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명 터널》15화 — 검은 흔적의 움직임
1. 검은 흔적의 움직임
검은 흔적이 그의 피부를 타고
팔에서 어깨로, 목으로 천천히 기어올랐다.
실제로 벌레의 모습을 보지 못했는데도
그 움직임만으로도 등골이 서늘해졌다.
남학생 하나가 속삭였다.
“저거… 살아있는 건가요?”
벌레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 움직임은 분명히 벌레였다.
겉이 아니라, 피부 속에서.
마치 피부 아래쪽에서
수없이 많은 발이 동시에 움직이는 것처럼
희미한 굴곡이 그의 몸 위를 가로질렀다.
유리가 정유병을 가볍게 흔들었다.
남자의 눈이 커졌다.
“그래… 그거야…
그거만 있으면…”
그의 시선은 병에 고정되어 있었다.
사람을 바라보는 눈이 아니라,
무언가를 ‘소유’하고 싶어 하는 눈.
유리가 조용히 말했다.
“정유는 욕망을 채우려고 주는 게 아니에요.”
그녀의 말은
자신이 오늘 하루 내내 되뇌었던 말이기도 했다.
“욕망? 아니야… 나 그저—”
남자는 급히 변명하려 했다.
하지만 그의 말에는 여전히
‘나’라는 중심밖에 없었다.
“당신 자신만 생각하고 있어요.”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검은 흔적이 갑자기 남자의 피부 밖으로 튀어나오려고 했다.
스슥—
손목, 팔, 쇄골을 타고 기어오르더니
마치 몸을 찢고 나오려는 듯 꿈틀거렸다.
그 모습은
마치 ‘그의 안에 있던 것’이
더 이상 그와 함께 있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남자는 공포에 질려 외쳤다.
“왜… 왜 내 몸에 이런게 있는 거야?!”
그의 외침에는 크다란 두려움이 섞여 있었다.
유리는 눈을 멈추지 않았다.
“향기가 들어갈 수 없는 마음이기 때문이에요.”
그녀의 말은 냉혹했지만,
그 안에는 한 줄기 진실이 있었다.
2. 정유의 선택
유리는 정유병의 뚜껑을 살짝 열었다.
딸깍—
미세한 향기가 퍼졌다.
백합나무의 향기.
조용하지만 강한, 빛 같은 향기.
터널 속 어둠에서도,
쇼핑몰의 혼란 속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을 붙잡아 주었던 그 향기.
그 향이 닿는 순간,
남자의 피부 속 벌레가 더 격하게 반응했다.
치지지직—
마치 태워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정유가 직접 닿지 않았는데도,
향기만으로도 벌레는 조용하지 못했다.
남자가 절규했다.
“아아아아악!!
그만… 그만!!”
비명이 강가를 울렸다.
고양이가 놀라 트럭 아래로 더 깊이 숨었다.
유리는 남자의 팔에 정유를 한방울 떨어뜨렸다.
그 한 방울이 피부에 닿는 순간,
검은 흔적이 번개처럼 반응했다.
남자의 욕망, 두려움, 집착이 드러나는 만큼
벌레가 타들어 가는 듯 보였다.
탄 자국처럼 검은 흔적이 끊어지고,
그 사이로 붉은 피부가 드러났다.
그래도 몸 속에서 움직였다.
몸 깊숙한 곳에는
아직 지워지지 않은 어둠이 남아 있었다.
하린이 눈을 감았다.
그녀는 이 장면을 여러 번 봤지만,
볼 때마다 가슴이 조여 왔다.
유리는 천천히 말했다.
“향기는 마음이 열렸을 때 들어옵니다.”
그 말은 선언이자, 조건이었다.
남자는 무릎을 꿇고 어깨를 떨었다.
“…그럼… 난 어떻게 해야 돼…”
그의 목소리는 이제 욕망이 아니었다.
두려움도 아니었다.
허무.
남은 것이 없다고 느낄 때
사람은 처음으로 진짜 질문을 던지게 된다.
