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기간 조퇴 후 작성하는 별거 아닌 습작
눈을 떴을 때 이미 이 방이었다.
어떻게 왔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차를 탄 것 같기도 하고. 누군가 부축했던 것 같기도 하고. 하얀 천장. 나무 냄새. 멀리서 목탁 소리. 그것들이 처음 느낀 것들이었다. 그때는 물어볼 힘도 없었다. 물어볼 마음도.
창밖에 눈이 쌓여 있었다. 나뭇가지에서 가끔 눈 부스러기가 떨어졌다. 그것을 눈이 내린다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다.
나는 식은 차를 마시며 창밖을 봤다. 방 앞에 놓여 있던 차였다. 눈을 떴을 때 이미 거기 있었다.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사흘쯤 지나니 익숙해졌다. 인간은 대부분의 것에 익숙해진다. 커피가 없는 아침에도, 새벽 네 시의 목탁 소리에도.
창 너머로 나무가 보였다. 붉은 열매를 잔뜩 달고 서 있었다. 눈 위의 빨간색. 마치 흰 종이 위에 누군가 빨간 물감을 뿌려놓은 것 같았다. 의도가 있는 건지 없는 건지 알 수 없는 그런 그림.
저 나무가 무슨 나무인지 알아야 할 것 같은데, 알고 싶지 않았다. 가까이 가면 알게 될 것이다. 알게 되면 저 나무는 그냥 그 나무가 된다. 지금처럼 이름 없이 붉은 채로 서 있는 게 나았다.
차가 완전히 식었다. 나는 그것을 천천히 마셨다. 떫은 향이 났다. 어릴 때 맡았던 냄새와 비슷했다. 아버지가 피아노를 조율할 때 옆에서 맡던 냄새. 송진과 먼지와 오래된 나무. 그 생각을 하다가 멈췄다. 거기까지 가면 다른 것들도 따라온다.
멀리서 목탁 소리가 들렸다. 라 음이었다. 440 헤르츠. 아버지가 늘 말하던 기준음. 세상의 모든 악기가 거기에 맞춰진다고. 쓸데없는 걸 기억하고 있었다. 목탁 소리를 듣고 주파수를 떠올리는 사람이 또 있을까. 아마 없을 것이다.
눈은 녹지 않았다. 열매는 여전히 붉었다. 나는 여전히 여기 있었다.
그것만으로 충분한 아침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일단은 그것뿐이었다.
여기 온 지 일주일이 됐다.
정확히는 모른다. 처음 며칠은 셀 수 없었다. 눈을 떴다 감았다. 그 사이에 해가 뜨고 졌다.
서른다섯. 숫자로는 그렇다. 핸드폰은 방 한쪽에 있었다. 충전기에 꽂힌 채로. 누가 꽂아뒀는지 모르겠다. 저장된 연락처는 백 개가 넘을 것이다. 지금 전화할 수 있는 번호는 없었다.
스님을 본 적은 거의 없었다. 새벽에 목탁 소리가 들리고, 문 앞에 공양이 놓여 있고, 가끔 마당을 지나는 회색 옷자락이 보일 뿐이었다. 이 절에 스님이 몇 명인지 나는 몰랐다. 알 필요도 느끼지 못했다.
저 열매들은 왜 겨울에 저렇게 붉을까. 눈 속에서 버티고 있는 건지, 아니면 눈이 있어서 더 붉어지는 건지. 새들이 먹으러 오지 않는 것을 보면 맛은 없는 모양이다. 그럼 누구를 위한 빨간색일까.
아버지는 피아노 건반 위에 붉은 펠트 천을 깔아 두곤 했다. 왜 빨간색이냐고 물었다. 눈에 잘 띄어서,라고 했다. 해머가 어디 있는지 바로 알 수 있어서. 그때는 이해하지 못했다. 지금도 이해하는지 모르겠다. 다만 저 열매를 볼 때마다 그 천이 떠올랐다. 이유는 모르겠다.
병원 복도를 걸었던 기억이 났다. 두 번. 같은 복도를. 석 달 간격으로. 두 번째 걸을 때는 발이 땅에 닿는 느낌이 없었다. 누군가 서류를 내밀었다. 펜을 쥐어줬다. 사인했다. 무슨 서류인지 읽지 않았다. 읽을 힘이 없었다. 그 뒤로 기억이 끊겼다. 눈을 떴을 때 이미 여기였다.
문 앞에 공양과 함께 쪽지가 놓여 있었다. '뒷산에 산책로가 있습니다.' 그것뿐이었다.
오솔길은 눈에 덮여 있었다. 누군가 먼저 걸어간 발자국이 있었다. 나는 그 발자국을 따라 걸었다. 내 발자국도 그 위에 겹쳐졌다. 곧 또 눈이 오면 전부 지워지겠지. 발자국이란 그런 것이다. 남는 것 같지만 남지 않는다.
