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명 터널》9화

바다 위의 증언자들, 첫 번째 도시

by 산여울 박유리






《황명 터널》9화 바다 위의 증언자들, 첫 번째 도시




1. 나무의 경고


문 근처 뿌리가 다시 움직였다.


찰칵—

문이 자연스럽게 열렸다.


나무가 만든 길은

유리 일행에게만 열리고,

욕망에 눈이 먼 자들에게는 닫힌다는 사실.


지훈은 충격을 받았다.

“왜… 왜 나는 안 되는데?”


유리는 담담하게 말했다.

“우리는 나무를 믿었고,

너는 나무를 이용하려 했어.”


지훈은 자신의 무전기를 집어 던졌다.

“군대가 오면… 너희 다 끝이야.”


유리는 그 말을 듣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순간,

백합나무의 향이 다시 흔들렸기 때문이다.

“진짜 싸움은 이제부터야.”


유경이 물었다.

“언니, 우린 이제 어디로 가?”


유리는 그들을 둘러보았다.

지친 얼굴들, 뛰는 심장 소리, 그리고 두려움.


유리는 조용하고 단단하게 대답했다.

“우린… 숨는 게 아니라 나아갈 거야.”


선생님이 미소 지었다.

“유리씨 세상을 살리러 가는 거지요?”


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정유를 지키는 게 아니라—

정유를 나누러 가요.”


바람이 터널 밖에서 불어왔다.

그리고 하늘 위로 불빛이 떨어졌다.


벌레 바이러스와 인간의 탐욕,

그리고 나무의 선택.




2. 첫번째 도시로


아침 안개가 터널 입구를 살짝 가리고 있었다.

백합나무의 향기는 남겨진 자들을 살며시 감싸고,

유리 일행은 침낭과 가벼운 식량,

그리고 작은 정유병 5개를 들고 밖으로 나섰다.


선생님이 문을 한 번 뒤돌아보며 말했다.

“돌아올 수 있는 거지요?”


유리는 문에 손을 얹었다.

나무의 뿌리가 문을 타고 얇은 금빛으로 스쳤다.

‘언제든 돌아오렴.’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네. 나무가 우리를 기억하고 있어요.”


모두가 함께 움직였다.

(유리, 선생님, 유경·유진, 하린, 그리고 터널에서 함께 살아온 몇몇 어른들과 학생들)


한 줄로 길을 나서자 세상은 너무 조용했다.

자동차도, 사람도 없었다.

바람이 지나가는 소리만이 길 위를 스쳤다.


유진이 중얼거렸다.

“부산이 이렇게… 비어 있을 줄은.”


유리는 동생의 어깨를 가볍게 잡아주었다.


“사람이 없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숨어 있는 거야.”


유리는 스스로도 그렇게 믿고 싶었다.

두려움보다 사명을 크게.


해운대에서 기장 방향으로 향하자

바다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바다도 변해 있었다.

검은 누수처럼 번져 있는 이물질,

그리고 뒤엉킨 선박들.


하린이 귀를 기울였다.

“소리… 들리지 않아? 사람들 목소리.”


선생님이 앞을 가리켰다.


작은 항구,

예전엔 관광객으로 붐볐던 그곳에

임시 울타리와 드럼통이 세워져 있었다.


하얀 천에 검은 글씨.

“황명부대 — 외부자 접근 금지”


선생님이 말했다.

“부대? 여긴 군부대 없었는데.”


그러다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 조끼를 입고 무전기를 찬 사람들.


유리의 직감이 속삭였다.

군인들이 아니다.




3. 정유의 향


그들 중 한 사람이 걸음을 멈추더니

코를 킁킁거렸다.

“향기… 지금 맡았지?”


유리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선생님이 작은 정유병을 가려서 숨겼다.

“조용히 해. 우리에 대해 알게 하면 안 돼.”


그러나 정유의 향은 감출 수가 없다.


그 냄새는

사람의 욕망과 두려움을 흔들었다.


무전기 소리가 본부에 전해졌다.


“목표 발견.

정유 소지 가능성 높음.”


한 남자가 유리 일행 앞을 가로막았다.

“여긴 통제구역입니다.

이후 질문은 우리가 하죠.”


유리는 차분히 말했다.

“우리는 도움을 주러 왔어요.”


남자가 웃었다.

“우릴 도와?

이제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걸 갖고 다니면서?”


유리가 고개를 저으면서 말했다.

“정유는 그런게 아니에요. 나누는 거에요.

누군가 독점하면… 사람들은 다시 미쳐버릴 거예요.”


남자의 눈빛이 바뀌었다.

“그래서 우리가 필요하단 거지.”


선생님이 낮게 말했다.

“이 남자들… 지훈이 말한 ‘다른 군’ 이 아냐.”


유리가 대답했다.

“네. 정유를 이용하려고 하는 사람들로 보여요.”


아이들이 서로의 손을 꼭 잡았다.


함장처럼 보이는 사내가 손을 내밀었다.


“우리와 함께해. 정유를 우리가 관리하면

너희는 안전해.”


유리의 발걸음이 잠시 멈췄다.

지켜줄 테니 넘기라는 뜻이었다.


그 순간,

백합 향이 바람에 실려 왔다.


유리는 흔들림 없이 말했다.

“정유는 가둬둘 힘이 아니라,

나눠야 할 숨결이에요. 사람들을 살려야 해요.”


사내의 표정이 굳었다.

“그럼 힘으로 가져가야겠네.”


남자들이 느린 움직임으로 다가왔다.


선생님은 얼른 말했다.

“모두 도망쳐!”


