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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유리 Jun 18. 2021

나는 쇼핑중독자였다



1. 쇼핑중독, 왜 그랬을까.


어릴 때부터 난 옷이 좋았다. ‘커서 뭐가 되고 싶냐’는 질문에 다양한 답을 했지만, 마음속으론 늘 같은 답을 했다. 옷 잘 입는 사람이었다. 중학교 때 내 일기장에는 쇼윈도에서 본 멋진 옷을 향한 욕망과 그 옷을 안 사주는 엄마를 향한 불만이 가득하다. 매일 다른 옷을 입은 나를 그려본 서툰 그림도 있다. 


나에게 성인이 된다는 건 ‘옷 잘 입는 사람’이 되어도 된다는 걸 의미했다. 돈을 제대로 벌기 시작한 스물다섯 살 때부터 쇼핑은 내 일상이 되었다. 퇴근 후 별일 없으면 백화점이나 이태원 시장으로 향했다. 필요한 게 있어서가 아니다. 목적 없는 쇼핑이 목적이었다. 


독특한 칼라의 벨벳 재킷, 매끄러운 촉감의 알파카 코트, 하늘하늘 쉬폰 원피스. 거울 속 새로운 나를 만날 때마다 황홀했다. 백화점에선 옷을 향한 사랑을 드러낼수록, 철없는 애가 아닌 안목 있는 ‘고객님’이 되었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내 돈으로 옷을 사는 기쁨이 그런 거라니.


그러나 기쁨은 한 순간이었다. 옷장은 두 번 입기 힘든 옷들로 꽉 찼고, 월급은 카드 값이 되어 빠져 나갔다. 허탈했다. 그럼 다시 옷을 샀다. 내 외양에 화려함을 더하면 새로운 내가 되고, 내면의 공허함은 채워질 거라 믿었다. 멈출 수가 없었다. 내게 옷은 솜사탕이었다. 배부름은 줄 수 없어도 배고픔을 달랠 만큼의 달콤함은 줄 수 있는 것.


몇 년이 지났다. 새 옷을 사도 더 걸 곳이 없었다. 옷장 정리를 해야 했다. 옷장을 열자 인정하기 싫은 내가 거기 있었다. 곰팡이가 핀 채 걸려있던 벨벳 재킷. 옷장 바닥에 떨어진 채 먼지와 하나가 된 꽃무늬 원피스. 모두 큰 가방에 담아 헌옷 수거함 앞으로 갔다. 하나씩 꺼내어 녹슨 철제 박스에 넣었다. 시웅 탁. 시웅 탁. 나를 황홀케 했던 옷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마음이 서늘해졌다.


‘물건을 사도 행복하지 않았구나’ 

‘이 많은 옷을 사는 동안, 난 뭘 한 걸까.’


어린 아이들은 때로 감당하기 벅찬 상황에 이유 없이 노출된다. 난데없이 길에서 뺨을 맞기도 하고, 예상치 않은 순간 모욕적인 말을 듣기도 한다. 잠시의 접촉과 소리지만, 그건 긴 상처로 남는다. 어른이 되어도 상처는 사라지지 않는다. 때로 그 상처는 무언가를 향한 집착과 과잉으로 바뀌어 있다. 


엄마는 맏며느리였다. 신경이 예민하고 허약한 엄마에게 둘째인 난 그저 짐이었다. 난 어떤 투정도 다 받아주는 엄마의 애정이 고팠고, 어떤 질문에도 답해주는 엄마의 위트에 목말랐다. 내가 안아 달라고 징징거릴 때마다 엄마는 육중한 삶이 준 피로를 이렇게 표현했다. 


“저리 가.”


엄마는 늘 겨우 두 살 위인 언니에게 동생을 챙기라고 말했다. 아무 것도 모르던 내가 기댈 사람은 언니밖에 없었다. 언니 없는 세상은 상상하기도 싫어 다섯 살 땐 언니 유치원까지 따라갔다. 그러나 엄마에게 받아본 적 없는 사랑을 언니라고 줄 수는 없었다. 언니도 엄마와 같은 말을 했다.  


“저리 가.”


나는 서서히 엄마와 언니를 향한 마음을 닫아갔다. 그럼에도 내 마음 한편엔 어떤 공포가 있었다. 거부당할지도 모른다는 공포였다. 


나는 엄마에게 거의 매일 혼이 났다. 상황은 달랐지만 이유는 같았다. 멍청해서였다. 난 그 말이 사실이라 믿었다. 엄마 맘에 들기 위해서는 똑똑한 아이가 되어야 했다. 다행히 나는 책이 좋았고, 생각하는 게 좋았다. 내가 중3 때부터 엄마는 내 성적을 예뻐하기 시작했다. 기뻤다. 있는 그대로로 받는 사랑이 아니어도 괜찮았다. 


대학에 진학하며 상경했을 때, 엄마는 내 일거수일투족을 알고 싶어 했다. 그러나 나는 엄마에게 거의 전화하지 않았다. 엄마의 서운함을 알면서도 외면했다. 나는 두려웠다. 내 대학생활과 내 남자친구가 엄마 맘에 들지 않을까봐. 20대가 다 지나고 나이를 먹을 만큼 먹어도 나는 늘 엄마 눈치를 봤다.


