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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유리 Feb 09. 2022

죽음을 직면하면 뻔뻔해진다

   

1. 차마 버릴 수 없던 폼 나는 길


“작가님, 어떻게 그런 선택을 하실 수 있었나요? 부모님 얼굴이 떠오르지는 않으셨나요?”


2017년 7월, 어느 강연회장에서 이런 질문을 받았다. 고3이라던 질문자는 박사 학위를 버린 내 선택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답을 하기까지 내겐 잠시의 머뭇거림이 필요했다. 


“사실... 쉽지는 않았죠. 그러나 어렵지도 않았어요. 불과 얼마 전 까지 제 삶은 지옥이었어요. 나가는 길이 안 보였죠. 그냥 끝내고 싶었어요. ‘고속도로에서 운전하다 핸들만 꺾어도 죽을 수 있겠구나.’ 그러자 아이 얼굴이 떠올랐어요. 죽을 수가 없었죠. 그 다음엔 눈치만 보느라 차마 못 버렸던 것들이 떠올랐어요. ‘죽으면 다 끝인데 왜 못 버리고 살았을까.’ 그러자 심플해졌죠. ‘죽지 말고 살자. 대신, 하고 싶은 걸 하자.’”


고등학교 2학년 가을, 처음으로 내가 되고 싶은 사람에 대한 그림을 그려 보았다. 누군가에게 좋은 영향을 주는 사람. 원래 내 목표는 일단 좋은 학교에 가서 멋진 남학생과 연애하고 좋은 직업을 가진 누군가가 되는 거였다. 그러다 우연히 듣게 된 목사님 설교가 나를 완전히 흔들었다. 그날 이후 부모님이 권하는 직업을 갖는 것을 목표로 삼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데 뭘 해야 하는 걸까.


고3이 되었다. 성적이 나쁘진 않았다. 그런데 힘들었다. 뭘 하고 살아야할지 모르는 상태로 진로를 결정해야 한다는 게 이상했다. 답답한 마음에 독서실 내 자리에 시 한 편을 써 붙여 놓았다. 윤동주의 <길>.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무작정 걷고 또 걷는다’는 시인은 자신을 비추는 하늘이 ‘부끄러울 만치 푸르다’고 고백했다. 내 얘기였다. 


신문을 펼치면 ‘교육이 문제’라는 주장이 심심찮게 보였다. 주위의 똘똘한 친구들 역시 교육이 문제임을 알았다. 그러나 그들은 법조인이나 의료인이 되려고 했다. ‘교육은 언제나 문제로 남아야 하는 것일까?’, ‘내가 그리 뛰어나진 않지만 내가 교육을 고민하면 어떨까?’ 이런 생각으로 몇 달을 보낸 후 나름의 결론을 내렸다. 국가 기관에서 일하는 사람이 되자고. 그건 좋은 영향을 미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꿈을 풀어낼, 폼 나는 길이었다. 


가장 들어가기 어렵다는 학교가 떠올랐다. 처음부터 그곳이 목표는 아니었다. 비록 그곳을 택하면 ‘잘 나가는’ 과를 택할 수 없었지만, 교육이라는 분야가 학교 이름과 만나자 부모님과 선생님은 반대하지 않았다. 치열하게 공부했다. 결국 난 그 학교 학생이 되었다. 그런데 잠시의 으쓱함이 지나간 자리엔 긴 당혹감이 남았다. 


‘이건 아닌데.’


전공 공부가 재미없었던 거다. 인정하기 싫었다. 고심해서 스스로 내린 결정이라는 자존심과 모두 지켜보고 있다는 중압감. 그 무거운 맘을 숨긴 채 착실한 4년을 보냈다.


“유리야, 혹시 미술 평론 공부해볼 생각 없어? 넌 미적 감각도 있고 생각하는 것도 좋아하고... 잘할 것 같은데.”


미대 출신 지인에게 이 말을 들었던 그때. 스물 셋의 난 용기를 못 냈다. 고등학교 때 심리학만큼이나 미학도 공부해 보고 싶어 했었단 사실은 까맣게 잊은 채 이렇게 답했다.


“어... 지금 그러기엔 너무 많이 온 것 같아요. 전 저희 과 대학원에 가야 돼요.”




