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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퓨링 Jun 06. 2019

세희의 천재성

내 친구 세희

세희는 작년 여름에 처음 만난 친구로 내가 아는 이들 중 빨간 원피스가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이야. 우리가 만난 그 맘때 우린 불타는 사람이었어. 너무도 잘난 사람이 되고 싶어서 불타는 사람들. 우리는 전혀 웃기지 않은 <미디어와 어쩌고>에 관한 얘기를 엄청나게 웃겨하며 여름을 보냈어.


여름이 지나고도 나는 세희 앞에서 숱하게 웃었어. 그래서 울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면 늘 걔를 찾아갔었지. 그런데 요즘엔 세희가 자주 울 것 같은 느낌이 드는 모양이야. 본격적으로 언론고시라는, 이름부터 무시무시해 보이는 시험을 준비하고 있어서 더 그럴지 모르겠어.


세희는 그날 아침에 서울에서 시험을 칠 거랬어. 사실 난 그 며칠 전부터 세희가 서울에 오면 너무도 당연하게 나랑 만나는 건 줄 알고(?) 몇 시에 보면 좋을까를 고민했어. 어이없고 이기적인 구애에 세희는 다음날 일정이 이미 있다고 했었지.


세희는 그날 아침에 서울에서 시험을 쳤어. 그리고 세희는 너무 힘이 든다고 했어. 너무 힘이 든 나머지 그냥 일정을 다 접고 집에 가고 싶다고 말했는데 나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우리 집에 오는 건 어떠냐고 걔를 유혹하였지.


세희가 오자마자 나는 방바닥에 발라당 누워버렸어. 나는 제주도에서 길바닥에 누워 별 보던 우리를 조금 떠올리면서 우리 집 천장을 바라봤어. 세희는 시험장 이야기를 해줬어. 논제가 얼마나 예상 가능했는지, 그 예상 가능한 문제에 얼마나 예상 못한 사람처럼 답을 달았는지, 그것이 얼마나 아쉬웠는지, 얼마나 겁이 났는지... 그런 것들을 이야기했어.


하지만 사실 나는 이야기를 들으며 얘가 얼마나 이 과정을 잘 지내게 될지 확신했어.


우리 세희가 글쎄 자신의 자신 없음을 이야기한 지 이십 분도 지나지 않아서 한 시간이 넘도록 미디어 이야기를 하는 거 있지. 뉴닉이 잘될지 아닐지, 얼마로 유료 전환을 해야 적합할지, 닷페이스의 수익 모델은 무엇이 좋을지, 조선일보가 어떤데 저기는 어떻고 뭐 이런 이야기들. 전혀 웃기지 않은 이야기를 여전히 웃겨하면서 하더라고.


얘를 더 진짜로 웃겨주고 싶어서 나는 밖으로 나가자고 했어. 서울에 온 김세희를 웃게 할 수 있는 필살기들을 항상 준비했기 때문에 자신 있었어. 집 앞에 있는 따릉이를 타고 천변을 달리면, 그리곤 나무와 책으로 둘러싸인 카페에 가서 차를 마시면 걔가 틀림없이 좋아할 것을 알았지.


걔는 자전거를 오분쯤 탔을 때 애교스런 목소리로 “유림아아... 너어무... 당황스러울 정도로 좋다아아.....” 하고 말했어. 마침 그날 오후 햇살도 진짜 따스했거든. 그 말을 듣고 나는 왠지 늠름한 사자같이 자전거를 타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사자 같은 주행을 했어. 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조금 사자적인 사람이 되었어.


세희가 서울을 떠나야 할 시간이 다가와서 풀 죽은 사자가 되려고 할 때쯔음, 걔는 다음과 같이 말했어.  


“사실 나는 시험을 치고 나왔을 때 다시는 서울에 오고 싶지 않은 마음이 들었어. 그런데 다시 여기 오고 싶어 져. 그리고 늘 내가 올 때마다 최고로 좋은 곳에 데려다주려고 노력하는 너의 모습은 감동이야. 고마워.”


세희가 전에 나한테 <애살의 천재>라는 별명을 붙여줬어. 어떤 일을 너무 잘하고 싶어서 애가 타는 마음을 경상도 사투리로 애살이라고 한대. 우리의 다른 친구인 도현이에게는 <시도의 천재>라는 이름을 붙여줬지. 나는 세희를 <나아감의 천재>라고 불러볼까 해. 세희는 늘 내가 생각지 못한 넥스트 스텝을 밟는 사람이거든. 세희와 보낸 반나절 중에서도 두 번이나 나는 걔가 ‘나아감’에 재능이 탁월하다고 보았어.


첫째는 시험 때문에 의기소침해졌음에도 미디어 이야기를 꾸준히 했을 때 그것을 느꼈어. 어떤 것에 지치는 마음을 한 켠에 두고도 계속해서 그것에 관해 말하는 것은, 지치는 마음에만 머물지는 않겠다는 선언과도 같아. 그 나아감이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인지, 얼마나 팽팽한 회복 탄력성을 가져야 하는 것인지. 하지만 세희는 주저 않고 능숙하게 그렇게 해. 걔의 그런 능숙함은 디테일만 조금씩 변주되고 늘 그래 왔지.


둘째는 세희가 헤어지기 전에 내게 해 준 말을 듣고 그랬어. 내게 고마움을 표한 그 부분 말이야. 나라면, 내가 얼마나 세상에서 제일 가엾은 지를 생각하느라 여념이 없었을 거야. 나는 늘 나 한 명 만을 불쌍해하느라 정신이 없거든. 하지만 세희는 자신을 측은해하면서도 내가 내어준 시간과 품에 감동이라고 말하는 사람이야. 그 또한 시선을 자신에게만 머물게 하지 않고 타인에게 돌리는 ‘나아감’의 일종이지. 그런 건 아무나 하는 게 아니야. 걔가 가진 아주 고유하고도 탁월한 재능이지.


내 친구 세희는 이런 사람이야. 대단한 애지? 그 대단한 장면들을 앞으로도 자주 목격하고 싶어. 아마 같이 있는 시간만 늘어난다면 그럴 것 같아. 그 장면들을 목도하는 일이 얼마나 황홀함을 가져다주는지, 걔랑 같이 있기만 하면 그럴 수 있다는 것이 어찌나 귀한 경험을 쉽게 얻는 것 같은지… 이런 거저먹음은 또 없을 것 같아서 앞으로도 걔 옆에서 힘껏 달콤해보려고.
20190604 세희를 떠올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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