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몰랐던 옷 입기 스킬
1. 패션으로 힐링, 어렵다
몇 년 전, 서점에서 낯선 풍경을 목격했다. 베스트셀러 2위가 컬러링 북이라니. ‘이게 왜?’ 한 권을 집어 들었다. 표지를 장식한 문구 중 하나가 나의 의문을 약간은 덜어 주었다.
‘힐링’
한 장씩 넘겨보며 컬러링 북의 힐링 포인트를 가늠해 보았다. ‘스마트폰에서 벗어나 온전한 침묵을 누리게 해 주겠네.’ ‘뭔가를 산출해 낸다는 점이 힐링의 출발이 될 수는 있겠네.’
그러나 컬러링 북의 치유력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다. 몇 주 후 한 권을 샀다. 색연필도 준비했다. 핸드백 밑그림이 있는 페이지에서 시작해보기로 했다. 심호흡을 했다. 욕심났다. ‘나 그래도 어릴 때 미술학원에 다녔었는데.’ 단색 가방을 칠할 때는 데생 기법을, 노란색 퀼팅 백을 칠할 때는 인상파 화풍을 흉내 내 보았다.
한 시간이 지난 후, 나는 컬러링 북에 항복했다. 색연필을 제대로 깎지 않은 채 힘만 쓰다 오렌지색 롱샴백을 망쳐버렸다. 원하던 결과가 나오지 않자, 피로가 급격히 몰려왔다. 나머지를 채울 의욕은 슬그머니 사라졌다. 모든 이에게 컬러링이 힐링은 아닌 것 같았다.
많은 여성들에게 쇼핑몰은 성지와 같다. 나에게도 그랬다. ‘쇼핑은 곧 힐링’ 이라는 이 등식이 어느 정도 공유되어 있는 건 맞다. 그러나 모든 사람에게 그런 건 아니다. ‘쇼핑은 곧 스트레스’가 등식인 사람도 적지 않으니까.
2000년대 중반, 케이블 패션 채널에서 <What not to wear>라는 방송을 즐겨 봤다. 진행자는 영국의 유명 스타일리스트 트리니와 수잔나였다.
옷 입기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 두 명을 선정하고, 변신을 돕는 것이 방송의 내용이었다. 겉보기엔 출연자들이 옷을 좋아하는 것 같아보였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또 그들 중 대부분은 내면의 문제를 풀지 못한 채 옷 뒤에 숨으려 했다.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할까봐 양갈래 머리와 미니스커트 차림을 고수하던 30대 여성, 남들에게 무시당하지 않으려 과장된 가발을 쓰고 짙은 화장을 하던 40대 주부, 자신의 외모는 이미 끝났다며 60대 할머니처럼 입던 40대 연구원...
진행자들이 맨 먼저 하는 작업은 출연자들이 자기 몸을 이해하도록 돕는 것이다. 360도 거울의 방에 들어간 출연자들은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한다. 자기 몸을 보지 못하는 거다. 그러나 진행자들은 그들의 몸이 그리 끔찍하지 않음을 일깨워준다.
“허리가 이렇게 잘록한 거 알고 계셨어요?”
“이렇게 예쁜 가슴을 왜 스웨터 속에 감추고 계셨어요?”
“아름다운 종아리의 소유자군요! 진심 부러워요.”
다음 작업은 트리니와 수잔나가 하루 동안 출연자가 되어 그들의 일상을 체험하는 거다. 출연자들이 누구와 살고, 집에서 무얼 하며, 어떤 교통수단으로 출근하고, 직장에선 누구와 무슨 일을 하는지 알게 된다.
가족과 동료들이 출연자들을 어떻게 바라보는지도 듣는다. 출연자들은 스스로의 생각보다 더 나은 사람인데 정작 본인은 모르고 있었다. 그들이 과장되거나 억제된 옷을 입고 있었던 건 그래서 였다. 가족과 동료들은 진심으로 안타까워했다.
