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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유리 Mar 07. 2021

오빠, 아빠 역할 고마웠어.

내향인의 어설픈 첫사랑

1996년 봄, 모든 것이 두려웠다. 나를 향해 친절한 미소로 다가오는 사람들은 구원에 확신이 있는지 궁금한 사람들이거나 도나 기에 관심 있는지 궁금한 사람들이거나 어학 교재 외판원이었다. 늘 집 떠나기를 꿈꿨지만, 캠퍼스에 첫 발을 들인 순간부터 내가 내 보호자가 되어야 함은 낯설었다.


게다가 난 컴맹이었다.  1학년 교양 국어를 맡은 교수는 숙제 작성 시 컴퓨터 사용을 의무라고 말했다. 나 같은 학생의 빠른 적응을 도우려는 의도였다. 매 시간 강의계획서에서 과제를 확인할 때마다 손에서 땀이 났다.


과일과 고기를 그리워하며 기숙사 방에 앉아 한숨만 쉬던 어느 날, 언니에게 SOS를 쳤다. 신림동 어느 고기 집에서 삼겹살을 사주던 언니는 의외의 제안을 했다.


“준후라고... 언니 친구 중에 니네 학교 애 한 명 있거든. 공대생인데 컴퓨터도 잘 하는 것 같더라. 함 만나봐.”


며칠 후, 설렘과 두려움을 안은 채 약속 장소에 갔다.

“니가 윤아 동생이구나.”

등 뒤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뒤돌아서 그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별이 쏟아지는 줄 알았다. 그 역시 내 얼굴을 확인하고, 잠시 얼었다.

“헙! 윤아랑은 다르네...?”

며칠 후부터 정기적으로 준후를 만났다. 준후는 기본적인 컴퓨터 사용법과 캠퍼스에서 생존하는 법을 알려줬다. 난 가만히 그의 옆모습을 보는 게 좋았다. 긴 얼굴선과 서늘한 눈빛, 능숙히 컴퓨터를 다루는 손짓. 그가 있어서 참 다행이었다.


5월이 되었고 축제 기간이 되었다. 학교는 평소답지 않게 들썩였다. 모 동아리에서 댄스파티를 주최했다는 얘길 룸메이트에게 들었다. 얼떨결에 룸메이트에게 이끌려 그곳에 가게 됐다. 아는 얼굴이 여럿 보였다. 준후도 있었다. 이렇게 저렇게 알게 된 남자 선배들이 다가와 춤을 청했다. 거절하는 법을 몰랐던 난 그들 모두와 춤을 췄다. 그리고 그가 왔다. 그의 손에 손과 허리를 맡긴 채 스텝을 밟기 시작하자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그런데 그다음, 나조차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고 말았다. 음악이 끝나고 그의 손을 놓을 수 있게 되자 조용히 그곳을 나온 거다. 상기된 얼굴로 도착한 곳은 스스로 안전하다고 느끼는 곳, 기숙사 내 방이었다. 잠시 후 준후의 음성 메시지가 도착했다.


“한참 찾았는데... 간 것 같더라. 같이 있고 싶었는데. 섭섭해서 연락해 봤어. 잘 자...”


밀당의 고수라는 오해는 사양한다. 그 때 왜 그랬는지는 오래도록 내게도 미스테리로 남았었으니까. 내향인은 자극의 적정선이 낮게 세팅되어 있다고 한다. 아마도 너무 많은 자극에 노출되었다고 느꼈던 것 같다. 또 그와 가까워짐에 약간의 유예가 필요하기도 했다. 모범생으로만 살아온 내게 몇 달 전까지도 연애는 금지된 것이었고 함부로 시작할 수 없는 어른의 것이었으니까.


그러나 그 상태가 오래 가진 않았다. 며칠 후 나를 데려다주던 그를 마을버스 정류장까지 배웅하며 그의 팔에 내 팔을 슬쩍 끼웠다. 그는 당황했지만, 내 팔을 받아들였다. 그 상태로 두 사람은 기숙사와 마을버스 정류장 사이를 몇 번이고 왕복했다. 시원한 초여름의 밤바람이 얼굴을 간지럽혔다. ‘사귀자’라는 말은 없었지만 그날부터 나는 그의 여자 친구가, 그는 나의 남자 친구가 되었다.


