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명 터널》12화 — 연료를 찾아서, 벽 너머의 눈동자
1. 연료를 찾아서
작은 마을을 떠난 뒤,
그들은 지도 위에 표시된 주유소를 향해 걸었다.
지도는 낡아 있었고 모서리는 조금 찢어져 있었지만,
그들이 가야 할 길을 알려주는 유일한 안내판이었다.
길을 따라 걷는 동안 아이들의 발걸음에는
어제보다 조금 더 단단해진 의지가 묻어났다.
연료가 있어야 더 멀리 갈 수 있었다.
걸음으로만 움직이는 여정은 한계가 분명했고,
어둠이 내리기 전까지는 어디든 도착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벌레가 나타날지도 모르는 밤을 피하고 싶었다.
정유를 나누려면
사람이 보여야 하고, 사람에게 닿아야 하고,
사람들 곁으로 가야 한다.
떨어진 마음의 조각을 붙이고
흐릿해진 눈빛에 빛을 되돌려주기 위해
그들은 계속 걷고 또 걸어야 했다.
하지만 걸어서 다닐 수 있는 거리에는 한계가 있었다.
지친 발은 버티지 못하고
숨은 금방 거칠어졌으며
아이들의 어깨에는 늘 무거운 가방이 걸려 있었다.
가방 속에는 작은 병들이 달랑거리며 흔들렸고
그 소리는 그들의 책임을 늘 상기시켰다.
“트럭이라도 하나 있으면 좋겠는데…”
남학생이 중얼거렸다.
말은 작았지만 그 안에는 간절함이 배어 있었고
모두가 그 말에 잠시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트럭 하나면 이동이 훨씬 수월해질 터였다.
하린이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
“주유소에 차가 있으면, 운전할 수 있는 사람이 있잖아.”
하린의 말에는 조심스러운 희망이 섞여 있었고
그 작은 희망은 순간 일행의 분위기를 밝게 했다.
그 말에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선생님을 돌아보았다.
마치 ‘우리의 어른은 당신뿐이에요’라고 말하듯
기대와 의지를 담은 눈빛이었다.
선생님은 두 손을 들었다.
“면허 있다고 다 운전 잘하는 건 아닙니다.
다들 너무 기대하지 마요.”
하지만 그 말 끝의 미소는
자신도 마음속으로는 도전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알려주었다.
어른들의 입가에는 작게 웃음이 번졌다.
그 웃음이
지금의 상황을 조금은 가볍게 만들었다.
오랫동안 긴장 속에 있었던 아이들은
그 미소 하나만으로도 숨을 조금 놓을 수 있었다.
2. 버려진 주유소
빌딩 사이로 붉은 지붕의 작은 주유소가 보였다.
시간이 멈춘 듯 고요하게 서 있었고
주위는 바람에 휘날린 먼지들로 뒤덮여 있었다.
누군가 마지막으로 주유소를 사용한 지 오래된 듯했다.
유리는 속도를 조금 늦추며 주변을 살폈다.
혹시라도 움직이는 그림자나
미세한 벌레의 흔적이 보일까
눈을 크게 뜨고 천천히 둘러보았다.
유리창이 깨져 있고,
기름 자국이 바닥에 굳어 있었지만…
그 자국은 마치 오래전 누군가
급하게 떠나며 남겨놓은 흔적 같았다.
트럭이 있었다.
흰색, 작은 택배 트럭.
먼지가 잔뜩 쌓여 있었지만
차체는 크게 상해 있지 않았다.
남학생이 함성을 질렀다.
“있다! 트럭 있어!”
그 목소리에는 조용히 누르고 있던 기쁨이 터져 나왔고
아이들의 얼굴에 한꺼번에 웃음이 피어났다.
하린이 손을 모았다.
“제발… 제발 시동만 걸리면…”
하린의 가슴은 두근거렸고
손끝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선생님이 운전석에 올라탔다.
먼지를 털고 조심스럽게 앉는 그의 모습은
책임감과 긴장감이 동시에 보였다.
키가 그대로 꼽혀 있었다.
그 사실만으로도 이미 절반은 성공이었다.
선생님이 숨을 들이쉬고 키를 돌렸다.
작은 주유소에 정적이 꽉 차고
모두의 숨이 동시에 멈췄다.
위이이잉—
덜컹.
모두의 눈이 촉각을 곤두세웠다.
그 짧은 순간이 마치 몇 분처럼 느껴졌다.
부릉—!
엔진이 살아났다.
거칠지만 분명히 살아 있는 힘이었다.
아이들의 환호가 주유소 전체에 울렸다.
“살아있어!!”
하린은 두 손을 머리에 올리고 뛰었다.
그렇게 아이답게 기뻐하는 모습이
오랜만이라 더 소중해 보였다.
“우리… 진짜 어디든 갈 수 있어!”
그 말에 모두의 눈빛이 반짝였다.
하지만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어른 중 한 명이 기름 게이지를 보며 말했다.
“…기름이 거의 없는데?”
유리의 눈이 바닥을 향했다.
기름 탱크 근처에서…
또 그 냄새가 났다.
어떤 냄새.