2. 마티스 작품이 이상하게 좋았다


이런 건 나도 그리겠다 싶었던 마티스 작품. 애써 잘 그리려 하지 않은 붓 터치에 점점  끌렸다. 언젠가 여행 에세이를 읽다 그 속에서 ‘방스 경당’이란 곳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방스 경당은 ‘마티스 경당’이라고 불릴 만큼 마티스가 혼을 불어 넣어 만든 곳이었다. 어떤 영국 유튜버의 영상에서는 유튜버가 방스 경당 내부에 들어가 스테인드글라스를 따라 들어오는 빛의 아름다움에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작품은 적지만 마티스 스스로 ‘걸작’이라 꼽는 그곳. 방스의 이야기가 궁금했다. 


『앙리 마티스, 신의 집을 짓다』(2019, 가비노 김)는 내 물음표를 긴 느낌표로 만들어준 책이다. 저자는 마티스에게 방스 경당이 ‘나의 경당’일 수밖에 없었던 이야기를 소개한다. 


‘야수파’의 창시자, 피카소의 라이벌, 모던 아트의 아버지. 화려한 수식어가 붙는 마티스였지만, 그는 평생 인정 욕구로부터 자유롭지 못했었다. 아버지 권유에 따라 소르본 대를 졸업하고 변호사 자격증을 취득한 20대의 그는 법률사무소 서기로 취직했다. 적당히 출세한 엘리트. 그러나 정작 본인은 몸에 맞지 않은 옷을 입은 듯 불편했다. 그가 그림을 처음 그린 건 맹장 수술 후 입원한 그에게 옆 침대 친구가 권유하면서부터였다. 그때 그는 그림이 자신의 길임을 알았다. 고향 사람들은 그를 ‘바보 마티스’라 불렀다. 출세가 예상되는 법관의 길을 버리고 아무 것도 보장되지 않은 화가의 길을 걷기로 했으니 그럴 수밖에.


마음의 소리를 외면할 수 없던 그였지만, ‘바보 마티스’라는 조롱을 마냥 흘릴 순 없었다. 그렇다고 시류에 편승해 돈만 버는 그림 자영업자는 될 수 없었다. 대상을 보이는 대로 모사하는 것도 인상파 화가들의 점묘법을 따르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자신의 작품 세계를 만들고 싶었던 그는 실험을 거듭했다. 그러나 성공해서 금의환향하고도 싶었다. 우여곡절 끝에 당대 최고의 아티스트라는 이름을 얻지만, 얼마 안 가 피카소에게 그 명성을 뺏긴다. 1937년 프랑스 정부는 그에게 파리 만국 박람회에 출품할 작품을 의뢰하지 않았다. 반면 스페인 대표로 참여한 피카소의 ‘게르니카’는 역사적인 작품이 되었다. 마티스는 격노했다.


이빨 빠진 야수가 되다시피 한 그가 그 모든 걸 내려놓을 수 있었던 건 말년이 되어서다. 1941년 72세였던 그는 리옹에서 암수술을 받았다. 대수술에서 깨어난 그는 자신이 살아났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감사했다. 누워서 생활해야 할 정도로 만신창이가 되었지만, 고통은 새 인생을 받은 기쁨보다 덜했다. 그 보너스 인생이 얼마 남지 않음을 직감했지만, 그는 휘몰아치는 해방감을 맛봤다. 


1943년 자신이 요양 중인 니스를 나치 군이 점령하자, 마티스는 방스로 거처를 옮겼다. 그 무렵 자신의 간병을 맡았던 어린 간호학생 모니크와 친구가 된다. 몇 년 후 자크-마리 수녀가 되어서 마티스와 재회한 모니크는 마티스의 거처 인근의 방스 경당이 재건된다며 스테인드글라스 스케치를 선보인다. 마티스는 방스 경당 일이 자신의 운명임을 알았다.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몸이었지만, 1948년부터 1951년까지 기꺼이 자신의 두 번 째 삶을 쏟아 부었다.


방스 경당에서는 다른 기독교 건축물과 달리 숙연함이 아닌 발랄함이 보인다. 그는 죽다 살아난 이후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한 눈을 얻었다. 경당을 구성하는 작품 하나하나에서 꽃, 나무, 자갈이 완전히 달리 보인다는 마티스의 다정한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는 고통 가운데 존재했지만, 자신이 다시 살아남 그 자체로 온전히 기뻐할 수 있었음을 그곳에 들어서는 사람들이 알기를 원했다. 고통 가운데 생명의 기쁨을 맛보는 것. 무신론자인 마티스가 전하고자 한 이 메시지는 그리스도교의 메시지이기도 하다. 그는 작업 내내 병에서 오는 고통과 언제 죽을지 모를 불안에 시달렸다. 그럼에도 아름다움에 집중하는 작업이 자신을 살리는 해독제라 믿었다. 그는 자신이 삶과 예술에서 느꼈던 성스러운 호사를 누군가에게 전하고 싶었다. 마티스가 느낀 해방감은 경쾌하게 부유하는 듯한 방스 경당의 십자가 첨탑 형상에서 표현되었다. 