왼손 약지에 아직 자국이 남아있었다. 반지가 있던 자리. 살이 패인 것처럼 움푹했다. 그것도 곧 사라지겠지.
침엽수들이 양쪽으로 늘어서 있었다. 소나무인지 잣나무인지 몰랐다. 다만 키가 크고, 곧게 서 있고, 눈을 이고도 휘어지지 않았다.
나무 사이로 햇살이 비쳤다. 빛줄기가 눈 위에 선명하게 내려앉았다. 마치 누군가 손전등을 비추는 것 같았다. 여기 있다, 여기를 봐라. 하지만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냥 눈이었다. 그냥 빛이었다.
아무것도 없는데 빛이 있다는 것. 그게 마음에 들었다.
걷다 보니 숨이 찼다. 체력이 떨어졌다. 당연한 일이다. 석 달 동안 거의 누워만 있었다. 아침에 눈을 뜨는 것. 그게 하루의 전부인 날들이 있었다.
멈춰 서서 숨을 골랐다. 입에서 하얀 김이 나왔다. 그것을 보고 있으니 내가 살아있다는 게 실감 났다. 평소에는 그런 걸 느끼지 못한다. 숨을 쉬고, 심장이 뛰고, 피가 돌고 있다는 것. 그런 건 당연해서 생각하지 않는다.
더 올라갔다.
숲이 끝나고 바위가 많아졌다. 나무들도 달라졌다. 키가 작아지고, 색이 변했다. 붉은 잎들이 눈 사이로 삐죽삐죽 솟아 있었다. 겨울인데 가을 색이 남아 있었다.
고개를 들었다. 산봉우리가 보였다. 하얗고, 날카롭고, 멀었다. 바위가 눈 사이로 검게 드러나 있었다. 마치 뼈 같았다. 산의 뼈.
바람이 불었다. 차가웠다. 살갗을 베는 것 같은 추위.
나는 거기 서서 봉우리를 봤다. 올라갈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장비도 없고, 체력도 없고, 무엇보다 그럴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보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저기에 저런 게 있구나. 그 사실만으로.
일 년 전에는 저런 것을 볼 시간이 없었다. 볼 생각도 없었다. 눈앞에 있는 것들만 봤다. 숫자들. 계약서들. 사람들의 얼굴. 그것들이 전부인 줄 알았다. 그것들이 사라지면 나도 사라지는 줄 알았다.
사라지지 않았다. 전부 사라졌는데 나는 여기 서 있다. 산 중턱에. 눈 위에. 숨을 쉬면서.
마지막으로 봉우리를 봤다. 저건 내가 갈 수 없는 곳이다. 너무 높고, 너무 멀고, 너무 차갑다. 하지만 거기 있다는 건 알게 됐다. 봤다. 그건 사실이다.
나는 돌아섰다.
내려가는 길은 올라갈 때보다 빨랐다. 당연한 일이다. 중력이 있으니까.
다만 마음은 좀 달랐다. 올라갈 때는 무거웠는데 내려올 때는 조금 가벼워진 것 같았다. 왜인지는 모르겠다. 딱히 뭔가 해결된 건 없다. 생각이 정리된 것도 아니다. 그냥 걸었을 뿐이다. 그냥 봤을 뿐이다.
절의 지붕이 나무 사이로 보이기 시작했다. 붉은 열매가 달린 나무도 보였다. 여전히 이름을 모르는 나무.
절에 돌아오니 누군가 마당에 서 있었다. 스님인 것 같았다. 회색 옷을 입고 있었다. 여기 온 뒤로 사람을 이렇게 가까이서 본 건 처음이었다.
"산에 다녀오셨습니까."
물음표가 없는 문장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상까지는 못 갔습니다."
"정상까지 가서 돌아오신 분은 없습니다."
스님이 종이 한 장을 건넸다.
"이용료입니다."
127,400원. 이상하게 구체적인 숫자였다.
"절에서 이용료를 받습니까?"
스님은 어디선가 카드 단말기를 꺼냈다. 편의점에서 보던 것과 똑같은 기계. 카드를 긁었다. 승인 완료. 영수증이 나왔다. '(주)리셋라이프 산사힐링센터'.
"따라오십시오."
절 뒤편에 작은 건물이 있었다. 일주일 동안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곳이었다.
기계들이 있었다. 서버 같은 것들. 모니터 여러 대. 한쪽 벽에 스케줄표가 붙어 있었다. 내 이름이 있었다. 옆에 'D-2'.
모니터 하나에 내 방이 찍히고 있었다. 빈 방. 내가 아침에 갠 이불. 화면 하단에 글자가 떠 있었다. '피험자 037 - 체험 7일 차 - 감정 안정도: 47% → 62%'.
"보여드리는 게 프로그램의 일부입니다."
뒤에서 스님이 말했다. 목소리가 달랐다. 아까보다 평평했다.
"7일 차에 대부분 이 단계에 도달하십니다. 질문이 생기고, 무언가 이상하다고 느끼기 시작하는 시점입니다."
