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 입기에서 소통을 아는 사람
언젠가부터 음악이 경쟁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음악을 접하게 되는 현장은 얼마나 빠른 시간 내에 청각을 자극하느냐 그리고 시각까지도 점령해버리느냐의 각축장이 되어버린 것 같다.
몇 해 전 어느 날 한 지인이 내게 물어왔다. 주말마다 방영하는 가수들의 경연 프로그램을 보느냐고. 아니라고 답하자 돌아오는 대답. 그분은 주말마다 폭발적인 가창력의 가수들을 보는 즐거움이 그렇게 크단다.
폭발적인 가창력으로 관객을 ‘압도’하는 것을 보여주는 게 그 방송의 취지에 맞을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내 개인적으로 ‘압도’의 음악은 좋은 음악과는 거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보기에 그 무대는 기인열전의 가수 버전 같아 보이니까.
이런 생각 때문에 나는 내게 질문을 해온 지인에게 이렇게 답했다.
“저는 너무 노래 잘하는 가수들을 좋아하지 않아요.”
그러자 그분께서 의아해하시며 묻는다. 그럼 대체 어떤 가수를 좋아하느냐고. 가수의 어떤 점이 좋을 때 그 가수를 좋아하느냐고.
그러고 보니 나는 노래만 하는 가수를 좋아한 적이 없다. 그보다는 자신이 만든 노래를 부르는 아티스트를 좋아한다고 표현하는 게 더 정확한 것 같다. 나는 그분에게 이렇게 답했다.
“감성이에요”
내 말에 선뜻 동의하지 못한 걸 보니 그분은 내 말의 의미를 이해하시지 못한 듯했다. 이런 나의 취향과는 별개로, 대중음악 산업 자체가 순위를 매기고 경쟁을 유도하다 보니 대중음악은 전반적으로 요란해졌다. 폭발적인 가창력, 강한 비트, 과감한 메이크업, 이슈가 될 법한 퍼포먼스, 화려한 의상, 중독성 있는 후렴구. 이런 장치들로 짧게는 1분, 길게는 3분 안에 사람들을 홀려야 한다.
그러다 보니 음악은 들려주고 음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랑하고 감탄해야 하는 그 무엇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음악은 요란해졌지만, 음악으로 이루어지는 소통의 깊이와 폭은 축소되어 버린 듯한 인상이다.
나는 브라질 음악, 그중에서도 보사노바를 좋아한다. 2000년, 내가 운전면허를 따던 무렵, 라디오 방송 <윤상의 음악 살롱>에서 처음으로 듣게 된 라틴음악에 나는 신선함을 느꼈다. 감사하게도 그 후 방송에서 소개된 음악을 엄선하여 <윤상의 월드 뮤직>이란 음반이 발매되었다. 이 음반에는 브라질 음악이 소개되어 있다.
나는 음반 발매를 반기며 잽싸게 음반을 구입해 놓고도 처음에는 브라질 음악의 생소함에 적응이 되지 않아 음반을 방치했다. 그러다 몇 년이 지나 우연히 음반을 다시 꺼내 다시 들어보니 보물도 이런 보물이 없다. 이 음반이 시작이 되어 나는 좋아하는 아티스트를 하나둘 늘려가며 라틴음악을 즐기게 되었다.
그러던 중 나는 라틴음악에 대한 이런저런 궁금증을 해결하고 싶어 책 한 권을 구입했다. 『라틴소울』(박창학, 2009). 윤상 씨의 고등학교 동창이자 윤상 씨의 음악에 노랫말을 입혀오셨던 작사가 박창학 씨가 이 책의 저자이다.
알고 보니 2000년에 라디오에서 내가 라틴음악을 듣게 된 것도 다 박창학 씨 덕분이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라틴음악에 대한 나의 궁금증 해결에 대해 감사하기 앞서 그분의 남다른 음악적 취향에 먼저 감사하게 되었다.
이름도 모르던 매력적인 남자를 본격적으로 알기 시작하는 설레는 맘으로 책을 읽었다. 특히 음악으로만 친숙했던 보사노바의 거장 조앙 질베르토의 스토리가 흥미진진하게 소개되어 개인적으로 어찌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조앙 질베르토는 기타 연주도 출중하고, 목소리도 정말 매력적인 아티스트이다. 나는 그의 노래를 처음 들었을 때 이렇게 느꼈다.
‘남자다운 굵은 목소리도 아닌데, 게다가 포르투갈어를 내가 알아듣지도 못하는데, 내 귀에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가 어쩜 이리 섹시할까’
책을 읽으며 내가 알아낸 바에 따르면, 조앙의 목소리가 내게 그리도 매력적이었던 이유는 그의 목소리가 기타와 미묘한 엇박자 리듬을 이루며 완벽한 조화를 이뤘기 때문이었다. 듣는 사람이 그의 음악으로부터 느슨함을 느끼는 것과는 달리 그의 음악은 치밀하게 계산된 결과였다.