방스 경당 이야기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건 방스 경당에 그가 행했던 예술적 시도이다. <십자가의 길>이나 <성모자>과 같은 세라믹 패널화에는 채색은 물론 디테일 묘사까지도 생략된 마티스표 드로잉이 있다. 어린이가 그린 것 같은 그림, 그러나 숱한 실험과 습작의 결과물은 보는 이로 하여금 메시지의 본질에 집중하게 한다. 그의 드로잉에서 표현된 예수는 백인 예수도 흑인 예수도 아닌 인류를 구원하는 예수 그리스도니까. 오랫동안 교회 미술을 대표하는 주제를 표현했지만, 그의 작품은 교회 미술의 전통과는 한참 멀어져 있다. 그는 미술계에서도 사물을 그대로 모사하는 대세를 거부하며 아카데미나 제도의 경멸을 온몸으로 받아왔었다. 어차피 죽을 목숨이었다 생각한 이후, 그는 더욱 자유로웠다. 


그는 그곳을 카톨릭 전통에서 벗어난 성당으로 만들고 싶어 했다. 어둡고 고압적인 구조물이 아니라 흰 색의 건축물에 빛이 시원하고 환하게 비치도록 설계했다. 고해소의 문 디자인은 그가 여행 중 영감을 받았던 북아프리카의 격자무늬와 이슬람의 격자창으로부터 힌트를 얻은 것이다. 모스크 양식을 교회 미술에 접목하는 이런 똘끼라니. 


방스 경당이 완공되고 3년이 지난 1954년, 그는 생을 마감했다. 아마도 그는 그 죽음 앞에서 생이 끝나는 것을 슬퍼하지 않았을 것 같다. 그가 간절히 원했던 건 금의환향이나 피카소를 꺾는 것이 아니라,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원 없이 자신의 작품 세계를 이루는 것이었을 테니까. 




3. 에라 모르겠다


내가 석사 과정 학생이었을 때, 고등학교 때부터 일하고 싶었던 국가 기관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할 기회가 왔다. 기대에 부풀어 일을 시작했지만, 막상 그곳에서 일하는 선배들의 삶이 멋지지 않았다. 내 눈에 비친 선배들은 거대한 피라미드의 윗자리에 존재하는, 폼 나지만 무력한 부속품일 뿐이었다. 


‘저게 뭐야.’


내가 박사 학위를 받으면 그 중 하나가 될 예정이었다. 그럼에도 30대 후반까지 난 ‘저게 뭐야’라는 마음의 소리를 듣지 않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방황하는 기간 동안 공허한 마음은 쇼핑으로 달랬다. 쇼핑에 몰두하자 그곳의 보수가 괜찮다는 사실이 먼저 보였다. 어느 순간부터 선배들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래야 멋진 옷을 입을 수 있는 사람, 쓸모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박사 논문 심사를 위한 마지막 관문을 앞두었을 무렵, 내 삶은 지옥이었다. 난 결혼 생활에서도 일에서도 실패한 사람일 뿐이었다. 아이에게 엄마의 불행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편리한 동선 확보를 위해 인테리어 디자이너에게 부탁해 만든 내 집 디귿자 주방. 그 곳은 내가 쪼그려서 숨 죽여 우는 공간이 되었다.


죽고 싶다는 생각을 딸 아이 얼굴을 떠올리고야 멈추었다. 그때야 인정할 수 있었다. ‘이건 아닌데’ 싶었던 길을 15년이 넘는 시간 동안 걸어왔었다는 걸. ‘이건 아닌데’ 싶었던 결혼 생활을 10년이나 유지했었다는 걸.

오래도록 외면했던 마음의 소리에 경청하기로 했다. 듣는 나와 말하는 나의 대화가 휘발되는 게 아쉬웠다. 글을 써보기로 했다. 죽음을 떠올릴 만큼 머릿속이 시끄러웠기에 넘치던 생각을 휘갈기는 건 쉬웠다. 내 글에는 절박함이 있었다. 