이때 진행자들이 병행하는 작업이 있다. 옷장 뒤엎기. 출연자들의 옷장에는 맞지 않는 속옷, 이상한 가발, 체형에 어울리지 않거나 투머치인 옷이 잔뜩 들어 있다. 대부분의 옷은 쓰레기봉투로 향한다. 집을 비웠다 귀가한 출연자들은 자기 옷을 함부로 버린 두 사람을 향해 분통을 터뜨린다.
한바탕 폭풍우가 지난 후, 본격적인 훈련과 쇼핑이 시작된다. 트리니와 수잔나는 체형과 라이프스타일에 맞는 옷을 고르는 법을 알려준다. 그럼 그 법칙을 지켜 혼자 쇼핑하는 것이 출연자의 미션이다.
나는 이 때가 제일 재밌었다. 출연자들은 말 안 듣는 학생들이다. 대부분은 앞서 들은 전문가 조언은 가볍게 무시한 채, 옷장 속에 차고 넘치던 괴상한 옷을 쥐고 계산대로 향한다. ‘이건 꼭 사야 해!’ 라며.
물론 얼마 가지 않아 트리니와 수잔나에게 들키고 만다. 사려던 옷은 압수당하고 새로운 옷을 건네받는다. 그럼 출연자들은 온 힘을 다해 저항한다. 거기서 그들의 억눌린 자아가 여과 없이 드러나는 거다. 새 옷이 자신에겐 과하다며 한사코 거절하기도 하고, 자신이 루저라며 피팅룸에 주저앉아 엉엉 울기도 한다. 우여곡절 끝에 완벽하게 변신 성공한 출연자들. 눈물을 글썽이며 소감을 말한다.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변신 프로젝트가 끝나고 나면, 일상으로 돌아간 출연자들의 영상이 소개된다. 출연자들은 행복해 보였다. 새로운 스타일을 자기 것으로 소화하고 있음은 물론, 한층 건강한 삶을 누리고 있었다.
내가 보았던 수많은 변신 프로그램 중 <What not to wear>는 베스트였다. 단지 일회성 변신이 아니라 진정한 ‘치유’를 선사했기 때문이다. 멋쟁이 다섯 남성이 진행하는 <퀴어 아이>에서도 같은 관점을 만날 수 있어 반가웠다. 그런데 한 가지가 궁금해졌다. 패션의 힐링 포인트는 어디에 있는 걸까.
그래서 읽은 책이 있다. 알랭 드 보통의 <영혼의 미술관>. 이 책에는 ‘예술이 우리를 어떻게 치유하는가’에 대한 통찰이 담겨 있다. 예술은 7가지 지점에서 치유를 돕는다고 한다.
첫째, 나쁜 기억을 건강한 시각에서 바라보도록 돕고, 둘째, 세상엔 즐거움이 존재한다는 희망을 일깨워주며, 셋째, 슬픔을 고귀하게 받아들이도록 하고, 넷째, 편견에서 벗어나도록 하며, 다섯째,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이해를 돕고, 여섯째, 나의 시각과 경험을 확장하도록 하며, 일곱째, 일상의 소박한 미에 눈뜨게 해준다고 한다.
좋은 책이었다. 그러나 이 관점에서 패션의 힐링 포인트를 곧바로 이해하긴 쉽지 않았다. 내가 <What not to wear> 출연자들만큼이나 패션에서 어려움을 겪었던 점, 또 컬러링북에서 힐링을 누리기도 전에 피로만 경험한 점은 어떻게 봐야 하는 걸까.
한참을 생각한 후에야 이유를 알았다. 저자는 예술을 대하는 우리의 역할을 구분하지 않은 채 우리 대부분을 예술품 ‘감상자’로 보고 있었다. 그것도 작품을 감상할 역량을 충분히 갖춘 애호가로 말이다.
맞다. 우린 예술품을 감상하는 데서 그칠 때가 많다. 컬렉팅 기회가 많지 않아서다. 우린 그저 작가가 작품에 투사한 정신세계와 아름다움에만 관심을 가지면 된다. 맘에 드는 작품 앞에 조금 오래 서 있다 돌아서며 ‘아 힐링 돼!’ 이 정도에서 치유를 경험했다고 해도 별 문제는 없다. 예술에서는.