그는 몇 날 며칠이고 바깥출입을 삼간 채 욕실에 앉아 욕실의 파란색 타일이 주는 울림을 온몸으로 느껴가며 기타를 쳤고, 그 기타 연주에 밀리미터 단위까지 계산된 완벽한 리듬을 표현해줄 가사를 더하여 음악을 만들어 갔다. 조앙은 자신의 음악 세계 안에서 완벽을 추구하는 음악가였던 것이다. 조앙의 음악에는 시간이 멈춰버린 듯한 유토피아적인 힘이 있다고 한다.
나 역시 조앙을 음악으로만 접했을 때 이미 그 비슷한 것을 경험했기에 이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래서 (책에서 생생하게 소개된) 2003년 조앙 질베르토의 일본 콘서트 현장에 있었다던 그 모든 사람이 정말 부러웠다. 그는 큰 무대에 홀연히 나타나 기타 한 대로 4시간을 꽉 채웠다고 한다.
일본 콘서트 후기에서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관객과 아티스트의 교감이었다. 모든 관객은 그의 한 음 한 음에 집중하며 그와 함께 호흡했다. 그뿐만 아니라 조앙 역시 관객과 그가 음악으로 하나가 되는 그 감동이 너무 컸던 나머지 콘서트 도중 20여 분간 그대로 얼어붙어 명상 상태에 잠겨버렸다고 한다.
보사노바의 거장 조앙 질베르토는 결코 현란한 음악으로 듣는 이를 ‘압도’하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느슨하게 연주하고 부름으로써 듣는 사람과 음악으로 하나가 되고 진심으로 소통하려 했다.
시즌마다 파리, 밀라노, 런던, 뉴욕에선 디자이너 브랜드의 컬렉션이 소개되는 패션 위크 기간이 있다.
흥미로운 건 언젠가부터 그 패션 위크의 공식적인 쇼에 대한 관심이 그 주위를 배회하는(일부는 쇼에 입장하는) 여성들에게로 옮겨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녀들을 찍기 위한 전문 포토그래퍼의 수도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물론 카메라 셔터를 전혀 의식하지 않고 분주히 쇼에 출입하는 관계자나 관람자들도 있지만, 상당수는 카메라에 찍히기 위해서 옷을 입고 그 주위를 배회한다. 카메라에 찍히는 것이 그녀들의 낙이라면 별로 할 말은 없지만, 그녀들의 패션이 점차 우리의 시각을 더 강하게 자극하고, 보는 이를 ‘압도’하는 것이 되어버리는 듯한 인상은 부인하기 어렵다.
순전히 내 개인적인 견해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패션 위크 기간 동안, 찍히기 위한 패션 피플의 옷차림은 기인열전의 패피(패션 피플, fashion people) 버전 같기만 하다. 더 많은 카메라에 찍히고 더 많은 곳에 자신의 사진을 유포시키기 위해 더 세고, 더 튀는 거로 시선을 압도하려고 애쓰는 것 같아서이다.
이런 점에서 대중음악과 패션은 닮아있다. 그런데 음악과 패션의 한 가지 다른 점이 보인다. 우리를 압도하는 음악은 우리들 대부분에게 ‘감상자’로서의 정체성에 머무르게 하지만(물론, 노래방에서 그것을 모사하는 사람들도 있긴 하다), 우리를 압도하는 패션은 우리들 대부분이 ‘감상자’로 만족하지 않게 한다.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들려주는’ 음악은 어쩌다 한 번의 이벤트로 존재하지만, 인스타그램의 #데일리룩, #ootd(outfit of the day)와 함께 ‘보여주는’ 패션은 매일의 일상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우리는 ‘감상자’로서 압도되었던 패션을 나도 모르게 입고 싶어 하고, 사진 속 그녀들의 우월한 표정으로 일상을 살아가고 싶어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압도’로 다가오는 음악은 내게 깊은 감동을 준 적도 없고 그 잔향이 오래간 적도 없다. ‘들어봐, 내가 이렇게 잘할 줄 몰랐지?’라는 깜짝 쇼 같은 음악은 두 번 들을 때부턴 이미 경외감이 시들해 버리기 마련이다.
반면 내가 자꾸만 꺼내서 듣게 되는 음악은 듣는 사람에게 ‘소통’을 청유하는 음악이다. ‘나는 이런 걸 느낀다. 당신이 나와 같은 걸 느낀다면, 난 이 감성을 당신과 함께하고 싶다’라는. 그래서 애써 잘 부르려고 하지 않는 보사노바의 느슨함에 내가 끌리는 건지도 모른다.
