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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쉬의 인사이트 May 19. 2021

자신의 능력의 좌절되는
경험을 하곤 한다

영화 <더 넷>

사람의 본성에는 원래 악귀와 같은 면모가 있다. 모두가 악귀라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분명 인간 종의 뿌리 깊은 특성 중에는 잔악함이 있다. 수천 년 전부터 중국 역사에 등장하는 악녀 황후들의 이야기와 남미 아즈텍 문명의 인신공양부터 2차 세계대전을 전후한 전 세계적인 비극까지, 인류의 역사는 분명 그 한 축에서 타인의 고통을 먹고 자라왔다. 단순한 도구적 살인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 끔찍한, 약자의 고통을 즐기는 가학의 본성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인간의 가학적 본성은 역사의 현장마다 빠짐없이 흔적을 남겨왔다.


가학적 성도착증을 일컫는 '사디즘(Sadism)'의 유래가 된 프랑스의 사드 후작(마르키 드 사드)은 '소돔 120일'이라는 미완성 소설을 남겼다. 소설 속 귀족들은 어린아이와 하녀, 창녀들에게 각종 고문을 일삼으며 유희를 즐긴다. 그 내용은 N번방 사건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훨씬 더 잔인하다. 단순한 상상력의 산물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사드 후작의 소설은 백 년이 넘도록 살아남아왔다. 중국 악녀들의 이야기도 수천 년을 살아 남아 왔다. 그 이야기들에는 인간 내면의 끔찍한 본성을 흥분시키는 묘한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정신분석적으로 볼 때, 사디즘은 통제력을 회복하고자 하는 욕구의 표현이라고 해석된다. 자신의 능력과 권위가 좌절되는 현실을 부정하고자, 타인에게 고통을 가하는 방법을 통해 자신도 무언가를 통제할 수 있다는 감각을 되찾고자 한다는 것이다. 물론 약자의 희생을 동반한다는 점에서 심하게 왜곡된 정신기제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사디즘 내면의 이러한 욕구를 살펴보는 것은 가학의 평범성, 악의 평범성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될 수 있다.


사실 누구나 살면서 자신의 능력과 권위가 좌절되는 경험을 하곤 한다. 내 마음처럼 되지 않는, 다시 말해 통제력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는 현실 속에서 무수히 좌절한다. 그렇기 때문에 통제력을 되찾고자 하는 욕구는 누구나 가지고 있는 원초적 욕구일 수밖에 없다. 통제력을 점점 계속 잃어버리다가는 자아가 완전히 흩어져 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그것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욕구는 본능적이다. 때문에 누구나 한 번쯤은 법과 윤리를 초월해 모든 것을 내 마음대로 하고 싶다는 상상에 빠진다.


상상 속에서 직장 상사를 쥐어 팰 수도 있고, 회사에 불을 지를 수도 있다. 상상 속에서라면 초능력을 써서 다른 사람들을 마음대로 부릴 수도 있다. 우리는 분명 통제력을 되찾고 싶어 하는 욕망을 가지고 있다. 가학적 성도착증, 그 왜곡된 행위만 들여다봐서는 그것을 결코 막을 수 없다. 그 행위 내면의 욕구를 들여다볼 때에야 비로소 악의 보편성을 이해하고 막을 수 있다. 그 내면의 욕구, 통제력을 회복하고자 하는 욕구 자체는 누구나 가지고 있는 본능이자 모두의 환상(Fantasy)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숨길 수밖에 없는 욕망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 다른 사람을 내 마음대로 다루고 싶고, 모든 것을 내 마음 내키는 대로 하고 싶다는 환상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 그것은 분명 본능적이고, 평범한 우리 모두를 자극한다. 따라서 잔악무도한 범죄자들의 일상이 그토록 평범한 것도 우리 주변의 친근한 이웃이 남몰래 연쇄살인을 벌이고 있을 수 있다는 사실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끔찍한 범죄라고 해서 아주 특별한 사람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주목해야 할 점은, 그렇다면 그렇게 평범한 사람들이 어떻게 그런 행동을 상상이 아닌 실제로 할 수 있었는가에 대한 과정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폭력적인 상상을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다. 아니, 많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그런 욕망이 생겼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조차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N번방의 그들은 평범한 얼굴을 든 채, 익명의 손으로 약자에게 자신들의 숨겨진 욕망을 배설하고 있었다. N번방의 만행이 그토록 평범한 일상으로 뒤덮여 있었다는 사실은 박사와 갓갓, 와치맨이 언제든 다시 나타날 수 있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박사와 갓갓을 추켜세우고 돈을 보내고 공유한 수많은 사람들이 있는 한, 평범한 그들이 있는 한, 평범한 누군가는 다시 박사가 될 수 있다.


우리가 정말로 두려워하고 막아야 할 것은 바로 이것이다. 우리의 삶을 세 개로 분열시키는 힘은 타인으로부터 나온다. 다른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본능적인 욕구를 포기하거나 감춰야만 한다. 인간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없이는 살 수없는 존재이며,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진화해온 존재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내면의 양심조차도 타인과의 관계에서 형성된다. 타인이 있기 때문에, 사회적 관계와 역할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위험한 환상을 분리시켜야만 한다.


