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명 터널》14화

by 산여울 박유리





《황명 터널》14화 — 밤의 경계




1. 도시 외곽에서


트럭은 도시 외곽을 벗어나

작은 강가 근처에 멈췄다.


앞서 지나온 도시의 빽빽한 건물들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었다.

도로 옆으로는 낮은 풀들이 흩어져 있었고,

강가로 이어지는 흙길은 사람의 발길이 오래 끊긴 것처럼 조용했다.


근처는 조용했다.

물소리만이 흐르고 있었다.

도시의 소음, 사이렌,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

사람들의 웅성거림 같은 건 어디에도 없었다.


물살이 바위를 스치는 소리와

가끔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 잎사귀 소리만이

밤공기를 천천히 채우고 있었다.


새로 합류한 여자는

트럭에서 내리자마자 고개를 숙여 깊게 숨을 들이켰다.


차 안에 갇혀 있던 냄새가 아니라,

흙냄새와 물냄새, 풀냄새가 섞인 공기를 들이마시는 것만으로도

몸 안에 엉켜 있던 긴장이 조금씩 풀려 내려가는 듯했다.


“여기는… 살 것 같네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안도와 놀라움이 함께 섞여 있었다.

도시에서 살아남기 위해 버티던 시간과는 다른 종류의 숨.

숨이 아니라, ‘숨 쉴 수 있음’을 처음 느끼는 사람의 말투였다.


하린은 순한 미소를 보였다.

“안전하니까 쉬어요.

오늘은 여기서 밤을 보내요.”


하린의 말에는

자신도 아직 완전히 안심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곳에서만큼은 잠시 어깨를 내려놓고 싶다는 마음이 묻어 있었다.


아이들은 트럭에서 하나둘씩 내려와

강가와 트럭 사이 중간 정도 되는 곳에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담요를 펴고,

누군가는 랜턴을 준비했다.

오랜만에 ‘진짜 밤하늘 아래의 밤’을 맞이하는 느낌이었다.



2. 정유의 ‘기한’


쌍둥이 동생이 작은 수첩을 꺼냈다.


그 수첩은 이미 모서리가 많이 닳아 있었다.

터널에서부터 지금까지의 시간 동안

그가 얼마나 자주 꺼냈는지,

얼마나 자주 적었는지 말해 주는 흔적이었다.


“지금까지 사용한 정유량을 기록하고 있어.

남아 있는 양으로 계산하면…”


그의 눈은 글자 위를 빠르게 훑고 있었다.

언제 어느 마을에서 몇 방울을 썼는지,

누구의 몸에 정유를 발라 주었는지,

누가 언제 처음 향기를 맡았는지.

정유는 단순한 ‘물질’이 아니라,

사람들의 선택 기록이기도 했다.


그는 수첩을 탁 하고 닫았다.


“한 병당 한 달.

한 사람에게 머무는 시간은…

그 정도가 최대.”


그 말은 단순한 계산의 결론이 아니라,

지금까지 만나온 사람들의 변화를 관찰한 결과였다.

처음 향기를 맡았을 때와 한 달이 지났을 때,

눈빛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마음이 어디쯤에서 다시 흔들리기 시작했는지.


선생님이 조용히 물었다.


“그 말은,

기한이 지나면 다시 정유를 흡수해야 한다는 거지?”


선생님의 목소리에는

책임을 짊어진 어른의 무게가 스며 있었다.

정유가 떨어지는 날,

지금 함께 걷고 있는 아이들과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 걸까.


“네.

아까 쇼핑몰 여자를 구할 때,

그 옆에 있던 어른들 몸에 정유의 흔적이 반응하는 게 느껴졌어요.

지금은 재난 후 1달이 지났으니 그쯤 돼요.”


쌍둥이의 말은 가볍지 않았다.

그는 향기의 움직임을,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흔적’을 조금씩 감지할 수 있게 된 듯했다.


하린이 작게 중얼거렸다.


“…사람 마음속의 어둠이 다시 자라난다는 뜻인가.”


