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을이 기억하는 시간

by 동네과학쌤

오늘도 노을을 보려고 창가에 앉는다. 하루 종일 바쁘게 살다가도 해가 질 무렵이면 잠시 모든 것을 멈추고, 창가에 앉는다. 붉은 물감이 파란 하늘 가득 번져가는 다채로운 색채 앞에서 시간의 경계가 흐려진다. 과거와 현재가 한 덩어리가 되어 내 앞에 떠오른 후 노을빛에 스며들어 흩어지듯 사라진다.


노을을 보면 자꾸 옛일이 떠오른다. 어린 시절에도, 대학생일 때도, 힘들었던 시절에도 노을은 늘 그 자리에 있었다.


어린 날의 노을은 할머니 손등을 닮았다. "얘야, 밥 먹자" 밭일을 마치고 돌아오신 할머니의 목소리가 작은 창문으로 스며드는 따스한 황금빛 노을과 함께 부엌을 가득 채웠다. 할머니의 구부정한 등과 분주한 손놀림, 된장찌개 끓는 소리와 마늘 볶는 향, 그리고 멀리서 들려오는 아버지의 발걸음 소리... 모든 것이 어우러져 집 안 가득 따스한 기운이 번졌다. 그때 노을은 집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창 너머로 같은 노을이 내려앉는다. 매일 뜨고 지는 태양이지만 오늘의 노을은 어제와 다르고, 내일의 그것과도 다를 터이다. 붉은색에서 주황으로, 주황에서 짙은 자줏빛으로 변해가는 하늘을 바라보며, 나는 이 순간에 머문다. 과거의 기억들이 노을빛에 떠오르다가도, 곧 현재의 감각으로 다시 수렴된다.


대학 시절, 동아리 활동 후 운동장 스탠드에서 친구들과 함께 보던 노을. 졸업 후엔 뭘 하며 살까, 어떤 사람이 될까, 그런 질문들 사이로 풋풋한 열기와 함께 분홍빛 노을이 스며들었다. 그때의 나는 노을을 대화의 배경으로만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이제는 안다. 노을이 단순한 배경이 아니었음을.


이 창가에서 나는 노을과 마주한다. 분석하지 않고 해석하지 않고 그저 바라보고자 한다. 창틀에 기댄 팔꿈치가 따스하다. 햇살이 식어가는 시간, 나는 여기 있다. 창문에 비치는 내 얼굴과 저 하늘의 오묘한 보랏빛이 하나로 겹쳐지는 순간, 주체와 객체의 경계마저 아득해진다.



교사가 되기 위해 시험을 준비하던 20대 후반이 있었다. 과외를 하며 생계를 이어가던 시절. 하천을 따라 학생네 집으로 가는 길에 벚꽃이 한창이었고, 벚꽃잎 사이로 스며든 노을을 보았다. 친구들은 이미 직장에 안착했고, 나만 여전히 시험을 준비하며 하루하루를 버텨내고 있었다. 학생과 학부모 외에는 사람을 만날 일도, 다른 사람과 말할 일도 없었다. 몽환적인 연보랏빛 노을이었다. 나도 모르게 무심결에 사진을 찍었다. 그날, 사진 속 노을은 당시 나처럼 아무 말이 없었지만, 가끔 그 사진을 찾아보곤 하였다.


늦었다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가장 필요한 시간을 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 시절의 막막함 속에서도 다음 날 아침은 변함없이 찾아왔고, 노을은 매일 저녁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랜 연인과 헤어지던 그날도 있었다. 카페에서 나온 후 혼자 걷던 길에서 바라본 노을. 5년의 시간이 견고하게 엮어놓았던 것들이 한순간에 풀어져 내리는 것을 지켜본 후였다. 서로의 깊이를 알기에 더 이상 닿을 수 없는 모순적인 시간이었다. 우리는 결국 맞잡았던 손을 놓았다. 그날 노을은 붉은색이었다. 관계가 끝났다고 해서 그 시간이 무의미해진 건 아니라는 생각이 노을을 보며 문득 들었다.


이 순간에 모든 기억이 현재로 흘러든다. 과거의 노을들이 이 노을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갖는다. 어린 시절의 그리움도, 청춘의 열망도, 사랑의 아픔도, 상실의 슬픔도, 모두 이 순간의 노을 체험 안에서 하나가 된다. 할머니가 끓이던 된장찌개 냄새가 난다. 부엌에는 아무도 없는데.


창 너머 하늘이 점점 어두워지고, 노을의 마지막 빛줄기가 지평선 너머로 사라져 간다. 하지만 나는 안다. 이 순간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임을, 내일 또 다른 노을이 나를 기다리고 있음을. 그리고 그때도 나는 지금처럼 온전히 그 순간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어둠이 완전히 내리면 노을의 잔상이 내 망막에 남는다. 보이지 않지만, 여전히 존재하는 빛의 기억. 나는 창문을 닫는다. 그러나 노을은 시간을 초월하고 기억을 가로질러, 이 순간 내 존재의 일부가 되어 내 안에 머무른다.


평범함이 지속되면 비범해진다는 중학교 시절 수학 선생님의 말씀처럼, 창가에 서서 노을을 바라보는 이 평범한 순간이, 실은 가장 비범한 순간이었을까? 특별한 것을 찾아 헤매던 내게 노을은 말없이 속삭인다. 손끝에 닿는 햇살처럼, 귓가에 스치는 바람처럼, 지금 여기에 무언가가 피어나고 있다고. 사라지는 모든 것 속에서 노을이 드러내는 아름다움, 일과를 마무리 짓는 시간이지만 반드시 또 새로운 시작이 있을 거라는 확신에서 오는 여운. 이런 순간들이 쌓여 나를 만들어 가는 것 같다.


나는 노을에게 감사한다. 내일 저녁, 나는 또 창가에 앉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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