 소중한 사람들과의 사랑, 그 소통에서 느낀 기쁨과 행복, 내가 추구했던 정신이 아닐까 한다. 그것들이 영혼이 될 나에게 부끄럽지 않은 것이면 좋겠다. 또 나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가슴에 나의 그런 것들이 남으면 좋겠다.
외할머니는 화장되시기 직전까지 고운 옥색 한복을 입고 편안히 누워계셨지만, 그 한복 역시 가지고 가실 수 없었다. 내 기억 속 파란색 반짝이 블라우스도 그랬다. 외할머니께서는 파란색 반짝이 블라우스로 행복한 사람으로 포장하려 하셨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외할머니의 영정을 마주하며 제일 먼저 떠올린 건 외할머니께서 끝내 풀지 못하셨던 감정의 응어리였다.
이런 생각 끝에 내 옷장을 열어봤다. 거기엔 외할머니나 레이디 뮤즈, 토니의 아내와 별반 다르지 않은 내 모습이 있었다. 애써 내가 행복한 척하려고, 애써 낮은 자존감을 감추기 위해 무리해서 구입했던 옷과 가방들. 어차피 갖고 가지도 못함을 떠올리니 부끄러웠다.
내가 영혼으로만 존재할 때 내가 가져갈 수 있고, 진정으로 남길 수 있는 건 뭘까. 그 때 도움이 될 옷과 그렇지 않은 옷은 뭘까. 옷이란 것이 어차피 두고 갈 수밖에 없는 것이라면, 나는 어떤 옷을 사야할까.
내가 부유해 보이는 옷이나 행복을 가장하는 옷이 아니라 진정으로 내가 누군지 알고, 나를 사랑하는 마음을 표현한 옷. 그래서 있는 그대로의 나를 가식 없이 보여주는 옷. 가벼운 미소와 함께 나와 함께한 순간을 기억하게 하는 옷. 내가 추구한 가치를 보여주는 옷. 그런 옷이야 말로 육신은 죽고 영혼으로만 남은 내가 기쁜 맘으로 바라볼 수 있을 것 같다.
토니가 아내의 옷으로부터 허탈함만 느낀 것과 달리, 내가 사랑한 사람들은 내 옷에서 내가 추구했던 것들을 떠올리면 좋겠다. 내가 레이디 뮤즈의 그림을 바라보다 연민을 느껴버린 것과 달리, 누군가가 사진 속 내 모습을 보았을 때 끝까지 미소만 지었으면 좋겠다.
* 이 글은 필자의 책 ≪오늘 뭐 입지? 패션-보다-나≫에서도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