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와 속삭이는 기억

by 동네과학쌤

스무 해 전, 그 밤바다 앞에 섰을 때 내 귀는 오직 너의 목소리와 파도 소리만을 담았다.
칠월의 늦은 밤, 짭짤한 바닷바람이 뺨을 스쳤고, 네 손을 처음 잡았던 그 순간의 온기가 아직도 남아 있는 듯했다.

“바다 소리, 좋지?”
네가 속삭이던 그 말은 파도의 리듬에 실려 내 안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때는 정말 바다였다.
너와 나, 그리고 맑고 투명한 파도 소리만이 존재하던 세계.
모든 것이 생생했고, 맑았고, 선명했다.

시간은 강물처럼 흘러 나를 도시의 한복판에 데려다 놓았다.
매일 밤 퇴근길, 지하철 1호선 막차의 바퀴가 레일을 긁는 소리는 어느새 내 일상의 배경음이 되었다.
눈을 감으면 그 굉음이 이상하게도 파도 소리로 들리는 듯했다.
밀려오고 밀려가는 반복의 리듬.
철로 위를 구르던 차가운 쇳소리가 오래된 기억의 파도를 일으켜, 스물의 내가 서 있던 바닷가를 다시 떠오르게 했다.

그리고, 마침내 다시 찾은 그 밤바다.
스무 해 전의 그 자리. 나는 파도를 기다렸다.

밀려오는 소리. 분명 파도인데, 그 안에 무언가 섞여 있다.
편의점 자동문의 ‘삑’ 하는 소리, 멀리서 들려오는 에어컨 실외기의 낮은 진동음, 바닷가 인근 호텔의 배기 장치 소리까지.
조개껍데기 부딪히는 소리도 더 이상 청량하지 않았다.
그 소리는 오히려 딱딱하고 무감각하게 들렸다.
마치 나를 향해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했지만, 나는 그 언어를 더 이상 이해하지 못했다.
내 귀는 도시의 주파수에 길들여졌고, 바다는 낯설게 다가왔다.
도시가 내 청각의 필터가 되어 버린 것이다.

너의 손을 잡았던 이 모래 위에서, 나는 더 이상 순수한 소리를 듣지 못한다.
파도는 여전히 같은 리듬으로 노래하고 있지만, 그 소리를 듣는 나의 귀는 달라져 있었다.
첫사랑의 기억은 여전히 아름답지만, 그 기억을 감싸던 감각의 맑음은 사라졌다.
스무 해 전 너와 나 사이로 흐르던 그 투명한 음은, 지금 이곳에서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다가온다.

모든 기억은 결국, 감각 위에 다시 쓰인다.
나는 더 이상 예전의 바다를 들을 수 없지만, 낯선 감각 속에서 오래된 빛이 어렴풋이 살아나는 순간들이 있다.
우리는 그렇게, 익숙한 소음 속에서도 잊지 못하는 추억 속 감각을 품고 살아간다.
낡은 소리의 기억은 도시의 소음과 겹쳐지며 전혀 새로운 감각을 빚어낸다.
기억은 파도처럼 다시 닿고 마는 것이다.
한순간 밀려왔다가 잊히는 듯하지만, 다시 돌아와 마음을 적신다.

밤바다는 여전히 똑같은 노래를 부른다.
바뀐 건 나일뿐이다.
그 시간의 거리만큼, 나는 어른이 되었다.
순수함을 잃는 것이 성숙의 대가라면, 나는 그 값을 치른 것이다.

이제 내 안의 파도 소리는 도시의 소리와 함께 존재한다.
지하철 소리 속에서 바다를 그리워하고, 바다에서 도시를 듣는다.

나는 오늘 밤도 바다와 도시를 파도처럼 오간다.
너와 나의 찬란했던 기억은 이제 저 멀리 수평선처럼 아득하지만, 그 빛이 지금의 나를 여전히 비춘다.
파도는 같은 리듬으로 밀려오고,
나는 그 안에서 한때의 빛을 다시 만난다.

그래도 괜찮다.
도시의 소음 속에서도, 나는 너와 나의 기억을 끝내 길어 올린다.
그 감각 또한, 지나온 시간을 이해하게 만든 한 조각의 파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