‘엄마가 안 싫어할까?’


인생의 중요한 선택의 순간마다 내가 던진 질문이다. ‘내가 행복할까?’ 이건 내 질문이 아니었다. 쓸모없는 아이였던 난 가치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고 싶었다. 내 전공으로 연구하는 삶이 나와 맞지 않더라도, 박사 학위를 받고 교수가 되어야 했다. 


그런데 언니는 나와 달랐다. 전업주부가 되었어도 언니는 엄마 눈치를 보지 않았다. 언니는 엄마에게 굴복하면 언젠가 반드시 질식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발레, 서예, 미술, 수영, 피아노, 첼로, 영어... 배움의 즐거움을 맛보기도 전에 사교육 뺑뺑이에 질린 언니는 겨우 열두 살 때 이런 충동을 느꼈다.


‘여기서 뛰어내리면 다 끝나겠지.’


언니에겐 엄마에게 버림받는 공포보다 자기 삶을 살지 못할 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먼저였다. 성장 과정에서 언니는 중요한 선택의 순간 마다 엄마와 투쟁했다. 지친 엄마는 언니를 포기했다. 엄마의 모든 기대는 나에게 집중됐다. 


난 늘 언니처럼 될까봐 두려웠다. 그러나 언니는 현명했다. 언니는 오래 전에 자유를 쟁취했던 거다. 난 엄마 사랑을 독차지한다 믿으며 원치 않는 삶을 살았다. 30대를 거의 다 보내었을 무렵, 헤어날 수 없는 늪에 빠져있었다. 우울증이었다. 엄마는 그런 나를 철저히 외면했다. 그건 내가 모자라서 생긴 일일 뿐이었다.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다. 사람이 하루 세 시간이나 울 수 있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논문 작업을 위한 등굣길 차 안 운전석에선 한 시간 내내 울었고, 학교에 도착하고도 눈물이 멎지 않아 내릴 수 없었다. 고속도로를 달리던 어느 날은 이런 충동을 느꼈다.


‘여기서 핸들만 꺾으면 다 끝나겠지.’


학교 앞 정신과에 찾아갔다. 약이라도 먹어야 살 것 같았다. 약만 받으러 간 그 곳에서 500문항 검사지를 받았다. 검사 결과, 나는 불안에 짓눌려 있었다. ‘엄마의 계획대로 못 살면 어떡하나’ ‘엄마를 실망시키면 어떡하나’ 내 얘길 들은 의사는 모니터에 눈을 고정시킨 채 로봇처럼 한 마디를 던졌다.


“어머니의 그늘에서 벗어나셔야겠네요.”


그 순간 깨달았다. ‘엄마가 안 싫어할까?’ 그건 내가 당장 그만둬야 하는 질문이란 걸.




2. 옷을 산 건 굶주린 나



“최유리 씨는 왜 옷을 좋아하죠?” 

머리가 하얘졌다. 뭐라고 답해야 하나. 질문이 이어졌다.

“최유리 씨에게 옷은 뭔가요?”


학교 앞 정신과 의사의 권유로 정신분석이라는 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새 선생님은 지나가는 내 말과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내가 늘 신경 꽤나 쓴 차림으로 나타나는 걸 눈여겨보고 있었다. 오랜 대학원 생활과 강의 경험으로 막힘없이 답하는 것이 훈련되어 있던 나였다. 그런데 웬일. 이 질문에는 답을 못했다.


옷은 그냥 내가 좋아하는 거다. 이유가 없다. 기본값이다. TV를 틀면 패션채널만 봤고, 패션 잡지가 보이면 잡고 앉아 넘겼다. 답 대신 그간의 얘길 풀어놓으며 나도 모르게 선생님 눈치를 봤다. 몰래 한 나쁜 짓이 들키기라도 한 듯. 선생님 눈을 똑바로 보지도 못했다. 나는 늘 쇼핑백과 택배 상자를 숨기기 바빴다. 게다가 난 옷이 예쁘다는 칭찬을 들으면 부끄러워 고개를 못 들었다. 내게 옷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확실해 졌다. 


“아... 전 제가 옷을 좋아한다는 게 항상 수치스러웠어요.” 

“최유리 씨는 왜 옷에서 수치심을 느꼈을까요?”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릴 때 일이다. 나는 한겨울에 치마가 입고 싶다고 고집을 부리다 엄마에게 혼이 났다. 화가 난 엄마는 나를 발가벗겨 베란다로 쫓아냈다. 조금 더 컸을 땐 언니가 입던 옷이 싫어서 새 옷을 사달라고 졸랐다. 그럼 엄마는 이렇게 말했다.


“벗겨놨니? 왜 맨날 옷 타령이야?”


나는 옷을 좋아하는 나를 부인해야 했다. 옷을 향한 사랑은 수치심과 엉켜 붙은 채 내 무의식을 지배했다. 