달콤한 몇 달이 지났다. 2학기가 되고 겨울이 가까워 올 즈음. 우리는 다투기 시작했다. 그보다는 내가 혼났다는 말이 맞겠다. 잠들기 전 통화를 하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 그는 혼을 냈고 나는 눈물을 흘렸다. 내가 철이 없다는 게 주된 이유였다.


“이렇게 늦으면 어떡해!!!!”


약속 장소에 내가 늦게 나타난 어느 날 그는 건물이 울리도록 소리를 질렀다. 나는 그 자리에 얼은 채 아무 말 못했다. 그 후로도 그는 화를 냈고 나는 눈치를 봤다.


“화났어?”


그럼 그는 내가 자기 눈치만 본다고 또 화를 냈다. 그럼에도 난 처음 느껴본 하나됨(oneness)의 상태가 좋았다. 그런 내 맘을 모르던 그는 가끔 떨리는 목소리로 이런 말을 했다.


“나, 너한테 버림받을지도 몰라.”


준후의 두려움은 언니한테 들은 어떤 얘기 때문이었다. 내 부모님이 그를 내 남자친구로 탐탁치않게 여긴다는 것, 그리고 내가 한 번도 부모님 말씀을 어긴 적이 없었다는 것.


2학년이 되자 학교는 익숙한 곳이 되었다. 나는 기숙사를 나와 언니와 같이 살았다. 그 즈음 난 그에게 처음만큼 의존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나를 아이처럼 대했다.


누군가를 향한 감정을 확인하는 뜬금없는 순간은 그의 머리카락을 만날 때다. 그 머리카락을 가만히 관찰하거나, 별 생각 없이 청소기로 밀어버리거나, 황급히 쓰레기통으로 버리는 몸의 반응. 그건 이성보다 솔직하다. 내 방에서 그의 머리카락을 발견했을 때 내 행동에 조용히 놀랐다. 난 돌돌 말린 먼지라도 본 듯 그 머리카락을 빠르게 없애버렸다. 그와 거리를 두고 싶었던 내 마음을 그렇게 알게 되었다.


그는 그런 내 마음을 알지 못했다. 여느 때처럼 잠들기 전 통화를 하던 그날도 그는 나를 다그쳤다. 난 그가 생각하는 것만큼 어린애가 아님을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기대했던 원활한 소통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평소답지 않은 말이 내 입에서 나와 버렸다.


“오빠, 우리 헤어져.”


1분 전까지 혼내던 그가 울부짖기 시작했다. 제발 떠나지 말아 달라고. 제발 자길 버리지 말라고.


준후와 헤어지고 10년이 지난 어느 날. 내 책장에서 그의 책을 발견했다. 그가 내게 추천했던 교양 수업 교재였다. 살짝 번진 기어가는 글씨를 보니 만년필을 쥔 그의 손이 떠올랐다. 돌려줘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며 책을 후루룩 넘겼다. 그리고 어느 페이지에서 멈췄다. 거기에 10년 넘게 있었을 그의 머리카락이 있었다. 그가 베풀었던 친절이 생각났다. 그에게 연락했다.


준후는 덤덤히 안부를 전했다. 그리고 많이 미안해했다. 그때 자신이 화낸 기억 밖에 안 난다며. 그의 미안함에 내 마음을 돌아봤다. 미안함이 그의 몫이기만 해야 했을까.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기술》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하나됨(oneness)의 욕망은 죽음을 피할 수 없는 불안하고 고독한 모든 인간이 느끼는 본능이라고. 그 불안함을 견디기 위해 누군가와 함께 하고 싶은 거라고. 그러나 그 하나됨이 모두 사랑은 아니라고.


태아였던 우리는 모체에서 분리된 그 순간부터 불안을 느낀다. 그런 우리가 달성해야 하는 첫 번째 과제는 엄마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엄마와 자신을 분리하는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 과제는 자신이 스스로 보호자가 되어 부모에게 받았던(혹은 받았을) 사랑으로 자신을 사랑하는 건강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프롬은 그런 과업을 성취한 사람만이 연인(배우자)과의 사랑이라는 마지막 과제를 수행할 자격을 얻는다고 말한다.