논문 쓸 땐 심사자들 눈치를 보느라 하고 싶은 말을 맘대로 못했다. 그러나 혼자 쓸 땐 달랐다. 하고 싶은 얘기를 하기 위해서 온갖 영역을 넘나들며 휘갈겼고, 내가 배워 왔던 글쓰기 형식도 따르지 않았다. 누군가의 심사를 받을 필요가 없었던 글. 모든 관습을 벗어 버린, 순수한 내 생각을 꺼내어 보인 글. 내 글은 내 안에 집중할 수 있는 빛이 되었다. 


어릴 때부터 글 쓰는 게 좋았다는 사실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물론 처음 써본 교과서 같은 글은 거칠고 현학적이며 가독성이 낮았다. 그럼에도 나란 존재가 글을 쓴다는 사실이 좋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에라 모르겠다’는 맘으로 내 쇼핑 중독을 돌아본 내밀하고 어두운 내면을 파헤친 글을 썼다. 그리고 ‘에라 모르겠다’는 맘으로 그 글을 블로그에 공개했다. ‘누가 읽을까?’ 라는 두려움은 ‘살고 싶다’는 절박함보다 약했다. 


뜻밖에도 내 글은 나와 비슷한 처지의 누군가에게 갔다. 신기했다. 답 없던 내 삶이 한 편의 글이 되자, 누군가에게 닿고 울려 새로운 이야기가 되어 돌아왔다. 그 사연들을 접하며 평생 느껴본 적 없던 전율을 느꼈다. 그제야 알았다. 글쓰기는 내가 어릴 때부터 원했던 꿈에 가장 근접한 일이었다.


‘그래, 엘리트가 된다고 반드시 좋은 영향을 주는 사람이 되는 건 아니잖아. 그럼 내 못난 삶을 고백한 글로 미미하게라도 영향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게 낫지 않을까.’


글을 쓰기 전까지 난 직업 없이 이혼을 생각해야했던 사람에 불과했다. 그 어둠을 글로 써내자 난 비슷한 상황에서 절망했을 누군가에게 조용히 위로를 건네는 사람이 되었다. 그런 사람이 바로 내가 되고 싶던 사람이었다. 그때부터 작가가 되고 싶었다. 간절히.


내 이야기를 듣고 수술 이력이 있는 지인이 자신의 중환자실 입원 경험을 들려줬다. 며칠  그곳에 있다 보면 어제 밤까지 있던 분이 사라진 경우도 있고, 죽을 것 같이 사경을 헤매던 분이 퇴원하시는 경우도 있다고. 중환자실 침상에서 우리는 생사의 결정권이 우리 자신에게 있지 않다는 무력함을 배운다. 동시에 삶에서 붙들고 있던 많은 것들의 무가치함도 떠올리게 된다. 지금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인지 알고, 그것만 바라보고 살아갈 추진력을 얻는 것. 죽음 앞에서 사람은 약해짐과 동시에 강해진다. 


‘에라 모르겠다’며 글을 쓸 용기, 글을 공개할 용기, 그 글에 책임지고 싶어 다른 삶을 살아볼 용기. 그 용기로 호기롭게 박사 논문까지 그만 뒀지만, 작가로서의 삶이 평탄하진 않았다. 작가 지망생인 채로 줄줄이 퇴짜만 맞기도 했고, 무명작가로 살며 이런 저런 설움을 겪기도 했다. 그럴 때면 한 가지가 나를 지탱했다. 


‘한 번 사는 인생, 하고 싶은 일 하자.’


“니 참 용감하다.”


엄마는 비웃었다. 엄마 말에 잠시 마음이 짓눌렸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내가 즐거워서 써내려간 내 이야기가 누군가의 마음을 뜨겁게 할 거라고. 그래서 어떻게든 살 길이 마련될 거라고. 한 명만 확실히 홀리면 그 글은 잠재력을 증명한 거라고. 첫 책이 나왔을 때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낯선 내 생각을 비웃었다. 그러나 나는 알았다. 작은 내 이야기가 주는 울림은 점점 커질 거라고. 




고양이와 함께 침대에 앉아서 작업 중인 마티스 할아버지의 사진을 바라본다. 딱 이렇게 늙고 싶다. 죽을 때까지 원 없이 내 세계를 만들고 거기서 노는 거다. 그런 자유로움이 보편성을 얻게 될지 누가 알까. 이기심이나 무모함으로 비칠 수도 있겠다. 그럼 뭐 어때. 죽어서 영혼이 될 나 자신에게 후회 없는 인생을 선물할 수 있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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