그녀의 시선은 강물이 흘러가는 곳을 향해 있었지만,

마음은 오늘 구했던 사람들, 도시의 쇼핑몰,

그리고 아직 만나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 사이를 떠돌고 있었다.


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용한 동의였다.

정유는 모든 걸 한 번에 고쳐주지 않는다.

마음의 얼어붙은 부분을 녹일 뿐,

그 이후 어떤 씨앗을 심을지는 각자의 몫이었다.


“정유는 마음 속에서 ‘멈춰 있는 곳’을 풀어주는 거야.

하지만, 그 다음은 각자의 몫이야.”


그 말은 오늘 하루를 돌아보며

유리 스스로에게도 하는 말 같았다.


멈춰 있던 곳이 풀리면

사람은 다시 선택해야 한다.

어디로 걸을지, 무엇을 붙잡을지,

다시 어둠으로 되돌아갈지, 아니면 빛 쪽으로 발걸음을 옮길지.


선생님이 유리를 바라보았다.

유리의 눈 깊은 곳엔, 흔들림이 없었다.


많은 것을 두려워하면서도,

지금 해야 할 일만큼은 선명하게 알고 있는 사람의 눈이었다.




3. 밤의 경계


모두가 트럭 옆에서 둘러앉아

작은 랜턴 불빛 아래에서 저녁을 나누었다.


랜턴 불빛은 크지 않았지만,

그 작은 빛 하나가 사람들을 한데 모으고 있었다.

누군가는 비상식량을 나누고,

누군가는 물병을 돌렸다.

강가에서 불어오는 공기는 서늘했지만,

사람 사이에서 나는 체온은 따뜻했다.


오늘 처음 함께하는 여자에게

어른이 말을 걸었다.


“이름이… 뭐였죠?”

그의 질문은 조심스러웠다.

이름을 묻는다는 건

그 사람을 단순한 ‘피난민’이 아니라

함께 길을 걷는 동행으로 받아들이겠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아린이에요.”


여자는 잠시 숨을 고르듯 쉰 후, 조용히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이름이라는 두 글자를 말하는 데도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했을지,

그 동안 얼마나 여러 번 혼자였을지 짐작할 수 있었다.


“아린 씨, 앞으로 잘 부탁해요.”

어른의 목소리에는

작은 공동체를 지키려는 마음이 담겨 있었다.


아린은 약간 머뭇거리다 말했다.

“…저도 누군가를 따라가는 건 처음이라.

두렵지만, 그래도…

혼자인 삶으로 돌아가고 싶진 않아요.”


그녀의 고백은

이 여정에 발을 올려놓은 거의 모든 이들의 마음과 닮아 있었다.

혼자는 익숙하지만,

다시 혼자가 되는 건 더 이상 견딜 수 없다고 느끼는 마음.


유리의 눈이 아린을 향했다.

짧은 시선이었지만,

그 안에는 오래전 자신과 비슷했던 어떤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우리는 누가 앞서고 뒤서고 하는 길을 걷는 게 아니에요.”

유리는 천천히, 한 단어씩 골라서 말했다.

누군가가 앞장서서 끌고 가고,

누군가가 뒤에서 쫓아가기만 하는 길이 아니라는 것.


그녀는 랜턴 불빛 속에서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우리가 가는 건 ‘한 방향’이에요.”


누가 먼저 도착하느냐가 아니라,

어디를 바라보고 걷느냐가 중요했다.

정유가 가리키는 방향,

향기가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쪽.


그 말은 단순했지만,

어둠 속에서 따뜻한 불빛처럼 느껴졌다.


누군가는 그 말을 듣고 가슴 한 구석이 조금 풀리는 느낌을 받았고,

누군가는 마음속에 있는 작은 두려움을

조금은 내려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



4. 하린의 변화


하린이 혼자 트럭 뒤편에서

정유병을 바라보고 있었다.


모두가 강가 쪽에 모여 있을 때,

하린은 조용히 자리를 빠져나왔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오는 곳,

그러나 조금은 떨어진 어둠의 가장자리.


유리가 다가갔다.