숨이 갑자기 무거워지는 듯한
찌든 고기 냄새와
축축하게 스며든 곰팡이 냄새.
하린이 속삭였다.
“…또야?”
유리와 선생님이 서로 눈을 맞췄다.
‘확인해야 한다’는
말 없는 합의였다.
“확인해 보자.”
3. 기름 탱크 아래
선생님이 철제 덮개를 들어 올렸을 때
안쪽에서 검은 얼룩 같은 것이 꿈틀거렸다.
빛이 닿자마자 그 얼룩은 스르르 몸을 숨기려 했다.
남학생 중 하나가 목소리를 낮췄다.
“저거… 정육점에 있던 그거랑… 같아?”
그 말에 아이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유리는 그 얼룩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얼룩은 마치 살아 있는 그림자처럼
느리게 꿈틀거리며 모양을 바꾸고 있었다.
하린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저게… 벌레가 사는 곳인 거지?”
하린의 손등에 식은땀이 맺혔다.
벌레는
더럽고 버려진 곳을 좋아한다.
그곳에 남은 냄새와 기억을 먹는다.
사람이 오래 머물렀다가 떠난 자리에
마음의 잔향이 남기 때문이다.
그리고…
약한 몸과 흔들리는 마음을 찾아온다.
그들은 절망의 온도를 알고
두려움의 냄새를 알고
혼자라는 감정에 가장 빨리 달려온다.
유리는 정유병의 뚜껑을 천천히 열었다.
향기는 조용했지만
순간적으로 공간을 밝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향기가 퍼지는 순간,
탱크 아래에서 꿈틀거리던 얼룩들에
한방울 똑 떨어뜨렸다.
금빛은 잠시 점으로 머물렀다가
빠르게 번져갔다.
거품이 일듯 흔들리더니…
타들어갔다.
바삭,
스르르—
누군가가 종이를 불속에 던진 것처럼.
벌레는 향기로는 죽지 않지만
정유가 직접 닿으면 사라졌다.
하린은 숨을 내쉬었다.
“…향기만으로는 … 안될까?”
그 말 안에는 작은 아쉬움이 묻어 있었다.
유리가 말했다.
“사람의 약한 마음은 향기만으로 가능해.
하지만, 벌레들은 정유에 닿아야 돼.”
그 말은 마치 정유의 법칙을 다시 한 번 되새기듯
단단했다.
남학생이 중얼거렸다.
“정유 한방울이면… 사라진다.”
그 말에 모두의 얼굴이 조금씩 밝아졌다.
한방울의 힘이
그들에게 용기가 되어주었다.
하지만 그때.
주유소 뒤편에서
낮고 묵직한 소리가 들렸다.
쿵….
두꺼운 벽을 통해 울리는 무거운 소리.
아이들은 동시에 뒤를 돌아보았다.
일행의 곁에 있던 청년이 속삭였다.
“들었어요?”
유리는 조용히 말했다.
“우리만 있는 게 아니야.”
그 말은 더 많은 경계를 요구했다.
남학생들이 정유병을 꽉 쥐었다.
정유병 안의 금빛이
그들의 손떨림을 비춘 듯 흔들렸다.
선생님이 낮은 목소리로 지시했다.
“일단 필요한 만큼 연료를 채우고
트럭을 밖으로 뺍시다.”
그러나 다시 들려왔다.
쿵… 쿵… 쿵…
마치
큰 무언가가 벽 안쪽을 두드리는 소리.
하린의 눈이 떨렸다.
“여기… 벌레들만 있는 게 아니야.”
유리가 등을 세웠다.
“누군가… 숨어 있어.”
트럭의 엔진이 다시 울렸다.
부릉—
그 소리마저 벽 뒤에 있는 존재를 자극하는 듯했다.
다음 순간,
뒤쪽 벽이 흔들렸다.
4. 벽 너머의 눈동자
쿵.
벽이 흔들리고, 먼지가 우르르 떨어졌다.
하린이 본능적으로 유리 쪽으로 다가왔다.
“저 안에… 뭐가 있는 거야…?”
그 말은 거의 속삭임에 가까웠다.
남학생 한 명이 손전등을 켰다.
빛이 벽 틈 사이를 비추었다.
그때 작은 그림자가 움찔했다.
그 순간—
벽 틈 사이로 눈 하나가 반짝였다.
초점이 흐려진 눈동자,
두려움과 경계가 뒤섞인 눈빛이었다.
하린이 비명을 삼켰다.
선생님의 손이 하린의 어깨에 스쳤고
그 가벼운 터치는 그녀를 진정시켰다.
“놀라지 마요. 사람일 수도 있어요.”
선생님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단단했다.
유리는 벽에 손을 올렸다.
벽은 오래된 목재로 덧대어진 구조였다.
누군가 안에서 바깥을 막아둔 흔적이 명확했다.
— 아니,
안에서 나가지 못한 흔적.
유리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 떨림은 불안에서가 아니라
그 사람이 얼마나 오래 그곳에 갇혀 있었을지에 대한
깊은 마음의 떨림이었다.
“저 안에 누가 있어.”
남학생 둘이 힘을 합쳐 벽을 밀어냈다.