“난… 아무도 믿지 않았어.
처음부터… 누구도.”
남자의 고백은 길지 않았지만,
그 안에는 산처럼 많은 시간이 쌓여 있었다.
유리는 낮고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믿어야 하는 건 죄책감이 아니에요.
방향이에요.”
누굴 더 미워해야 하는지가 아니라,
이제 어디로 걸어갈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
남자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방향…?”
그의 눈에 처음으로
‘이해하고 싶다’는 눈빛이 떠올랐다.
“향기를 원하는 이유를 바꿔봐요.
자기 자신이 아니라, 누군가를 위한 마음으로.”
유리의 말은
정유를 나누며 조금씩 깨달아 가는 진실이었다.
남자는 잠시 침묵했다.
침묵 속에서
자신의 지난날이 한꺼번에 떠오르고,
그 속에서 무엇을 붙잡고 살아왔는지
천천히 들여다보게 된다.
그리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누군가를… 살리고 싶다.”
그 순간,
검은 흔적이 멈췄다.
두드러진 핏줄처럼 부풀어 오르던 흔적이
스스로 녹아내리듯 사라졌다.
그의 피부 위를 기어가던 검은 흐름이
어디론가 흡수되듯 흔적 없이 가라앉았다.
유리는 정유병의 뚜껑을 다시 닫았다.
“정유는 심판하지 않아요.
단지, 마음을 비춰서 정화를 할 뿐이죠.”
그녀의 말은
지금 이 순간을 정확히 설명하고 있었다.
남자의 어깨가 떨렸다.
“고마워…”
그 한마디에는
이름 붙일 수 없는 감정들이 뒤섞여 있었다.
3. 밤의 끝
바람은 조용했고,
강물 위의 달빛이 깔끔하게 흔들렸다.
물 위에 비친 달은
조금씩 찢어졌다가 다시 이어지기를 반복했다.
바람이 물결을 만들면,
그 위에 비친 빛도 함께 흔들렸다.
선생님이 유리에게 다가와 말했다.
“…지치지 않나요?”
그 질문은 단순한 안부가 아니었다.
이 아이가 너무 많은 것을 짊어지고 있는 건 아닌지,
어른으로서의 미안함과 걱정이 섞인 물음이었다.
유리는 미소를 지었다.
“지칠 수 없어요.
우리가 멈추면… 누군가 길을 잃으니까.”
그 미소는 씩씩함이라기보다,
이미 방향을 정한 사람이 가진 조용한 단단함에 가까웠다.
선생님은 더 말하지 않았다.
그저 그 말 속에서 무언가 단단해지는 걸 느꼈다.
그들의 밤은 다시 평온해졌다.
강가에 앉아 있는 사람들,
트럭 아래로 숨어든 고양이,
조용히 흐르는 물.
모든 것이 잠시 균형을 이룬 듯 보였다.
하지만 강 건너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그 장면을 보고 있었다.
멀리서 지켜보는 시선은
아이들의 작은 움직임 하나까지 놓치지 않으려는 듯 날카로웠다.
달빛 아래에서
새로운 위협이 움직이고 있었다.
4. 강가의 새벽, 다시 길 위에 서다
차가운 새벽 공기가 강 위를 스쳐 지나갔다.
어제까지 내던 바람과는 조금 다른,
조용하지만 단단한 결심이 섞인 공기였다.
강물은 아직 완전히 깨어나지 못한 듯
짙은 회색과 옅은 푸른빛 사이 어딘가를 머물러 있었고,
물결 위에는 밤새 흘러온 작은 나뭇가지와 낙엽들이
아무 말 없이 떠다니고 있었다.
강가에 늘어선 아이들의 숨소리가
하나둘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깊게 내려앉아 있던 잠의 호흡이
조금씩 얕아지고,
눈꺼풀 아래 떨리는 기척이 살아났다.