프롬의 관점에서 연인 관계는 서로를 손님으로 모시는 동료 요리사로 비유할 수 있다. 누군가가 일방적으로 대접하고 또 누군가가 일방적으로 얻어먹는다면, 그건 건강한 관계가 아니다. 우리가 음식을 대접할 수 있는 사람이 되려면 누군가가 해준 음식을 맛본 적도 있어야 하고 레시피를 익힌 후 실패도 해 가며 실력을 키워야 한다. 자기 자신에게 맛있는 음식을 해줄 수 있을 때까지.


연인이 나와 입맛이 비슷하면 내 실력이 별로라도 출발이 순조롭다. 서로의 요리 실력이 형편없음은 비난거리가 될 수 없다. 내가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으면, 상대방의 실력이 향상되도록 도우면 되는 거다. 상대방 실력이 향상되도록 돕다 본인 실력도 향상되는 즐거운 시너지도 종종 발생한다. 또 서로 음식 취향이 다르다면 상대의 입맛을 탓하기보다 내 레시피를 유연하게 바꿀 수도 있어야 할 거다.


나는 준후에게 어떤 연인이었을까. 나는 준후가 차려주는 음식을 받아먹기만 하는 사람이었고, 준후는 내게 음식을 해 주는 사람이었다. 다만 그는 내 입맛이 유치하다고, 혹은 내 실력이 형편없다고 화를 냈다. 서로에게 동료 요리사가 되기보다 한 명은 요리사가, 한 명은 손님이 되어 있었다.  준후는 화를 내면서도 손님이 떠나는 건 원치 않았다. 또 나는 요리할 줄 모른다는 이유로 참고 앉아 있었다. 두 사람 모두에게 고독은 무서웠으니까.


준후가 내게서 제대로 본 게 있었는데, 그건 내가 부모와 맺어온 관계였다. 나는 삼십대 중반까지 부모님 말씀을 어긴 적이 거의 없다.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문요한의 책《관계를 읽는 시간》에서는 우리 대부분이 건강하지 못한 관계를 맺게 됨이 소개된다. 우리가 어릴 때 부모와의 애착에서 손상을 경험하게 되면 분노나 불안을 느낀다. 내향적인 아이들이 분노를 경험하면, 부모에게 벽을 쌓게 되고 회피형(방어형) 관계를 맺는 성인으로 성장한다. 내향적인 아이들이 불안을 경험하면, 부모를 기쁘게 하려하고 순응형 관계를 맺는 성인으로 성장한다.


나는 후자였다. 내 감정에 솔직하기보다 상대방의 눈치를 봤다. 누군가에게 거부당할까봐 두려웠고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숨겼다. 준후가 화를 내도 아무 말 못했던 건 어릴 때부터 내게 형성된 관계의 틀 때문이었다. 부모님은 화내는 요리사였고 난 조용한 손님으로 성장했다. 부모님을 기쁘게 하려면 군말 없이 먹어야 했다.


부모님은 내가 요리사가 될 수 있으리라 믿지 않았고 나도 요리사가 될 생각을 감히 못했다. 나는 거의 모든 관계에서 쩔쩔매는 걸 감수하며 주는 음식을 먹는 사람이었다. 난 준후와 헤어지고도 제2의 준후를 여럿 만났다. 아마도 그때 준후와 헤어지기로 한 건 잠시 동안 내가 요리사가 되어야 함을 알아챘기 때문일 거다.


돌아보면 나는 그를 사랑한 적이 없다. 누군가와 묶여 있는 상태, 하나됨을 원했을 뿐이다. 고독과 불안을 피하기 위해 시작된 만남. 그럼에도 부모의 마음으로 나를 보살펴준 그에게 고맙다. 그리고 내 미안함이 그의 미안함보다 작지 않으면 좋겠다.


건강한 사랑을 알지 못한 채 사랑 받으려 애썼던 20대와 30대의 나. 그리고 40대가 된 지금의 나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나 자신에게 최고의 요리사가 될 것. 화내는 사람에게 불편하게 얻어먹진 말 것. 서로의 실력 부족을 탓하기보다 함께 실력을 키워가는 기쁨을 기대할 것. 그나저나 입맛 비슷한 동료 요리사나 얼른 찾아볼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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