하루하루 제로섬 게임 같은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가 옷차림 역시 경쟁의 논리로 접근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건지도 모르겠다.
부끄러운 과거지사이긴 하지만, 나는 꽤 오랫동안 사람들을 ‘압도’ 하기 위해서 옷을 입어왔다. 내게 ‘패셔너블함 = 요란함’이었다. 나는 사람들의 순간적인 시선을 즐겼다. 그러나 그 시선 이후 정작 나에게 남은 건 두 번 입고 못 입을 옷, 그리고 더 센 옷을 사야 한다는 강박관념뿐이었다.
몇 년의 시간이 지나, 나는 누군가의 시선을 받기 위해 입었던 옷들을 모두 옷장에서 쫓아냈다. 그 옷들을 버리기 위해 다시 꺼내었을 때 나를 바라보던 사람들의 시선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돌아보니 그들은 나를 신기해할 뿐 나에게 다가오지 않았다. 그리고 또 나는 나를 그렇게 바라봤던 누구와도 진정한 대화를 나눈 적이 없었다. 나는 외로웠다.
조앙의 음악을 다시 틀어본다. 기타 한 대의 소박한 편곡, 그러나 특유의 엇박자 리듬 때문인지 결코 촌스럽지 않다. 1960년대에 만들어진 그의 음악은 내가 그의 음악을 처음 접했던 10년 전에도, 그리고 지금도 내 볼을 발그레하게 물들인다.
내게 조앙의 음악이 언제나 듣고 싶은 음악이었던 이유는 기타 한 대의 소박한 편곡이 내게 음악을 음미할 여지를 허용하는 기다림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며, 자기만의 감성을 담아낸 엇박자 리듬은 그만의 위트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나는 ‘소통’을 청유하는 음악이 그렇듯 자꾸 만나고 싶은 사람이 되고 싶다. 내가 자꾸 만나고 싶은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떠올려 보니, 내게 그런 사람은 듣고 싶은 말도, 하고 싶은 말도 많은 사람이다. 내겐 그런 사람이 ‘말 잘하는 사람’이다.
나에게 ‘말 잘하는 사람’이란, 현란한 지식으로 ‘날 봐. 나 똑똑하지?’라는 우월함을 유창하게 표현하는 기 센 사람이 아니다. 그런 사람을 다시 만나고 싶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만나고 싶은 사람이 ‘네’만 반복하며 자기 존재감을 숨기는 사람도 아니다.
나에게 ‘말 잘하는 사람’이란, 어색하지 않은 침묵으로 상대방이 생각할 여지를 허용하는 기다림을 아는 사람이며, 경험과 방황을 거친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지혜와 감성으로 대화의 맥락에 맞게 자기 세계를 위트 있게 풀어낼 줄 아는 사람이다.
나의 옷 입기는 무엇이 문제였을까. 매일매일의 일상을 살아가는 난 옷으로 나를 표현한다. 그러나 자기표현의 궁극적 목적은 내가 만나는 사람들과의 소통이다. 내 문제는 옷 입기에서 소통의 맥락까지 고려하지 못한 지혜의 부족이었다.
그렇다면 내게 ‘옷 잘 입는 사람’이란, ‘말 잘하는 사람’이 그러하듯, 옷으로 표현된 그 사람의 세계가 궁금하고, 그리고 그 사람을 바라보는 나도 내 세계를 보여주고픈 욕구를 유발하는 사람이다.
현란한 디테일이 가득한 옷 입기를 반복했던 난 현란한 화술로 유창함을 뽐내는 사람과 다를 바 없었다. 나는 패셔너블한 사람, ‘옷 잘 입는 사람’이 되고 싶었으나 나는 결코 ‘옷 잘 입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압도’하는 옷 입기를 피하기 위해 무난한 옷만 고수하고 싶지는 않다. 그런 태도는 상대방과의 대화에서 ‘네’만 반복하겠다는 태도와 다를 바 없어 보인다.
나에게 ‘옷 잘 입는 사람’이란, 디테일 없는 화이트 티셔츠의 여백과 살짝 걷은 셔츠 소매의 흐트러짐을 입음으로써 보는 이에게 내 세계를 음미할 여지를 허용할 줄 아는 사람이며, 실수와 방황을 거쳐 얻은 자기만의 감각으로 만남의 맥락에 맞는 스타일을 위트 있게 풀어낼 줄 아는 사람이다.