누군가는 몸을 웅크린 채 이불처럼 덮고 있던 외투를 정리했고,
누군가는 먼저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며
오늘 하루를 어떻게 견뎌 나가야 할지
아직도 실감하지 못한 채 멍하니 강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유리와 선생님은
아이들이 깨기 전부터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멀리, 강 건너편 산자락 위로
새벽빛이 아주 조금씩 번져오고 있었다.
하린은 아직 완전히 깨지 않은 눈으로
강 건너를 오래 바라보고 서 있었다.
그녀의 시선이 머무르는 곳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였지만,
하린은 거기에 설명하기 어려운
“무언가”가 남아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말로 붙이자면 불길함,
그러나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그림자 같은 기척.
그 감정에 이름을 붙이려고 할수록
오히려 더 흐릿해져서,
그녀는 그저 가만히 입술을 다물고 있었다가
마침내 시선을 거두었다.
“부산까지 가면…”
하린이 말을 꺼냈다.
자신의 목소리가 생각보다 더 작게 들려
다시 한 번 숨을 고르고, 조금 더 분명하게 이어 말했다.
“부산까지 가면… 우리들 집에부터 먼저 가봐요?
어쨌든… 한 번은 가 봐야 할 것 같아서요.”
그 말 속에는
보고 싶은 마음과
보고 싶지 않은 마음이 함께 섞여 있었다.
살아 있기를 바라는 마음과,
이미 비어 있을까 두려운 마음.
유리는 잠시 하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말끝이 떨리지는 않았지만,
그 눈동자 어딘가에 숨겨진 불안은
숨길 수가 없었다.
“그래.”
유리는 단호하지만 부드럽게 대답했다.
“각자의 집에 들러서 필요한 것만 정리하고,
다시 터널로 모이자.
차도 학교 앞에 두면 되겠네.
학교 앞이면… 우리 모두가 길을 알잖아.”
선생님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준비해 둔 물병을 꺼내
아이들에게 하나씩 건네기 시작했다.
“일단 물부터 마셔요.
오늘은 부산으로 갈 거니까.”
아이들이 돌아가며 물을 받아 마시는 사이,
하린은 손에 쥔 물병을 꼭 쥐고 있다가
조심스럽게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
차가운 물이 목을 타고 내려가자
밤새 뭉쳐 있던 막막함이
조금은 풀어지는 것 같았다.
어느새 그들은
열 명쯤 되는 무리가 되어 있었다.
서로의 얼굴을 처음 본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지만,
이제는 서로의 숨소리와 걸음소리만 들어도
누가 어디쯤 있는지 대략 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
서로에게 익숙해지고 있었다.
남녀 어른들과 학생들,
그리고 선생님과 유리, 유리의 쌍둥이 동생까지,
제법 인원이 많았다.
그들은 모두 불평 한 마디 하지 않았지만,
어깨에 얹힌 책임감은 무거워 보였다.
하린은 그들을 바라보다가
살짝 미소를 지었다.
“모두 함께여서… 좋아요.”
그 말은 아주 작았지만,
강가의 조용한 공기 속에서는
생각보다 또렷하게 들렸다.
유리는 하린에게 눈을 돌려
똑같이 웃어 보였다.
“우리는 돌아가는 게 아니야.”
그녀는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말했다.
“다시 준비하러 가는 거야.
예전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고…
새로운 길로 나가기 전에
꼭 챙겨야 할 것들을 가지러 가는 거지.
이제는 그렇게 살아야 할 거야.”
그 말에
아이들 몇 명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간다”라는 말 대신
“다시 준비한다”는 말을 선택한 유리의 마음이
어느 정도인지,
모두가 완전히 이해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 말 한마디만으로도
오늘 하루를 버틸 힘이 조금 더 생기는 것 같았다.
새벽빛이 조금 더 밝아지고,
강물 위의 안개가 천천히 걷히기 시작했다.
그들은 이제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15화 끝.
오늘도 구독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황명터널의 웹툰연재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링크
[연재 브런치북] 황명 터널과 빛의 아이들 :웹툰화
황명 터널과 빛의 아이들 : 네이버 웹툰
글: 유리 / 그림: 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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