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명 터널》10화 숨겨진 도시, 심판의 향기
1. 폐허가 된 리조트
바람의 냄새
새벽 바람은 차갑고, 짠내가 섞여 있었다.
보트는 서서히 거제도 근처 해안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파도가 바위를 쳤다.
작은 배가 물가에 닿자 선생님이 먼저 내려서 줄을 잡아 당겼다.
“조심해. 미끄러워.”
아이들은 바닷물을 피해 모래사장으로 올라왔다.
이제 바다에서는 떠났고,
땅 위의 위험이 시작되었다.
길을 따라 오르자,
예전에 여행객으로 붐볐을 리조트가 보였다.
하지만 지금은… 유리창은 깨져 있고,
간판은 떨어져 나갔고,
수영장 물은 까맣게 썩어 있었다.
유경이 입을 막았다.
“냄새… 뭐야 이건.”
하린이 얼굴을 찡그리면서
근처의 건물 뒤로 숨으면서 말했다.
“곰팡이… 썩은 음식… 그리고… 사람 냄새도.”
유리는 가만히 말했다.
“숨지 마. 들키면, 상황이 더 나빠져.”
그러나 이미 뒤쪽에서 기척이 있었다.
총구가 어둠 속에서 드러났다.
“멈춰.”
소리가 낮았다. 흔들림 없는 목소리.
어둠 속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나타났다.
전부 얼굴에 천을 두르고 있었다.
마스크가 아니라, 자신을 감추기 위한 천.
그중 리더로 보이는 여자가 앞으로 나왔다.
“바다에서 오는 인간들 중 절반은 감염된 채로 와.
확인되기 전엔 누구도 들일 수 없어.”
선생님이 두 손을 들었다.
“우린 감염자가 아니에요. 우린...”
유리가 조용히 끼어들었다.
“우린 정유를 가지고 있어요.”
천으로 입을 가린 사람들의 눈이 흔들렸다.
리더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정유?”
유리는 조용히 손가방을 열어 작은 정유병 하나를 꺼냈다.
마치 사람들의 시선이 그 작은 병에 꽂히는 듯 했다.
2. 향기, 그리고 경계
유리가 뚜껑을 조금 열자 백합나무의 향기가 퍼졌다.
바람이 향기를 실어 사람들의 가슴으로 스며들었다.
그리고 아주 짧은 순간 리조트 안쪽에서 누군가 울었다.
“엄마… 냄새가 나…”
곧이어,
“열이… 내려가고 있어…”
리조트를 지키던 사람들의 얼굴이 놀라움으로 일그러졌다.
한 남자가 속삭였다.
“정유… 진짜였어.”
리더의 손이 떨렸다.
“들어와.”
그러나 유리는 멈춰섰다.
유리는 단호하게 말했다.
“들어가기 전에 조건이 있어요.”
리더는 의아한 표정으로 말했다.
“조건?”
유리의 목소리는 흔들리지 않았다.
“정유를 지키려는 게 아니에요.
하지만 정유는 누구도 독점할 수 없어요.
우리가 하는 건 사람을 치료하는 것이고,
또 나눔이지 소유가 아니에요.”
선생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유는 사람을 살리는 도구지, 감옥을 만드는 도구가 아닙니다.”
리더의 눈빛이 바뀌었다.
잠시 후, 천을 벗으며 그녀가 자신을 소개했다.
“내이름은 수진이고, 이곳의 관리자야.”
“지도자가 아니라요?”
선생님이 물었다.
“여긴 지도자 같은 거 없어요.”
수진이 씁쓸하게 웃었다.
“우릴 지키는 건… 두려움 뿐이었으니까.”
3. 향기는 진심을 깨운다
유리는 수진의 손을 잡고 말했다.
“정유는… 두려움을 없애요.
하지만 욕심이 닿으면 독이 돼요.”
수진의 눈이 순간 흔들렸다.
“우린… 두려움 때문에 서로를 감시했어.
혹시 감염될까 봐.”
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두려움이 사람을 감염시키는 거죠.”
백합향은 사람이 감추려는 마음을 드러낸다.
유리는 정유병을 수진에게 건넸다.
“이제 당신이 나눠요.”
수진은 눈을 크게 떴다.
“왜… 왜 나에게?”
“이곳을 가장 잘 아는 사람,
그리고 이곳의 아픔을 아는 사람에게 맡기는 게 맞아요.”
선생님이 조용히 말했다.
“정유는 사람을 선택하지 않아요.
사람이 그 마음을 열고, 정유를 선택할 뿐이죠.”
아이들이 수진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향기가 리조트 안으로 퍼져 나갔다.
— 쓰러져 있던 아이의 숨소리가 차분해지고
— 울부짖던 어른의 눈이 가라앉고
— 사람들의 어깨가 조금씩 내려갔다
수진의 안내로 그들은 리조트 안쪽으로 이동했다.
바닷바람은 소금기와 땀을 몸에 남겼고,
오래 씻지 못해 지친 몸은 바람에 축 늘어져 있었다.
샤워실 문이 열렸다.
유리 일행은 뜨거운 물이 피부에 닿는 순간 숨을 내쉬었다.
거울 속 자신을 보며 유리는 속삭였다.
“우리는… 살아 있는 사람이구나.”
참으로 오랜만에
편안하게,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바라보았다.
누군가 가져온 깨끗한 옷이
유리와 아이들의 손에 조심스레 건네졌다.
선생님도 숨을 고르며 셔츠를 갈아입었다.
