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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유리 Apr 23. 2017

나만의 위시리스트 관리법

몇 년 전 어느 잡지에서 핑크색 샤넬 클래식 백의 사진을 보고 나는 그야말로 ‘매혹’을 느꼈다. 페일 핑크 샤넬 백의 아름다운 퀼팅. 핑크빛 마름모 하나하나가 광채를 띄는 것만 같았다. 물론 그때 당시에 나는 검은색 샤넬 백을 갖고 있었지만, 샤넬 백을 가져본 사람들에게 검은색 백은 그저 첫 번째 관문일 뿐이다.


나는 그 핑크색 샤넬 백이 너무 아름답다고 느낀 나머지 잡지에서 그 페이지를 오려 옷장 문 안쪽에 붙여두었다. 옷장 문을 열어볼 때마다 마치 내 것이라도 된 듯 ‘안녕!’하고 인사라도 하게.


그 이후로 나는 잡지에서 유독 나를 매혹시키는 물건들마다 오려서 옷장 문 안쪽에 붙여놓고 거의 매일 보면서 지냈다. 내가 붙여뒀던 물건에는 반 클리프 앤 아펠의 에메랄드 반지도 있었고, 지미추의 카멜색 사각 토트백도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나의 머스트 해브 아이템이 된 화이트 셔츠 드레스도 있었다.


그렇게 몇 년을 지내다 보니 나를 매혹시켰던 눈부셨던 핑크색 샤넬 백은 그냥 시들해졌다. 그리고 반 클리프 앤 아펠의 에메랄드 반지도, 지미추 토트백도. 왜 그런지는 잘 몰랐다.

그건 사진이 유발하는 묘한 힘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사진은 보는 이로 하여금 대상에 대해 매혹을 느끼게 하는 힘도 있지만, 사진은 사물이나 사람이 가지는 거리감인 아우라를 파괴하는 힘도 지니고 있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상당히 고급스러운 이미지로 치장한 잡지 지면 광고에서 어떤 상품을 접할 때 ‘아! 저 상품이 존재하는 세상은 왠지 모르게 멋지다. 내가 사는 세상과 달리’라는 거리감을 느끼기도 하지만, ‘정말 아름답다!’며 매혹당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 물건이 미지의 세계에 저 멀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진의 형식으로 바로 내 눈앞에 존재하면, 비싼 물건에 대한 거리감이 어느 정도 파괴되고 만만함으로 다가온다. 우리는 사진을 바라보다 결국 ‘정말 예쁜데, 잡으면 잡힐 듯한데. 안되겠다. 나도 이것을 갖고야 말겠어!’라는 소유욕을 느끼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정도 사고 과정을 경험하고 나면, 상품을 손에 얻기 위해서 백화점으로 달려가거나 모바일 쇼핑몰에서 순식간에 결제를 하고 만다. 그러나 내 경우 내가 매혹을 느꼈던 대상들은 곧바로 내가 바로 구매할 정도로 가격이 만만하지 않았다. 나는 아쉬운 대로 사진을 옷장에 붙여놓을 수밖에 없었다.


과거의 나는 쇼핑하며 늘 같은 것을 경험했다. 물건을 가질 때까지는 그 물건을 꼭 가져야 할 것 같았지만(그래서 결제 승인이 나는 순간은 그렇게 짜릿할 수가 없었다), 막상 손에 넣고 집에 와서 일주일만 지나면 허탈해했다. ‘내가 대체 이걸 왜 가지려고 했지? 이 별거 아닌 것을’


내가 물건을 사 와서 손에 넣는 그 순간, 내가 갖고 싶던(wish) 상품이 갖던 아우라는 완전히 소멸된다. 그제야 난 그 물건이 나에게 필요(need)였는지 단지 욕망(want)이었는지를 따져보았던 것이다. 아우라가 파괴되고 나서야 이성을 찾고, 그 물건이 필요해서 구입했는지 단지 매혹되어서 구입했던 건지 생각하게 됐었다고나 할까.


그런데 흥미롭게도 나는 옷장에 나를 매혹시킨 상품의 사진을 붙여놓음으로써 그 물건이 가진 아우라를 파괴하는 경험을 했다. 잡지를 넘기면서 볼 때와 내가 매혹된 물건이 존재하는 그 페이지를 오려서 내 옷장에 붙여두는 행위는 이상하게 달랐다.


난 옷장에 붙이고 나서 언젠가부턴 그 물건이 ‘내 것’이 되었다는 착각을 하며 지냈고, 그러면서 나는 점점 ‘저게 과연 나에게 필요할까?’ ‘지금도 저 샤넬 백은 나를 매혹시키나?’를 끊임없이 자문했던 것 같다. 그렇게 핑크 샤넬 백을 자연스럽게 마음에서 비우게 되어 옷장에서도 사진을 떼어냈고 얼마 안 가 검은색 샤넬 백도 가벼운 마음으로 팔아버릴 수 있었다.


반면 화이트 셔츠 드레스는 지금도 나를 매혹시킨다. 디테일 가득한 원피스 드레스를 입던 시절이었는데, 어느 날 잡지에서 본 헐렁한 화이트 셔츠 드레스 사진에 나도 모르게 끌렸다. 옷장 안에 붙여놓고 사진을 계속 보게 되다 보니, 애써 꾸미지 않은 쿨한 멋을 낼 수 있는 아이템이라 아무리 보아도 질리지 않았다.



화이트 셔츠 드레스 사진을 붙여놓고 내가 생각해본 점이 또 있었다. 나는 화이트 셔츠 드레스를 옷장 속의 어떤 옷과 매치시킬 수 있을지 지속적으로 생각했다. 그러다 보니 박시한 아이보리색 니트와도 어울리고, 블랙 가죽 보머와도 어울리며, 네이비 롱 베스트와도 어울린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화이트 셔츠 드레스 사진을 계속 바라보며 중요한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화이트 셔츠 드레스가 나의 라이프 스타일이나 내 정체성에 맞는 걸까?’ 지금 생각해 봐도 조용한 걸 좋아하고, 틀에 얽매이는 걸 싫어하는 보헤미안 같은 내게 화이트 셔츠 드레스는 꼭 맞는 아이템이다.


지금도 난 잡지에서 너무도 나를 매혹시키는 어떤 물건을 발견하면 주저 없이 스마트폰으로 찍어서 저장해두거나 스크랩해서 옷장 문 안쪽에 붙여둔다. 그러면 옷장 속 아이템 중 무엇과 매치시킬지, 그것을 대체할 수 있는 대체재는 내 옷장에 없는지, 내가 원래 가지고 있던 비슷한 아이템은 내가 매혹을 느낀 그것으로 업그레이드가 필요한 건지 이성적으로 판단하기가 쉬워지니까.


나의 위시리스트를 관리하는 법이 생각보다 고통스럽진 않았다. 갖고 싶은 물건 사진을 옷장에 붙이는 것은 내 욕망에 죄책감을 부여하지 않으면서도 이성적으로 판단하게 되는, 즐겁고도 고마운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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