박사와 N번방의 범인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억압된 욕구를 실현시킬 수 있던 수단 역시 스마트폰이었다. 텔레그램의 강력한 보안성과 익명성 밑에서 그들은 비밀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공적인 삶의 평범성을 간직한 채, 분열된 비밀의 삶 속에서 뒤틀린 욕구를 배설하고 있었다. 일상 속 사회적 관계와 철저히 분리될 수 있는 그 공간, 철저히 분리되었지만 여전히 현실에 닿을 수 있는 힘을 가진 그 공간에서는 억눌린 욕망이 살아있는 악귀로 현현할 수 있었다.


박사는 피해자들의 비밀을 이용해 착취했다. 그는 먼저 속임수와 사기를 이용해 피해자들로부터 개인정보와 민감한 영상을 얻어냈다. 그런 다음 그것을 지인들에게 공개하겠다며 협박한 것이다. 하지만 그가 영상을 공개하지 않는 대가로 피해자들로부터 얻어낸 것은 더 민감하고 수피스러운 더더욱 공개할 수 없는 영상들이었다. 그야말로 빠져나올 수 없는 늪이었다. N번방과 박사방은 탈출할 수 없는 지옥에 다름없었다. 박사는 피해자들에게 정말 차마 상상조차 힘든 일들을 지시했다. 피해자들이 자신의 말에 절대적으로 따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박사는 피해자들이 영상 유포를 얼마나 두려워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수치스러운 모습이 주변 사람들에게 알려진다는 것, 공적이고 개인적인 삶이 파괴당한다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수치스러운 모습이 주변 사람들에게 알려진다는 것, 공적이고 개인적인 삶이 파괴당한다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박사 스스로가 그 누구에게도 보일 수 없는 비밀의 삶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경찰에 체포되었을 때, 박사는 필사적으로 얼굴을 가렸다. 여전히 익명성 밑에 숨고 싶어 했다. 박사라는 자아로 분열시켜뒀던, 자신의 수치스러운 비밀이 조주빈이라는 공적인 삶을 무너뜨릴까 두려워했다. 실상은 이미 검거되어 끌려가고 있는 와중인데도 말이다. 언론이 그의 개인 신상을 낱낱이 공개한 것은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제25조에 의해 국민의 알 권리 보장, 피의자의 재범 방지 및 범죄 예방을 목적으로 한 행위였다. 박사는 텔레그램과 비트코인 거래가 자신의 이중생활을 완전히 지켜줄 것이라 착각했었다. N번방의 수많은 이용자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일상 속 사회적 관계를 N번방의 철저한 보안이 완전히 보호해줄 것이라 착각했다. 그 착각 속에 갇혀, 그들은 풀어놓아서는 안 될 뒤틀린 욕망의 자유를 만끽했다.


평범한 사람들이 품은 욕망이 '걸리지 않을 것' '아무도 알지 못할 것'이라는 착각 속에서 희생자들은 집어삼켰던 것이다. 결국 이번 사건은 박사, 갓갓 같은 몇몇의 괴물이 난데없이 나타났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 아니다. 평범한 그들, 평범한 수만의 회원들, 평범한 우리 곁의 누군가가 품었던 어리석은 착각 속에서 빚어진 비극이었다. 사회가 텔레그램 강간방 사용자들에게 그들의 착각이 얼마나 알량했는지를 폭로해줄 차례이다. 익명성의 비호 아래에서라면 마음껏 악마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착각을 부숴줄 차례이다. 상세한 신상공개와 자비 없는 엄정한 처벌로 그들의 비밀을 그들 스스로 감당하도록 해야 한다.


인류의 역사는 수천 년간 잔혹함과 함께 해왔다. 앞으로도 잔혹한 범죄가 영원히 사라지리라 기대하기는 힘들 것이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우리에게 잔혹한 파괴의 본성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사는 결코 그 본성을 점점 더 크게 키워오는 방향으로 흘러오지 않았다. 인류는 인종청소와 핵전쟁을 겪으며, 제대로 갈무리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본성이 우리 존재를 완전히 파괴하고 말 수도 있음을 깨달았다. 성숙해나간다는 과정은 우리 인간이 사회적 관계 속에서만 번영할 수 있는 존재, 즉 사회적 동물이라는 사실을 깨달아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도 있다.


콜버그(Kohiberg)는 도덕성 발달 이론을 이야기하며, 유아의 처벌받지 않기 위한 윤리가 점점 나이를 먹으며 타인의 관점을 내면화하는 윤리로 나아가야 하고, 그래야만 최종적으로 보편적인 양심과 사회적 윤리에 의거한 도덕성을 발달할 수 있다고 했다. 사회적 윤리를 확립해가는 과정은 인간 존재가 통합하고 번영하기 위한 필수 조건이다. 그 윤리의 획득은 결코 눈 가리고 아웅 식의 덮어놓기에 있지 않다. 반사회적 욕구를 몰래 숨기고 감춰서 분열시키는 데에 있지 않다. 성숙해나가기 위해서는 감춰둔 욕망을 직시하고 반드시 제대로 갈무리할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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