“저리 가”의 결핍과 “벗겨놨니?”의 수치심. 그 상처는 옷을 향한 집착과 과잉으로 남았다. 옷을 산 건 사랑에 굶주린 나였다. 쇼핑중독이 절정일 무렵, 사진 속 나는 웃고 있다. 그러나 마음속 나는 울고 있었다.


“저리 가”와 “벗겨놨니?”에 아무 저항도 못한 채 울고 있던 나. 난 그 아이를 달래는 법을 몰랐다. 우는 아이에게 솜사탕을 건네듯, 요란한 꽃무늬 옷을 안겨주면 울음을 그칠 거라 믿었나 보다. 불행히도 그 아이의 얘길 들어주는 사람은 없었다. 


옷을 향한 수치심을 제대로 직시하고,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됐다. 옷을 향한 마음은 수치심의 대상이 아니어도 된다는 거다. 아무리 내 엄마라도, 옷을 사랑하는 내 마음을 쓸모없는 것이라 말할 자격은 없었다. 눈물을 뚝뚝 흘리며 수첩을 펼쳤다. 


“최유리, 쇼핑중독은 니 잘못이 아니었어. 내가 너 사랑해. 내가 너를 거기서 꼭 꺼내줄게.”


타인의 사랑이 필요한 게 아니었다. 내게 필요한 건 나를 향한 나의 사랑이었다. 내 인생을 살고 싶었다. 그러나 여전히 나는 나를 몰랐다. 나에 대해서 생각할 기회가 없었다. 지독한 입시를 치르고 대학에 가고, 다음 단계와 그 다음 단계로 올라가기만 했다. 그러다 돈을 벌기 시작한 거다. 거기서 소비주의의 신이 환한 미소로 날 기다리고 있었다. 행복은 쇼핑몰에 있다고. 그러나 옷은 솜사탕처럼 굶주림을 채워주진 못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옷을 좋아하나. 내 진짜 욕망은 뭔가. 뭘 하면 행복할까. 알고 싶었다. 논문 쓰기가 멈춤 상태인 건 비밀로 한 채, 생각 없이 하고 싶은 걸 해보기로 했다. 그때 친구가 책 쓰기를 권했다. 최유리는 글을 잘 쓴다고. 최유리 머릿속이 제일 재밌다고. 


내가 무슨 책을 쓰나 싶었다. 근데 쓰고도 싶었다. 난 누가 시키지 않아도 틈틈이 뭔가를 썼다. 블로그에 영화 리뷰를 남기기도 하고 별 것 아닌 일상을 기록하기도 했다. 한 번도 입 밖에 내지 않았던 멋진 문장이 절로 나오기도 했다. 책 쓰기까지는 모르겠고 뭐든 써보자 싶었다. 그렇게 시작한 글은 징징거림, 아무 말 대잔치였다. 그래도 좋았다. 모두가 나를 외면한 그때, 글쓰기는 내 유일한 숨통이었다.


그러다 괜찮은 글 한 편을 썼다. 그 글을 시작으로 뭔가에 홀린 듯 쓰고 또 썼다. 평소 머릿속을 떠돌던 생각에 나만의 섬세함을 입힌 글. 그간 공부한 걸 맘대로 버무려 펼쳐낸 글. 화려한 옷을 입지 않아도 아름다움을 누릴 수 있음을 그때 처음 알았다. 


글을 쓰며 나를 만났다. 쇼핑중독자 뒤에서 조용히 기다려 온 진짜 나. 아름다움을 선망하는 사람.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길 즐거워하는 사람. 그게 나였다. 어릴 때 엄마를 졸라서 다닌 유일한 학원이 미술학원이었다. 늘 예쁜 옷이 입고 싶었던 건 낭비벽이 있어서가 아니라 아름다운 것에 끌렸기 때문이다. 전학 간 친구들에게 편지를 쓰던 나도 있었다. 돌아보면, 그때 난 편지를 쓰고 싶었던 게 아니다. 나를 표현하고 싶었던 거다. 


글이 한 편 한 편 완성될 때마다 살아있음을 느꼈다. 그건 비싼 옷을 입고 느낀 달콤함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글쓰기는 마음의 굶주림을 채워줬다. 그걸 평생 누리고 싶었다. 박사 대신 작가가 되기로 했다.


“뭐 어때? 이게 난데. 내 인생 내 건데.” 평생 움츠린 채였던 어깨를 펼 수 있었다. 멋진 옷을 봐도 전처럼 설레지 않았다. 엄마는 항상 내가 문제라고 말했다. 처음부터 난 문제가 없었다. 난 나를 모를 뿐이었다. 여전히 옷이 좋다. 그러나 그때만큼은 아니다. 


우울증에서 나를 꺼내준다는 약속을 지키기까지, 1년이 걸렸다. 내 안의 어린아이를 꼭 안아줬다. 눈물이 멈출 때까지 그 아이와 함께 울었다. 화려한 옷에 넋을 잃었던 그 아이가 난 부끄럽지 않다. 그 아이가 있었기에 이 이야기를 하는 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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