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작 4

by 동네과학쌤

커피 향이 퍼졌다.

새벽 여섯 시. 희석은 불도 켜지 않은 채 원두를 갈았다. 그라인더의 진동이 손을 타고 팔뚝까지 전해졌다. 바깥은 아직 희미했고, 간판도 꺼져 있었다.


이 커피는 손님용이 아니었다.

드리퍼에 물을 천천히 부었다. 원을 그리며. 서둘 이유가 없었다. 첫 손님은 두 시간 뒤에나 올 것이다. 아니, 올지조차 알 수 없다. 방학이었다.

물줄기가 떨어지며 향이 피어올랐다. 코끝에서 머물던 향이 조용히 번졌다. 이런 시간에만 느낄 수 있는 농도였다. 손님 주문에 쫓길 때는 맡아본 적 없는 향이었다.


2년 전, 희석은 판교에서 일했다.

새벽 두 시 퇴근, 여섯 시간 수면, 다시 출근. 어느 날 키보드 위에서 손이 떨렸다. 커서가 깜빡이는 걸 보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날 이후 회사를 그만뒀다. 프리랜서로 전향하고 카페를 떠돌았다. 커피값이 한 달에 사오십만 원. 계산을 해보니 월세와 별 차이가 없었다. 그래서 가게를 냈다. 처음엔 외주 코딩과 병행할 생각이었다. 손님 없을 때 일하면 된다고. 그러나 손님이 없으면 걱정이 생겼고, 손님이 오면 일을 못 했다. 외주는 하나씩 끊겼다. 카페가 본업이 됐다. 선택은 아니었다.


커피가 다 내려졌다.

희석은 컵을 들고 창가에 섰다. 셔터가 내려간 가게들과 학교 사이로, 저 멀리 24시간 카페의 불빛이 보였다. 노트북 펼친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2년 전의 자기 모습이 겹쳐 보였다.

한 모금 마셨다. 쓴맛이 먼저, 고소함이 뒤따랐다. 삼키고 난 뒤에도 향이 남았다.


반경 500미터 안에 카페가 아홉 개다. 그중 여섯 개는 자신보다 뒤에 생겼다. 먼저 생긴 세 곳 중 하나는 지난달 문을 닫았다.


알바를 써야 한다는 건 안다. 오픈부터 마감까지 혼자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도. 그러나 계산하면 적자다. 알바를 쓰면 돈이 빠지고, 안 쓰면 몸이 빠진다. 어느 쪽이든 마이너스였다. 손은 거칠어졌고, 물기와 세제 냄새가 피부에 배었다. 희석은 컵을 내려다봤다. 커피가 반쯤 남아 있었다. 향은 여전했다. 모든 숫자는 빨간색인데, 향만은 그렇지 않았다.


아버지도 장사를 했다. 철물점. 희석의 초등학생부터 고등학생까지의 시간이었다. 어느 날 근처에 대형마트가 들어왔고, 아버지는 1년 버티다 문을 닫았다. 그 마지막 날에도 아버지는 평소처럼 면도하고 와이셔츠를 입었다. 빈 가게에서 하루를 앉아 보냈다. 희석이 학교 끝나고 갔을 때, 아버지는 카운터 의자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손에는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았다. 기름 냄새, 철 냄새. 십 년 넘게 배어든 가게의 냄새였다. 그 냄새는 가게가 사라지는 날까지도 지워지지 않았다.


희석은 코끝에 남은 커피 향을 의식했다. 강렬하지 않지만 오래 남는 향. 천천히 스며드는 향.

이 가게도 언젠가 이런 향을 갖게 될까. 벽에, 테이블에, 의자에. 문을 열면 누구라도 느낄 수 있을 만큼 배어들 때까지.


그때까지는.


핸드폰이 울렸다.

카드사 매출 정산 알림. 화면을 확인한 뒤 뒤집어 놓았다.

여섯 시 십오 분.

희석은 식어버린 커피를 마저 들이켰다. 향은 거의 날아간 뒤였다.

싱크대에 컵을 내려놓고 불을 켰다. 가게가 환해졌다. 간판 스위치를 올리고, 문 앞 보드를 챙겼다.


오늘의 원두

에티오피아 예가체프

─은은하고, 오래 남는

마지막 줄을 보다가 지웠다. 분필을 다시 들었다.

그윽한


손님에게는 별 의미 없는 단어일 것이다. 지우려다 멈췄다.

자기가 알면 됐다.

희석은 문을 열었다. 차가운 공기가 스며들었다.


하루가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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