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아지는 출생 10여분 만에 뛰어다닌다. 생존을 위한 절박한 움직임이 태어날 때부터 입력되어 있다. 반면 사람이 자립하기 위해서는 상당 기간의 신체적, 심적 성장이 필요하다. 고도로 세분화된 사회를 살아가는 인간은 충분히 안전한 환경 하에서 천천히 성장한다. 아이가 홀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일정 시기 동안 일정 정도의 보호가 필요하다. 이는 부모의 호의가 아니라, 인간의 숙명이다. 몸통에 비해 큰 머리와 짧은 팔다리, 부드러운 각도의 턱관절, 얼굴에서 큰 비율을 차지하는 눈 크기 등 포유류의 새끼들은 공통된 외형을 보인다.
아기 포메라니안 강아지나, 요즘 인기 있는 '짱절미'의 모습을 떠올려 보자. 하얀 솜뭉치 같은 앙증맞은 몸에 순수하게 검은 눈동자와 코가 점점이 박혀 있다. 데굴데굴 구르듯 돌아다니다, 주인과 눈이라도 마주칠라치면 이내 덤벙덤벙 달려온다. 연약한 강아지가 살아갈 수 있게 해 주는, 어린것을 향한 성인의 자연스러운 느낌이다.
아기는 생후 3개월가량이면 생긋생긋 웃는다. 평생의 효도를 2살 전에 모두 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존재만으로도 심장을 멎게 만드는 아기가, 눈을 마주쳤다는 이유만으로 미소를 짓는다. 시간이 정지하는 듯한 그 장면 하나만으로 모든 삶을 아이를 위해 쓰고 싶다는 마음이 든다. 사회적 미소(social smile), 미소 반응 등으로 칭하는 이 웃음에도 생존의 비밀이 담겨 있다. 부모, 혹은 자신을 보호하는 이와, 하나뿐인 특별한 사랑을 나누는 것이 아이의 삶을 이어준다. 웃어주기에 우유를 먹을 수 있다거나, 우유를 먹여주기에 웃어주는 것이 아니다. 본능적으로 아기는 보호자를 반기고, 부모는 아기를 보듬는다. 숭고한 삶의 이치다.
사람은 송아지처럼 태어나자마자 홀로 뛰어다닐 수는 없다. 그렇기에 득별한 교감과 보호 아래, 자립할 때까지 성숙해 간다. 보호와 생존의 연결고리를 아이는 본능적으로 인식한다. 그렇기에 어린아이에게. 마음의 위협, 두려움은 불편함이나 불쾌함이 아니라 생존의 위협이다. 문제는 이미 위협과 두려움은 지나갔으되, 그 흔적은 남아 끊임없이 자신을 괴롭힌다는 것이다.
'... 어느 날 스물여덟 살인 간호조무사 한 명이 펠리티의 진료실을 찾아와 자신에게 비만은 가장 큰 문제라고 호소했다.... 185kg이던 그녀의 체중은 51주 후 60kg으로 확 줄었다. 그런데 몇 개월 지난 뒤 만났을 때, 펠리티는 그 간호조무사가 다시 체중이 불어났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게다가 불어난 수준은 그토록 짧은 기간에 일어난 일로는 도저히 믿기 힘들 정도였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알고 보니 감량에 성공한 뒤 날씬해진 몸매에 반한 남자 동료가 치근대기 시작하더니 관계를 하자고 제안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말을 듣고, 그녀는 집에 돌아가서 음식을 먹어대기 시작했다.