아이들은 침낭처럼 펼쳐진 얇은 침대 위로 몸을 누였다.
그리고, 금세 잠이 들었다.
그러나 유리는…
눈을 감을 수 없었다.
평화가 이렇게 낯설 수 있다니.
가슴 속에 조용한 불안이 스며들었다.
4. 스며드는 그림자
유리 일행이 배에서 내릴 때부터
리조트 건물 꼭대기에 숨어있는 그림자가 있었다.
그림자는 쌍안경으로 유리 일행을 계속 관찰했다.
무전기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확인했다. 정유는 지금 거제도에 있다.”
그리고 아주 낮은 목소리.
“본부에 보고해.
신의 향기를 확보한다고.”
거제의 리조트는
오랜만에 조용한 밤을 맞았다.
아이들은 잠들었고,
어른들은 정유 한 방울씩을 나누며
살아 있다는 안도감 속에 숨을 돌렸다.
하지만 유리는 편히 눈을 감지 못했다.
향기가 퍼질수록 사람의 속마음이 드러난다.
좋은 마음도, 감춰 둔 어둠도. 누구도 피할 수 없는 향기다.
선생님이 유리 옆에 앉았다.
“불안해 보여요.”
유리는 작은 정유병을 바라봤다.
“정유는 사람을 살려요.
하지만 마음에 독을 품은 사람에게는…독이 됐잖아요.”
선생님이 말했다.
“그것은 썩은 마음에 대한 심판이지요.
썩은 살은 도려내야 하듯이, 그 마음도 썩었다면 당연하겠죠.”
그 말에 유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날 아침, 리조트 사람들이 몰려왔다.
“유리님, 저희 아이가 열이 내렸어요!”
“정유를 조금만 더 나눠주세요!”
“저도… 저도…”
유리, 선생님, 하린은 차례대로 정유를 나눠 주었다.
그러나 한 남자가 줄 끝에서 소리를 질렀다.
“왜 나한텐 안 줘? 기록도 안 남는 것들한테 주면서—”
수진이 다가갔다.
“여긴 줄 서는 순서와 상태를 확인하고—”
남자가 거칠게 밀쳤다.
“아니, 선택은 니가 아니라 나무가 하는 거잖아!”
유리가 다가갔다.
“정유를 원하는 이유가 뭐죠?”
남자의 눈빛이 흔들리지 않았다.
“살아야 하니까.”
유리는 남자의 눈을 깊이 들여다봤다.
“…당신이 아니라,
누군가를 살리려는 선한 마음은 없나요?”
남자의 표정이 굳었다.
“나부터 살아야지.”
그 순간 정유향이 스쳤다.
남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뭐야… 이 냄새…”
정유는 말없이 반응했다.
두려움, 욕망, 자기 자신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마음,
그 모든 것이 향에 닿는 순간 그 사람은...
남자의 몸이 갑자기 힘을 잃고 주저앉았다.
피부에 검은 점 같은 것이 스며들었다.
사람들이 놀라 소리쳤다.
“감염자다!!”
하지만 유리는 속삭였다.
“아니… 정유가… 그의 악한 마음을 비춘 거 같아요.”
5. 회개
남자의 눈이 넓게 뜨였다.
“이 향… 내 속을 들여다보고 있어…
내가 뭐였는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유리가 다가갔다.
“정유는 심판하지 않아요.
당신이… 당신 자신을 본 거예요.”
남자는 울먹이면서 말했다.
“난… 난 지금까지 누구도 믿지 않았어…”
정유의 향은 더 퍼졌다.
선생님이 조용히 말했다.
“당신은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서만 살았죠.”
남자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나도… 누군가를… 지키고 싶었는데…”
그 순간,
남자의 피부를 뒤덮어 가던 검은 점들이 사라져 갔다.
향이 그의 마음에서 두려움을 씻어낸 것이다.
사람들은 믿기지 않는 듯 바라보았다.
유리가 말했다.
“정유는 사람의 마음을 깨끗하게 만들어요.
잘 변하지 않는 사람도 있지만...”
선생님이 이어서 말했다.
“그리고 그가 마음을 바꾸면,
정유도 그를 받아들입니다.”
하린이 나지막이 덧붙였다.
“향기의 심판이 아니라… 그들의 선택이에요.”
사람들의 얼굴이 밝아졌다.
수진이 무릎을 꿇고 말했다.
“우린 쫓겨나고 버려졌다고 생각했는데…”
유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니에요. 당신들은 선택받은 게 아니라,
스스로 좋은 길을 선택한 거예요.
두려움 대신… 서로를.”
그러나 그 순간 리조트의 맨 꼭대기 층에서
폭발음이 들렸다.
펑—!
창문이 깨지고,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하린이 비명을 질렀다.
“저쪽에 사람들 있었어!”
수진이 외쳤다.
“누가 건물에 들어간 거야?
감염자? 아니면… 또 다른 무리?!”
유리는 정유병을 쥐었다.
숨이 고요해지고 뒤에서 나무 향기가 스쳤다.
유리의 마음 속에서 백합나무가… 알려주고 있었다.
선생님이 물었다.
“유리씨, 왜 그러세요?”
유리는 건물 꼭대기를 보며 말했다.
“우릴 지켜보던 자들이 이곳으로 왔어요. 그들이... 움직였어요.”
10화 끝. 오늘도 구독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황명터널의 웹툰연재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링크
[연재 브런치북] 황명 터널과 빛의 아이들 :웹툰화
황명 터널과 빛의 아이들 : 네이버 웹툰
글: 유리 / 그림: 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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