하린의 어깨 너머로

작은 정유병이 빛에 반사되어 희미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하린아. 무슨 생각해?”

유리의 목소리는 다그치지 않았다.

궁금해서 묻는 것이기도 했지만,

하린의 마음에 스스로 말을 걸 기회를 주고 싶었다.


하린이 고개를 숙였다.


손에 쥔 정유병 위로

밤빛이 얇게 내려앉았다.

“…나는 아직 잘 모르겠어요.”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뭘?”

유리는 조금 더 기다려 주었다.

마음이 단번에 정리되어 나오는 사람은 없다.


“우리는 누군가의 마음을 깨우는 일을 하는 건데,

내 마음은 아직 정리가 안 돼 있어요.”

하린의 고백은 어른스럽고도 솔직했다.

정유를 건네는 손이

언제나 확신으로 가득 찬 건 아니었다.

그저 ‘이게 옳다고 믿고 싶다’는 마음으로 움직이고 있을 뿐이다.


유리는 하린의 손을 가만히 잡았다.

그 손은 조금 차가웠지만,

손가락 사이에는 미묘한 떨림과 따뜻함이 공존하고 있었다.


“정리가 된 사람이 움직이는 게 아니라,

움직이다 보면 정리가 돼.”

유리는 자신이 걸어온 시간들을 떠올리며 말했다.

모든 답을 알고 출발한 것이 아니라,

길 위에서 수없이 넘어지고 고민하고

다시 일어나면서 조금씩 방향이 또렷해졌음을.


하린은 눈을 깜빡였다.


“…그 말, 듣기 좋네요.”

그녀의 입가에 아주 작은 미소가 떠올랐다.

바로 해결되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지금 이 상태로도 괜찮다’는 말을 들은 느낌이었다.



5. 이상한 기척


그때였다.


바람도 없는데

갈대가 사각— 흔들렸다.


잔잔했던 밤 공기 속에서

너무 갑작스러운 움직임이었다.


선생님이 즉각 반응했다.

“모두, 움직이지 마.”


아이들의 몸이 동시에 굳어졌다.

작은 기척에도 예민해진 몸은

이제 위험을 직감적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남학생 한 명이 낮게 속삭였다.

“저기… 그림자 있어.”


그의 손은 자연스럽게 정유병 쪽으로 향했고,

눈은 랜턴 불빛이 닿지 않는 어둠의 부분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랜턴 불빛 바깥,

어둠의 가장자리에서 무언가가 움직였다.


두 발로 걷는 사람의 동작과는 다른 움직임이었다.

허리를 세우고 걷는 실루엣이 아니라,

땅과 가까운 높이에서 흐르는 듯한 그림자.


발소리가 아니었다.

기어가는 소리였다.


스스스—

풀잎 사이를 비집고 지나가는,

작고 많은 것들이 한꺼번에 움직일 때 나는 소리.


그림자가 가까워졌다.


하린의 손이 유리의 소매를 살짝 잡았다.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남학생이 정유병을 손에 쥐었다.

“필요하면 뿌릴까요?”


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준비돼 있었다.

정유가 항상 마지막 수단이자,

가장 강력한 방패였기 때문이다.


유리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먼저 확인해야 해.”


정유를 아무에게나, 아무 때나 쓰는 건 옳지 않았다.

향기는 사람의 마음을 비추고, 벌레를 태우지만,

그 전에 반드시 ‘무엇을 향해 쓰는지’를 분명히 해야 했다.

그리고 낭비는 절대로 하면 안 되었다.


유리는 천천히 다가갔다.

발걸음은 조심스럽지만,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어둠이 갈라지듯 움직였다.


그리고—

작은 고양이 한 마리가 뛰어나왔다.


고양이는 겁에 질린 눈으로 사람들을 잠시 바라보더니,

트럭 바퀴 아래로 쏜살같이 숨어들었다.


모두 숨을 내쉬었다.

“깜짝이야…”


짧은 웃음과 함께 긴장이 조금 풀렸다.

그러나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선생님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고양이 뒤에...”