조앙의 음악은 느슨하지만 완벽했다. 조앙의 음악이 갖는 시대를 초월한 유토피아적인 힘은, 자기만의 음악 세계를 완성하고자 하는 고독함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 시간은 고립된 시간이었지만, 결국, 소통을 위한 시간이기도 했다.
조앙의 음악이 갖는 힘의 근원을 떠올리고 나니, 만나고 싶은 사람, ‘말 잘하는 사람’이 갖는 힘 역시 혼자만의 시간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철저히 혼자가 되어서, 보고 듣고 읽고 살아내고 아파하며 만들어 낸 자기 세계가 소박하고 아름다울수록, 타인이 방문하고 싶은 세계를 가진 사람, 그래서 외롭지 않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나는 패셔너블한 사람이 되고 싶었고 백화점 점원들이 예쁘다고 부추기면 옷을 샀다. 내 세계를 보여주고 타인에게 내 세계를 방문할 여지를 허용하는 맥락은 생각하지 않았다. 디테일로 꽉 찬 옷을 입은 난 외로울 수밖에 없었다.
이제 나는 안다. 만나고 싶은 사람이 되려면, 그리고 보사노바의 느슨함을 입고자 한다면, 조앙처럼 철저히 혼자가 되어 자신의 소리가 만들어내는 울림을 느끼며 자기 음악을 만들어내는 노력과 훈련이 옷 입기에서도 필요함을.
지금 나는 내 스타일을 완성하며 누구의 조언도 듣지 않는다. 쇼핑은 당연히 혼자 하며, 점원의 말과 브랜드 인지도, 그리고 트렌드는 참고사항일 뿐이다.
디테일 하나 없어도 멋진 토털룩을 감상한 후, 틈만 나면 옷장을 열고 내 얼굴, 내 몸, 내 정체성에 맞게 다양한 룩을 만들어보고 사진을 찍어 본다. 누군가의 의견을 묻기보단 혼자서 그 사진을 분석한다.
조앙이 욕실에서 엇박자 연주가 주는 묘한 아름다움을 발견했듯, 나는 옷 방에서 디테일 없는 옷들을 꺼내어 핏, 길이, 소재의 대비가 만들어내는 의외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려고 한다.
이 시간은 옷 방에서 갖는 고립된 시간이지만 결국, 소통을 위한 시간이기도 하다. 소통을 위한 옷 입기를 위해선 혼자만의 스타일링에 시간을 할애해야 함을 예전의 나는 전혀 몰랐다.
이런 시간을 가지며 내가 발견해낸 가장 큰 수확은 디테일이 센 옷 하나가 주는 효과보다 디테일 없는 소박하고 느슨한 옷과 긴장감 있는 옷의 대비가 만들어내는 엇박자 시너지가 훨씬 더 크다는 것이었다. 먼 길을 돌아온 내겐 이런 것이 느슨하지만 완벽한 스타일링이다.
이 과정을 거친 내가 나만의 느슨함을 입기 시작하자, 믿기 힘든 일이 조금씩 벌어지기 시작했다. 내가 요란한 아이템을 걸치고 있을 때보다 누군가 내게, 다름 아닌 옷 얘길 하며 먼저 말을 걸어올 때가 더 많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디테일 없는 아이템으로 표현된 나의 재치를 즐거워하고, 나의 센스를 알고 싶어 하며, 궁극적으로는 내 세계를 궁금해한다.
“사실 이 옷 5만 원짜리예요”
그럼 나는 기꺼이 나의 센스를 꺼내어 보이기 시작한다. 상대방 역시 자신의 세계를 보여줄 여유를 점차적으로 갖게 됨은 물론이다.
‘옷 잘 입는 사람’이란 소통을 아는 사람이다. 적어도 지금까지 내가 살아오는 동안에 내가 배운 바로는 그렇다. 자극적인 무엇으로 ‘날 봐’라고 자랑하는 순간 벌어지는 우월함의 시선과 감탄의 시선 교환. 그 교환은 피상적이며 일회적이다.
반면 현란한 화술로 자신의 유창함을 자랑하지도 않고 화려한 옷차림으로 시각을 압도하지도 않지만, 경험과 방황을 거친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생각과 감성의 소통. 그 소통의 울림은 깊고 지속적이다.
누군가를 압도해서 한 발 뒤로 물러나도록 하는 스타일링이 아니라, 함께 있는 그 순간이 좋아 그 기류를 음미하고 싶어 지는 스타일링. 치밀하게 계산되었으나 보는 이를 긴장시키지 않는 스타일링.
나사 하나 빠진 듯한 보사노바의 여유로움을 표현하는 스타일링. 패셔너블함을 추구하면서도 고독하지 않을 수 있는 스타일링.
그게 내가 진짜 추구하는 스타일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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