그러나 옷에서의 치유는 그리 간단치 않다. 우리는 옷을 보고, 사서 모으고, 조합해 입어야 한다. 옷은 우리가 ‘감상자’에 머무를 수 없는 대상이다. ‘감상자’는 물론, 소장 여부를 결정해야 하는 ‘컬렉터’도 되어야 하고, 소장한 작품을 조합하여 창작하는 ‘작가’까지 되어야 한다. 하나라도 피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무엇이 아름다운지, 무엇을 사야할지, 무엇과 무엇을 조합할지, 어떻게 입어야 아름다운지 판단하는 과정. 이건 노동이다. 초보자에게 패션이 힐링이 아닌 고통이 되어 버리는 건 당연한 게 아닐까. 내가 컬러링 북에서 피로만 느낀 것과 <What not to wear> 출연자들이 피팅룸에서 울어버린 것. 그건 힐링에 도달하기까지 필요한 훈련을 감당하기 벅차서였다.
2. 패션으로 힐링하려면
패션으로 힐링하려면, 필요한 건 역량이다. 그러나 그게 전부는 아니다. 20대의 나는 패션 잡지와 패션 채널을 보며 매일 역량을 갈고 닦았다. 옷 잘 입는다는 얘기도 종종 들었다. 멋쟁이가 되면 행복할 줄 알았다. 하지만 난 행복하지 않았다.
<What not to wear>의 출연자들이 진정한 ‘치유’를 경험한 건 단지 옷을 더 잘 입어서가 아니었다. 트리니와 수잔나는 출연자들이 누구인지 알려고 했고 알아냈다. 정체성이 옷으로 표현되었기에 얼굴에서 빛이 난 거다. ‘치유’의 비밀은 나를 입는 것에 있었다.
나는 돈을 벌기 시작하며 많은 옷을 샀다. ‘보다’의 대상에 그쳤던 패션이 ‘입다’의 대상이 되었음을 자축하듯이. 결과는 참담했다. 30대의 대부분을 흘려보냈을 무렵, 극심한 우울증을 만났다. 내 인생 전부를 돌아보던 그 때 옷장 정리를 했다. 옷장에서 내 과거와 만났다. 옷을 사랑하면서도 옷에서 행복을 맛보지 못한 게 부끄러웠다. 그 때 알았다. ‘내가 산 옷들은 진짜 나와 거리가 멀구나.’ 그 많은 옷을 사는 동안 ‘나는 누구인가’를 질문한 적이 없었다. 나는 내가 누구인지 몰랐다.
패션으로 힐링하기. 내가 이걸 터득한 건 안정된 소득이 있었던 시기도 아니고, 트렌드와 브랜드를 줄줄 꿰던 시기도 아니며, 외모가 꽃을 피우던 시기도 아니다. 내가 패션에서 힐링을 맛보기 시작한 건 ‘나는 누구인가’ 묻고 답하던 시기였다.
패션이 ‘보다’의 대상이 아니라 ‘입다’의 대상이 된다면, 패션은 내 일부가 된다. 어쩌면 패션은 겉으로 표현된 내 전부인지도 모른다. ‘입다’ 이전에 자신에 대한 성찰과 사랑이 선행되어야 하는 이유가 이것이다. 예술품을 감상할 때와는 달리, ‘보다’, ‘사다’, ‘입다’의 패션을 대하는 우리는 ‘나는 누구인가’를 외면할 수 없다.
패션으로 힐링하고 싶어서 내가 거쳐본 과정은 다섯 단계이다. 첫째, ‘나는 누구인가’ 알기. 둘째, 멋진 옷 감상하며 눈을 높이기. 셋째, 나다운 옷 제대로 사기, 넷째, 멋지게 조합하여 나를 입기. 다섯 째, 진정한 나로 살아가기.
첫 번째 단계를 나는 ‘용감한 성찰자’라 부른다. 내 컬렉션과 내 데일리룩의 컨셉을 잡는 과정이다. ‘나는 누구인가?’ 이 질문을 던지고 답하는 과정에서 컨셉이 발견된다. 자기 상처와 직면하기도 한다. 그래서 이 과정에선 적지 않은 용기가 필요하다. 이 과정 마지막 즈음 나에게 ‘조용한 말괄량이’라는 별명을 지어 주었다.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간결한 답이다.