짧은 한마디가

다시 공기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고양이 뒤에서

사람의 발이 나타났다.


발은 맨발이었다.

바닥의 자갈과 흙에 닿아 거칠게 긁혀 있었고,

피가 말라붙어 검붉은 선들을 그리고 있었다.


온몸이 긁힌 자국으로 가득했다.


살기 위해 어디론가 기어가고, 숨어들고, 버티다가

결국 이곳까지 흘러온 사람의 몸이었다.


그리고,

그의 팔 안쪽이 검게 물들어 있었다.


그 검은 자국은 멍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가만히 보면 스스로 모양을 바꾸며 꿈틀거리는 것 같았다.


“향기가… 필요해…”

그는 간절하게 속삭였다.


목소리는 쉰 듯했지만,

그 안에는 단 한 방향의 갈망만이 가득했다.

“제발… 부탁이야…”


그는 이미 여럿에게 이렇게 말해본 적이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러나 아무도 선뜻 손을 내밀어 주지 않았을 것이다.


유리가 그를 보며 말했다.

“거기에 앉아요.

당장 병을 열진 않을 테니까.”


그의 눈이 흔들렸다.

“왜…? 나는 그 향이 필요하다고!”


그의 입술은 거칠게 흔들렸다.

지금까지 살아남기 위해

‘필요하다’고 소리쳐야 했던 시간들이 떠오르는 듯했다.


유리는 단호하게 말했다.

“향기는 구걸하는 사람에게 흘러가지 않아요.”


그 말에

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부끄러움도, 분노도, 억울함도 한 번에 올라오는 얼굴.

자신이 왜 거절당했는지,

아직 이해하지 못하는 눈.


그리고—

숨겨져 있던 그의 팔의 검은 흔적이 꿈틀거렸다.


벌레의 기척.

유리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이건 단순한 구원이 아니다.

선택이다.


밤공기가 다시 차가워졌다.



6. 검은 흔적


유리는 눈앞의 남자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의 눈은 초점이 흐려져 있었고,

팔 안쪽의 검은 흔적은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렸다.


그 흔적은 마치

남자의 마음속 어둠이 피부 위로 드러난 그림자 같았다.


하린이 속삭였다.

“…저건, 벌레들이 몸속에 있는 흔적이에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이미 여러 번 비슷한 장면을 본 사람의 두려움과

이번에는 조금 다른 느낌을 받은 불안이 섞여 있었다.


유리는 고개를 끄덕이지도, 부정하지도 않았다.

그저 눈으로 확인하고 있었다.


정유가 향해 갈 방향을,

벌레가 붙잡고 있는 마음의 깊이를.


남자는 다급하게 다가왔다.

“나, 향기가 필요해.

조금만… 조금만 맡게 해줘…”


그의 발걸음 하나하나에는

절박함이 묻어 있었다.

하지만 그 절박함이 무엇을 향해 있었는지

유리는 이미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남자의 말은 간절했다.

그러나 그 어투에는 불안보다 욕망이 앞서 있었다.


유리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왜 향기를 원하죠?”


질문은 짧았지만,

그 속에는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남자가 잠시 멈칫했다.


그는 처음 보는 질문을 받은 사람처럼

당황한 얼굴을 했다.

“살아남아야 해.

여기서… 살아야 하니까.”


살아남기 위해서.

그 말은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거기에는

그 이후의 이야기가 없었다.


유리는 고개를 살짝 저었다.

“당신이 원하는 건 ‘살아남는 것’ 뿐이죠.

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남자의 몸이 굳었다.


그 말은 정확히 그의 중심을 찌르고 있었다.

그는 누구를 지키기 위해 살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다.

언제나 ‘나’ 하나를 지키기 위해 싸웠다.


정확히 그 말이었다.

그는 자신만 살고 싶었다.








14화 끝. 오늘도 구독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황명터널의 웹툰연재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링크

[연재 브런치북] 황명 터널과 빛의 아이들 :웹툰화


황명 터널과 빛의 아이들 : 네이버 웹툰


글: 유리 / 그림: 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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