하루를 꼬박 먹고, 밤에 자다가 몽유병 상태로 또 먹었다. 펠리티가 이 극단적인 반응이 어디서 나왔는지 조사해 보니 그녀는 할아버지에게 장기간 성폭행당한 적이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그 여성은 비만 수술을 받고 체중을 44kg이나 감량했지만 그 사이 자살을 시도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자살 충동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신의학 병원 다섯 곳을 전전하며 전기 충격 치료 프로그램을 세 번이나 받았다고 설명했다. 성폭행 피해자인 한 여성은 펠리티에게 이렇게 말했다. "체중이 많이 나가면 눈길을 안 받잖아요. 저한테 필요한 게 바로 그거예요"(베셀 반 데어 콜크. 몸은 기억한다 중. 을유 문화사. 2016)
아주 어린 시절의 일들은 보통 잊혀 지거나, 미화되는 것으로 치부되기 쉽다. 하지만 마음의 깊이는 기억의 공간 이상으로 깊다. 살아가며 기억할 것들이 많기에 자리를 내줄 뿐, 상처들은 보이지 않는 어두운 바닥에 침잠하여 감정으로, 생각으로, 행동으로 삶에 영향을 미친다. 더군다나 그 상처가 생존을 위협하고, 살아가는 것조차 두렵게 만들 정도였다면 더욱 그렇다. 한 실험에서 개를 묶고 전기 충격을 가했다. 깜짝 놀란 개가 달아나려 하지만, 목에는 쇠사슬이 매어 있다. 반복적인 도망이 무위로 돌아가자, 개는 이윽고 체념한다.
전기 자극이 주어져도 더 이상 달아나려 하지 않는다. 안타깝게도, 쇠사슬이 풀어진 이후에도. 코끼리를 길들이는 과정은 잔인하다. 어미로부터 떼어낸 아기 코끼리를 묶어 두고, 구타하거나 칼로 몸에 상처를 내며 학대한다. 그리고 사육사의 통제를 벗어날 때마다 관자놀이 부근을 막대로 피가 날 때까지 때린다. 이러한 환경 아래에서 자란 코끼리는 이 막대에 속박된다. 거대한 코끼리는 발걸음 한 번으로도 사육사를 제압할 힘이 있지만, 죽을 때까지 막대의 통제를 받는다.
성숙한 성인 홀로 살아가며 세상에 대처할 수 있다. 하지만, 이어지는 전기 충격에도 자리를 떠나지 않는 안타까움처럼, 당당한 삶을 살아가는 이도 트라우마에는 무력한 경우가 많다. 아픔을 겪는 그때의 내가 마음속에 자리 잡아, 마치 아물지 않는 흉터처럼 아픔과 두려움을 반복하여 겪는다. 그리고 아이들은 두려운 상황의 원인을 자신으로 인식한다. 흔히 아이 앞에서 부부가 싸우는 모습을 보이지 말라는 조언을 한다. 자신을 중심에 두고 생각하는 아이는 자신이 다툼의 원인인 줄 알기 때문이다.
'엄마를 화나게 해서 미안해요, 내일은 꼭 말 잘 들을게요, 물을 엎지르지 않을게요...' 학대 속에 짧은 생을 마친, 또래 아이들의 몸무게의 반밖에 나가지 않은 일본의 4세 여자 아이가 남긴 쪽지다. 아이의 글을 읽고 안타까움과 분노가 들었다. 높은 조회 수와 댓글의 내용들을 통해 많은 이들도 비슷한 감정을 느꼈음을 알 수 있었다. 누가 봐도 아이는 잘못한 것이 없다. 당신에게도 어린 시절의 말 못 할 아픈 상처가 있다면, 마찬가지로 당신은 잘못하지 않았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가 매스컴 등을 통해 알려진 이미지는 다소 좁은 것으로 보인다. 객관적으로 죽음의 위협이 있는 일(테러, 전쟁, 사고 등) 이외에도 주관적으로 생존의 위협을 느낀 일(학대, 성적 폭력, 대인관계 상의 단절 등)은 트라우마를 유발할 수 있다. 마음의 상처가 지속적으로 다시 경험되고, 당시의 공포가 엄습해오거나, 큰 감정의 소용돌이, 삶의 어려움을 유발한다면 전문적인 진료를 고려해 보기를 권고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