두 번째 단계는 ‘냉정한 감상자’이다. ‘보다’의 단계다. 사지 않고 보기만 하려면 냉정함이 필요하기에 ‘냉정한 감상자’라 불렀다. 이 단계에서는 ‘뭐가 아름답지?’, ‘나는 뭘 좋아하지?’ 묻고 답한다. 스타일리시함에 숨어 있는 일관성을 발견함과 동시에 자신의 패션 취향을 확인하는 단계이다. 자신의 외양을 빛내주고 자신의 내면을 표현할 옷만 사기 위해서 꼭 필요한 단계이다. 나는 이 단계를 건너뛰었었다. ‘보다’도 하기 전에 ‘사다’를 하곤 대부분을 버리는 피곤한 과정을 반복했다.
세 번째 단계는 ‘명민한 컬렉터’이다. ‘사다’의 단계다. 앞의 두 단계에서 찾아낸 내 옷장 컨셉과 멋스러움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적용해서 ‘나만의 룩’이라는 큰 그림을 그린다. 그리고 그 그림을 완성해 줄 ‘나만의 머스트해브아이템’ 조각을 찾아서 쇼핑하는 것이다. 낯선 방법 같지만 사실 익숙한 방법이다. 요리할 때 우린 메뉴를 정한 후 쇼핑 리스트를 정해서 쇼핑한다. 옷도 그렇게 쇼핑하는 거다.
네 번째 단계는 ‘창의적 작가’이다. ‘입다’의 단계다. 옷을 컬렉팅하는 것에 그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오늘 뭐 입지?’ 매일 우리가 옷장 앞에서 던지는 질문이다. 우린 옷장 속 컬렉션을 조합해 그날의 룩을 만든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자신이 가진 재료로 창작물을 만들어 내는 ‘작가’가 된다.
마지막은 ‘진정한 나’ 단계이다. 자기 옷을 입고 살면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된다. <What not to wear>의 마지막 영상에서 내가 본 건 다섯 번째 단계에 도달한 사람들의 행복한 표정이었다.
패션에서 힐링을 맛보기까지 거쳐야 하는 훈련과 노동. 만만치 않다. 시간이 필요하다. 나를 믿고 견디는 그런 시간 말이다. 그럼 누구든 옷 입기에서 행복을 경험할 거라 믿는다. 운동도 기본기를 다지기까지가 힘들다. 그 시기만 지나면 몸과 마음에서 얻는 치유는 온전히 나 자신의 것이다.
과거의 나는 멋쟁이가 되고 싶었다. 마음이 급했다. 비싼 옷, 화려한 옷, 남들이 우러러볼 것 같은 옷을 사들였다. 남들보다 눈에 띄고 싶었다. 경쟁을 위한 옷 입기는 아무 것도 남기지 않았다.
다시 컬러링 북을 바라봤다. 겨우 가방 몇 개 칠하고 포기하다니. 처음엔 못 해도 되는데. 그러다 잘하면 더 기쁠 텐데. 욕심내다 지친 거다. 한 권의 컬러링 북에는 꽤 많은 페이지가 있다. 한 장 한 장 칠할 때마다 실력이 좋아지고, 결국은 즐길 기회가 주어지는 거다. 어쩌면 컬러링 북의 힐링 포인트는 나아지는 자신을 만나는 과정에 있는 게 아닐까. 포기만 하지 않았다면, 뒤로 갈수록 예뻐지는 컬러링 북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셈이다.
패션으로 힐링하기. ‘천천히’가 필요했다. 가만가만히 나를 타일러 본다. 어제보다 매의 눈을 갖게 된 ‘감상자’, 어제보다 내 옷을 잘 알아보는 ‘컬렉터’, 어제보다 재치 있게 나를 표현하는 ‘작가’가 되어보자고. 지금 별로면 뭐 어때. 나이 들수록 더 멋진 내가 기다리고 있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