우두둑—!
목재가 부서지며
벽 뒤 공간이 서서히 드러났다.
거기에는
한 남자가 있었다.
새카맣게 지저분해진 얼굴,
말라붙은 입술,
잠 못 이룬 눈동자.
그리고 눈 아래로 드리운 깊은 그늘.
그는 겁에 질린 짐승처럼 뒤로 물러났다.
몸을 움츠린 자세에서
그가 얼마나 오래 두려움 속에 있었는지 보였다.
“오지 마…”
남자의 목소리는 쉰 숨소리와 섞여
마치 누군가에게 매달리듯 흔들렸다.
어른 중 한 명이 다가가며 말했다.
“우린 해치러 온 게 아니라—”
남자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정유를 가지고 있지?!
나도 알아. 그 냄새… 몸이 깨끗해지는 느낌…
그걸 나한테도 줘!!”
그의 목소리에는 분노와 절망이 섞여 있었다.
그리고 희망을 갈망하는 사람만이 내는
절박한 떨림이 묻어 있었다.
하린이 움찔하며 뒤로 물러났다.
그녀의 심장 박동이 손목에서 느껴질 정도로 빨랐다.
선생님이 유리를 바라봤다.
‘어떻게 할까요?’ 묻는 눈이었다.
하지만 유리는 이미 결정을 내린 눈빛이었다.
유리는 남자를 똑바로 보았다.
사람의 눈에는,
그가 얼마나 오래 흔들리고 있었는지
한눈에 보였다.
“당신에게 향기를 줄 수 있어요.”
유리가 말했다.
그 말은 위로가 아니라
마음을 열어달라는 조용한 요청 같았다.
그러자 남자가 이를 악물었다.
“그럼 왜 숨겼어?! 왜 나를 가둔 거야?!”
유리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우리가 숨긴 게 아니야.
당신을 가둔 건… 당신의 두려움이었어요.”
남자의 표정이 굳었다.
그 말은 그의 마음을 정확히 건드렸다.
스스로도 알고 있었지만 인정하기 싫었던 진실.
“…뭐?”
유리는 천천히 정유병의 뚜껑을 열었다.
병에서 피어오르는 향기가
공기 속으로 부드럽게 퍼졌다.
향기는 조용하지만
강한 힘을 지닌 존재처럼 천천히 다가갔다.
그 순간.
남자의 몸이 움찔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그의 가슴을
사람답게 다시 두드리는 것처럼.
향기가 다가가자
남자의 눈빛이 조금씩 맑아졌다.
흐릿하던 시야가 밝아지고
분노로 젖어 있던 숨이 조금씩 고르게 바뀌었다.
절망.
두려움.
그리고 오래 묵혀진 분노.
그 속에서
작은 벌레 몇 마리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작지만 분명히 살아 있던 것들이었다.
유리가 재빨리 정유를 한방울 똑 떨어뜨렸다.
벌레들은 바로 바삭하게 타버렸다.
그 짧은 소리는 남자의 눈을 더욱 크게 뜨이게 했다.
남자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내 안에… 있었던 거였어?”
유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의 절망과 두려움이 벌레를 불렀어요.
마음이 만든 그림자예요.”
남자의 눈이 뜨겁게 흔들렸다.
“난… 누구도 믿을 수 없었어.”
유리는 조용히 대답했다.
“믿음이 아니라 선택이에요.
믿지 못해도 괜찮아요.
대신… 선택하세요.”
남자의 눈에서 눈물이 뚝 떨어졌다.
무너져가는 마음을 붙잡는 사람만이
흘릴 수 있는 눈물이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정유병을 받아들었다.
“살고 싶어요.”
그 한마디는 모든 것을 내려놓는 고백이었다.
유리는 미소도 없이 조용히 대답했다.
“그럼 함께 가요. 정유가 있는 곳으로...”
트럭의 엔진 소리가 다시 울렸다.
부릉—
그 소리는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신호처럼 들렸다.
남자는 트럭 뒤편에 몸을 실었다.
아직 완전히 회복된 눈은 아니었지만,
그 속에 희미한 빛이 생겨 있었다.
그 빛은 금방이라도 사라질 듯 약했지만
그래도 분명히 ‘희망’이었다.
선생님이 운전석 옆에서 말했다.
“이제 어디로 가죠?”
유리는 트럭 앞 유리를 바라보았다.
바람이 불었고,
햇빛이 도로 위를 길처럼 비추었다.
“이제 도시로 가요.
시골에도 바이러스가 번졌다는 사실을 알았으니,
이제 다른 도시도 살펴봐야 해요.”
향기가 필요한 곳은
아직 너무 많으니까.
트럭이 도로 위로 나아갔다.
햇빛은 점점 강해졌고
아이들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다.
그리고 그 순간—
멀리서 그들을 바라보는 어두운 시선 하나가 있었다.
12화 끝. 오늘도 구독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황명터널의 웹툰연재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링크
[연재 브런치북] 황명 터널과 빛의 아이들 :웹툰화
황명 터널과 빛의 아이들 : 네이버 웹툰
글: 유리 / 그림: 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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