스님은 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냈다. '(주)리셋라이프 / 사회 재적응 프로그램 운영 / 김현수'.
"저는 왜 여기 있습니까."
"병원에서 서명하셨습니다. 석 달 전에."
기억이 났다. 펜을 쥐어줬다. 사인했다. 무슨 서류인지 읽지 않았다.
"대출 연체, 이혼, 직계가족 사망. 두 가지 이상이 겹치면 자동으로 시스템에 등록됩니다. 선생님은 세 가지 전부였습니다."
나는 창밖을 봤다. 붉은 열매가 보였다.
"저 나무는요."
"산수유입니다."
처음 알았다. 일주일 동안 몰랐던 이름.
"눈은요. 목탁 소리는요."
김현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말했다.
"환경은 저희가 제공합니다. 하지만 선생님이 느낀 것들은 선생님의 것입니다."
그날 밤, 잠이 오지 않았다.
방 천장을 봤다. CCTV가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도 찍히고 있겠지. 숫자로. 퍼센트로.
아침에 봤던 빛줄기를 생각했다. 숲 속에서, 아무것도 없는 곳을 비추던 빛. 내가 거기 서서 그것을 봤다는 건 사실이다. 아름답다고 느꼈다는 것도.
아버지가 피아노를 조율할 때, 나는 옆에서 듣곤 했다. 똑같은 음을 수십 번 치고 또 쳤다. 무슨 차이가 있냐고 물었다. 아버지는 웃기만 했다. 나중에야 알았다. 차이가 있다. 듣는 사람에게만. 아버지에게는 440 헤르츠와 441 헤르츠가 완전히 다른 세계였다. 나에게는 똑같았다. 하지만 아버지가 듣는 세계가 가짜인 건 아니었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창밖을 봤다.
눈이 쌓여 있었다. 일주일 동안 눈을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봤지만 보지 않았다. 오늘 아침에야 처음으로 눈을 '봤다'.
붉은 열매가 보였다. 산수유. 이제 이름을 안다. 알고 나니 다르게 보일 줄 알았다. 다르지 않았다. 여전히 빨갰다.
산에 올랐다. 오솔길을 걸었다. 발자국이 찍혔다. 나무 사이로 빛이 비쳤다. 눈 위에 내려앉으면 반짝였다.
바위에 앉았다. 어제 앉았던 자리. 산봉우리가 보였다. 멀고, 하얗고, 날카로웠다.
한참을 앉아 있었다. 차가웠다. 손가락이 저렸다.
아침에 김현수가 찾아왔다. 오늘은 스님 옷을 입지 않았다. 검은색 패딩에 청바지.
"오늘이 마지막 날입니다. 연장 신청하실 수 있습니다."
나는 창밖을 봤다. 오늘은 눈이 내리지 않았다. 하늘이 파랬다.
"여기 온 사람들. 서른일곱 명. 다들 어떻게 됐습니까."
김현수는 잠시 뜸을 들였다.
"서른두 명은 돌아갔습니다."
"나머지는요?"
"두 분은 연장 중이십니다. 한 분은 정상 근처 시설에 장기 체류 중이시고."
"두 명이요. 나머지 두 명은요."
김현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짐을 쌌다. 옷 몇 벌. 그게 전부였다.
핸드폰을 들었다. 전원을 켰다. 화면이 떴다. 부재중 전화 47통. 문자 31개. 숫자들이 쏟아졌다. 나는 화면을 끄고 주머니에 넣었다.
방을 나서기 전에 창밖을 한 번 더 봤다. 산수유. 빨간 열매. 눈 위에서 선명했다.
마당으로 나갔다. 김현수가 기다리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말했다.
"기록은 보존됩니다."
김현수가 말했다. 인사인지 경고인지 알 수 없었다.
산을 내려갔다.
삼십 분쯤 걸었을까. 버스 정류장이 나왔다. 낡은 벤치. 시간표. '시내행 - 매시 정각'.
벤치에 앉았다. 버스를 기다렸다. 하늘을 봤다. 파랬다. 구름이 떠 있었다. 하얗고, 천천히 움직이고, 가끔 햇빛을 가렸다.
버스가 왔다. 올라탔다. 빈 좌석에 앉았다. 창밖을 봤다. 산이 멀어지고 있었다.
창밖으로 나무들이 지나갔다. 겨울나무. 잎이 없었다. 열매도 없었다. 가지만 앙상하게 남은.
버스 손잡이를 잡았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
버스가 달렸다. 엔진 소리가 들렸다. 어딘가로 가고 있었다.
목탁 소리가 떠올랐다. 라 음. 440 헤르츠. 아버지는 그 음을 수천 번 들었을 것이다. 매번 조금씩 달랐을 것이다. 나에게는 똑같았다. 하지만 아버지에게는.
창밖으로 전봇대가 지나갔다. 일정한 간격으로. 하나, 둘, 셋. 세다가 그만뒀다.
눈을 감았다.
버스가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