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의 생일에 부친 편지-의 일부
(...)
생일이니까 뭔가 축하의 말로 가득해야하는데 네게 빚진 얘기만 하고 있네. 고마운 일 투성이라 그런가봐. 다음의 글은 최근에 널 생각하면서 써둔 글이야. 이 글을 선물할게.
<그루터기>
그루터기에 대해서 생각했어. 나무가 잘리더라도 그대로 남아있는 밑동, 다시 나무가 될 싹을 틔우는 곳. 영영 다시 회복할 가능성이 숨쉬는 곳. 내 그루터기는 어디에 있는지에 대해서 몇 밤이고 생각하다보니 어찌나 내가 그것을 타인에게 양도하고 있었는지를 알았어.
그 밤을 통과하면서 더 알아낸 정보들이 있어. 내가 얼마나 지독하게 외롭고 유약한 존재인지, 어찌나 사람없이 못사는 사람인지. 사실 '나 혼자 있는 시간'마저 '같이 있는 시간'이 되려고 기다리는 시간들에 불과했다는 것도. 이런 깨달음도 또 역시 누군가와 나누고 싶은 지겨운 나. 참 내 스스로가 지겹게 느껴지는 날들이었어.
그래서 너한테 연락을 했어. 그 순간 내 그루터기는 너였지. 너는 내가 <가!>라고 말하면 <가!!>정도로 살짝 변형해서 내 말을 따라해주는 애잖아. 내가 틀렸다고 말하는 법이 없지. 요새는 그런 대책없는 동의와 확증편향이 필요한 날들이었던 것 같아. 아다시피 원래는 누구의 도움없이도 내 말이 옳다고 오만하게 구는게 내 특긴데, 그게 쉽지않은 날도 오더라. (오래살고 볼 일이지..) 아, 스스로를 비관했다는 건 아니고, 그냥 낙관해 볼 힘이 없었어.
네 염려는 너무 신속해서 가끔은 신기할 정도야. 먹이를 인지한 들개의 침샘도 그거보단 느리게 일할 것 같아. 매우 빠른 비호에 그만큼 나도 빠르게 안정을 찾아. 나는 두통이 생기면 타이레놀말고 이브푸르펜을 먹거든, 그냥 그게 제일 잘 들어서. 니가 내 이브프루펜이다 싶어. 너는 내가 자꾸만 지는 것들에 대해서 말해줬어. 내가 못해서 지는 게아니고 난이도가 너무 높다고 말했지. 게임에 비유하자면 한번도 해본 적 없는 게임을 보스맵부터 하는 거라고, 그런 게임을 나더러 자꾸 해보라고 하니까 지는 것 아니냐고. '지는 것'을 끔찍하게 싫어하는 내게 그 말이 얼마나 큰 위안이었는지 모를거야. 역시 정신 건강에는 남탓이라니까.
B야, 그렇다면 너의 그루터기는 뭘까? 아마 네 그루터기는 네 자신인지도 모르겠어. 나는 네가 스스로 네 안의 힘을 찾는 장면을 자주 목격했으니까. 혼자 서있는 법을 모르는 건 나뿐인 것 같아. 하지만 너를 내 그루터기로 생각하고 내가 너를 찾을때, 네가 내어주는 단단한 밑동이, 위로와 사랑이 너무 속수무책으로 달콤해서 영영 혼자 있는 법을 몰라버리고 싶다. 그건 네게 너무 피곤한 일이겠지. 잘 단련해보도록 할게.
글은 여기까지야. 나도 가끔은 네 그루터기가 되어줄 수 있을까? 그럴 수 있다면 좋을 것 같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