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성, 물질대사, 우리 몸의 기능...
열일곱 살, 고등학교 생물경시반에 들어갔을 때부터
이 단어들은 내 일상에 있었다.
약 20년 동안 생명과학을 공부하고 가르치며
나는 이 단어들을 수도 없이 읽고 쓰고 말하고 들으며 사용했다.
이공계는 해당 분야 박사가 아닌 이상 비전공자라 생각하기에 나는 생명과학에 대한 비전공자라 생각한다.(생물교사는 이과가 아니라 문과라 주장한다.) 그래도 일반인 중에선 생명과학에 대해 많이 아는 편에 속한다고 생각했다.
대사성 증후군, 비만, 고혈압, 암, 가족력, 유전, 후성유전학, 질병...
생물교사가 된 이후에는
메디컬 계열 진학을 꿈꾸는 학생들, 질병을 해결하고 싶다며 연구자를 희망하는 학생들을 가르치며 매년 다양한 질병의 원인, 기작, 증상, 치료방법 등을 듣고 읽었다.
학생들을 지도하기 위해, 혹은 학생들의 작성 내용이 옳은지 팩트체크를 위해 논문을 읽고, 자료를 찾고, 수업 자료를 만들며 질병에 대해서도 교양이 늘어갔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2025년 7월,
나는 고혈압 약을 먹기 시작했다.
그리고 2026년 1월,
갑상선암 확진을 받았다.
그 사이에 특별한 사건은 없었다.
갑작스러운 통증도, 극적인 증상도 없었다.
어제와 오늘의 나는 똑같은데 어느 순간 갑상선암특례 대상자가 되었다.
검사 결과지와 소견서에 적힌 글자만으로 그렇게 병이 증명되었다.
나는 그 말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진단서와 소견서 없이도 유전자 돌연변이 검사 결과지의 유전자 돌연변이를 확인할 수 있었고, 어느 유전자의 어느 염기의 변형으로 어떤 아미노산이 바뀌는지 이론 수업도, 이걸 알아보는 실험 수업도 수행평가도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추적검사 결과 나온 결절의 크기 변화를 가지고 결절 부피의 변화량, 세포 수의 변화, 세포 분열 속도 추정에 따른 발병 시기 등등을 따져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초음파 검사를 통해 일반적으로 발견된 결절이 양성이니 조직검사 전엔 모른다는 진단센터 의사의 말에도 달걀 모양이 아닌 타원형의 결절, 미세한 흰색 무늬, 타원의 절반은 가시 모양으로 보이는 결과 사진만으로 이거 암인데? 란 생각이 들었다.
이론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론만 알고 있었다.
짜증도 났지만, 보호자를 데려와야 한다는 전화에 혹은 그전 초음파 검사 기록지를 보며 짐작했기에 담담했다.
한편으론 배운 내용을 써먹는다니, 배운다는 건 세상의 해상도가 높아지는 것이라더니 흥미롭다는 생각도 들었다.
확진 판정을 기다리며 12월에 조직 검사를 받던 날, 세침검사를 받으면서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확진이 되면 2026년에는 투병기를 한 번 써볼까.
곧바로 이어진 생각은 그리 호의적이지 않았다.
일반암도 아니고, 중증이라고 말하기도 애매한데
이걸 투병기라고 부르는 건
괜히 유난을 떠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 정도 일을 두고 글을 쓰는 게 맞나, 너무 관종인가 싶은 마음도 들었다.
그러다가도 글 쓰던 중에 좋지 않은 일이 생기면 이런 글이 유작...? 별론데 수술하고 완치되면 쓸까 싶은 마음도 들었다.
그러다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그렇다면 굳이 투병기가 아니어도 되지 않을까. 어차피 책으로 낼 것도 아닌데...
어차피 생물교사이고,
그동안 암과 질병에 대해 수도 없이 읽고 가르쳐왔으니
전공을 살려 암과 유전 이야기를 써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결국 내가 쓰는 글은 언제나 그 시기 나의 관심사와 내 이야기이다 보니, 어떤 형식으로든지 내 건강 상태에 대한 글을 쓰게 될 것 같았다.
그럴 거라면 기억이 생생할 때 쓰자 싶어 져서 쓰게 되었다.
이건 투병기도 아니고, 그렇다고 칼럼도 아니며
완전한 보고서도 아닐 것 같다.
대략 일기 같기도 하고, 리포트 같기도 하고,
때로는 수업일지나 업무매뉴얼 혹은 보험 설계안 같은 무언가가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