하린이 옆에있는 학생들을 불러서 함께 숨었다.


그러나 그때—

땅 아래에서 무언가 떨렸다.


백합나무의 뿌리가

멀리 이곳까지 뻗어 나온 듯 했다.


바람이 스쳤다.

정유의 향이 항구 전체에 퍼졌다.


사내들이 갑자기 멈춰 서서 숨을 들이마셨다.


“…이게… 신의 향기야?”

그리고 무릎을 꿇었다.


선생님이 유리를 쳐다봤다.

“유리씨는 어떻게 이 향이 이곳까지 올 줄 알았어요?”


유리는 힘없이 미소 지었다.

“저도 몰라요. 나무가 이미 오래전부터 이곳으로 뿌리를 뻗어 있었나봐요.”


유경이 물었다.

“언니, 우린 이제 어디로 가?”


유리는 수평선을 바라봤다.

“세상 속으로. 정유를 나누러 가야해.”


바람이 뒤에서 등을 밀었다.

그리고 그 바람은 분명 말했다.

“가라. 아직 끝이 아니다.”




4. 바다 위의 증언자들


바람이 바다를 가르며 싸늘하게 불어왔다.

유리 일행이 탑승한 작은 배는 거제도로 향하고 있었다.


밤이었다.

바다는 잔잔했지만,

사람들의 숨소리는 불안으로 거칠었다.


선생님이 작은 라디오를 켰다.

몇 번의 잡음 뒤, 익숙한 단어가 들렸다.


“정유… 그 향만 가진다면

모든 병을… 고칠 수 있어…”


목소리는 갈라지고 떨렸지만,

한 가지만은 확실했다.

정유의 존재가 세상에 퍼져있다.


하린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누군가… 우리가 가진 걸 말한 거야.”


유리의 표정이 굳었다.

누군가 터널을 떠날 때 정보를 흘린 것이다.


어둠 속에서도 백합 향은 희미하게 퍼져 있었다.

아이들이 긴장하자, 유리는 작게 기도하듯 말했다.


“괜찮아. 향은 두려움을 밀어내는 숨결 같은거야.”


그때, 후방에서 물살이 가르며 다가오는 소리가 났다.


하린이 놀라서 말했다.

“보트다… 우리를 따라오고 있어!”


선생님이 손전등을 켰다.

멀리 군용 보트 두 대가 쫓아오고 있었다.

“황명부대.”


유진이 날카롭게 외쳤다.

“언니, 정유 때문에 쫓아오는 거야?!”


유리의 손이 떨렸다.

선생님은 조용히 정유를 움켜쥐었다.


“맞아. 정유가 아니라, 힘을 가지고 싶어서.”


남자들의 목소리가 바다에 울렸다.

“정유를 넘겨라!

너희는 선택받은 게 아니야!”


향은 눈에 보이지 않았지만, 욕망은 선명했다.




5. 배신자의 등장


그때, 앞쪽 보트에서 낯익은 얼굴이 서 있었다.


준호.

터널에서 함께 지낸 청년.

유경과 농담도 하던 사람이었다.


하린이 입술을 깨물었다.

“너… 왜?”


준호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세상은 힘이 필요해.

그 향기면… 뭐든 할 수 있다고.”


유리는 고개를 저었다.

“정유는 사람을 지배하기 위한 게 아니야.”


준호가 말했다.

“넌 모르겠지? 그 향이 사람을 살리기도 하지만…

심판하기도 한다는 거.”


선생님이 경직되었다.

사람 속의 벌레들이 죽었던 장면을 준호가 본 것이다.


준호는 외쳤다.

“우린 정유로 새로운 세상을 만들 거야!”


바람이 강하게 불었다. 보트가 흔들렸다.


유리는 작은 정유병을 하나 꺼내

뚜껑을 열었다.


선생님이 놀라며 말했다.

“유리씨, 안 돼요—”


하지만 이미 늦었다. 향이 바람을 타고,

두 대의 보트 방향으로 퍼졌다.


그 순간 어둠 같았던 바다가

희미한 금빛으로 물들었다.


남자들의 얼굴이 변했다.

욕망으로 일그러졌던 표정이,

마치 거울을 보듯 스스로를 바라보게 되었다.


준호는 두 손으로 머리를 움켜쥐었다.


“이… 향은… 내 속을 비춰…”


정유는 사람을 조종하지 않았다.

자신의 진실을 보여줄 뿐이었다.


유리는 조용히 말했다.

“우리가 가진 건 힘이 아니라…

병든 사람들의 마음을 살리는 향기야.”


선생님이 뒤에서 속삭였다.

“누구에게요?”


유리의 눈동자에

물결 위로 반사된 달빛이 흔들렸다.

“세상사람들이요.”




6. 바다 위에서


정유의 향이 가라앉자

남자들은 말을 잃었다.


준호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미안해.”


유리가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제 돌아가. 너희의 길은 우리가 결정하지 않아.”


백합나무처럼 판단하는 것은 향기지만,

선택하는 것은 사람 본인의 마음이었다.


보트는 천천히 방향을 틀었다.

준호는 마지막으로 말했다.

“네 말이… 맞을지도 몰라."


유리는 바다를 바라보며 혼잣말처럼 조용히 말했다.

"누구도 강제로 깨닫게 할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향기는, 닿는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


바람이 일렁이고

밤바다 위에 정유의 향이 남았다.







9화 끝. 오늘도 구독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황명터널의 웹툰연재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링크

[연재 브런치북] 황명 터널과 빛의 아이들 :웹툰화


황명 터널과 빛의 아이들 : 네이버 웹툰


글: 유리 / 그림: 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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