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완의 계류

by 동네과학쌤

이른 아침의 교실은 아직 사람의 온기가 닿지 않아 서늘하다. 창문 너머로 들어오는 햇살은 책상 위를 가로질러 바닥까지 이어지고, 그 빛줄기를 바라보면 문득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어떤 풍경 속에 들어와 있는 듯한 착각이 든다.


나는 매일 아침 같은 공간에서 새로운 얼굴들과 마주한다. 그들의 눈빛에는 무한한 가능성과 동시에 그 가능성을 마주하기엔 아직 여린 어깨들이 보인다. 그 모습은 오래전 이루지 못하고 마음속에 묻어둔 꿈을 품었던 나를 닮아 있다. 그들 또한 망설이고 흔들리며 하루하루를 보낸다.


교실 안에는 기이한 시간이 흐른다. 나는 늘 같은 나이로 교단에 서 있지만, 학생들은 늘 같은 나이로 교실에 머무른다. 그들 앞에서 나는 매번 다른 질문을 받고, 새로운 답을 찾는다. 그 과정이 반복되면서 때로는 지루함을, 때로는 생의 깊이를 발견한다.


얼마 전 한 학생이 물었다. "선생님은 처음부터 선생님이 되고 싶었어요?" 순간 머뭇거리다 웃음으로 답을 대신했다. 그 웃음 안에는 말하지 못한 이야기가 담겨 있었고, 그것이 문득 나를 과거로 이끌었다.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방황하며 내가 놓친 것들, 그리고 결국 닿지 못한 어딘가로 향하던 지난날의 흔적들이 스쳐 지나갔다.


스물아홉, 처음 교단에 섰던 날의 칠판 냄새와 긴장으로 떨리던 목소리가 아직도 선명하다. 연구원이 되겠다던 꿈을 접고 교단에 선 나에게 아버지가 말했다. "포기한 게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이루는 거야." 그때는 위로처럼 들렸던 그 말이 이제는 진실로 다가온다. 생활비와 등록금, 미래에 대한 불안감, 스스로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던 나의 부족함과 수많은 실수, 변명이 나를 실험실 밖으로 이끌었다. 실패한 인생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이 패배는 아니었다. 이상은 사라진 게 아니라 변형되었을 뿐이다.


이제는 안다. 바람이 꼭 이루어야만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교실 창가에서 먼 곳을 바라보는 아이의 마음 어딘가에 내가 지나온 길의 흔적이 이어지고 있다. 내가 채우지 못한 삶의 빈칸은 이 아이들 안에서 새로운 질문과 호기심으로 자라고 있었다.


승현이는 내가 그려봤던 연구원을 꿈꾸고, 진서는 많은 이들이 원하고 포기하는 의대를 준비하고 있다. 그들의 눈빛을 보면 내 안에 잠들어 있던 열정이 다시 깨어난다. 소망은 죽지 않았다. 그저 다른 심장에서 새로운 맥박을 타고 흐르고 있을 뿐이다.


몇 년 전 과학탐구동아리에서 지도했던 은진이가 찾아온 날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에 진학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전하러 온 것이었다. "선생님이 도와주셨던 탐구 주제를 더 공부해 보려고 대학원에 가요." 나는 그 아이에게 응원한다며 격려했다. 내가 놓친 것들, 실수했던 것들을 털어놓으며 너는 잘할 수 있을 거라 말했다.


그 순간 은진이의 눈빛에서 오래전 나의 열정이 살아났다. 꺼진 줄 알았던 불씨였다. 아니, 어쩌면 결코 꺼지지 않았던 것인지도 몰랐다. 다른 심장 속에서 다시 타오르고 있었으니까. 은진이가 돌아가고 며칠간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 오랫동안 망설여왔던 박사과정 지원을 결심하게 된 것도 그때였다.


창밖에 나뭇잎이 떨어지고 새 잎이 돋는다. 계절은 돌고 돌아 새롭지만 낯설지 않다. 나는 이 반복 속에서 무언가를 놓치기도 하고, 예상치 못한 무언가를 얻기도 한다. 그리고 그것들을 조용히 아이들 앞에 내려놓는다. 그것이 다시 아이들 안에서 빛을 내고, 시간이 흐르면 그 빛은 또 다른 교실, 또 다른 젊음에게로 이어진다.


우리가 이루지 못한 것들은 완성되지 않은 채로 세상을 떠돌다 새로운 가슴에 깃든다. 그렇게 반복되는 삶의 물결 속에서 영원이 되어간다. 한 사람의 젊은 시절이 끝나면 그 미완의 꿈은 다음 세대로 전해진다. 스승에서 제자로, 선배에서 후배로. 이렇게 이어지는 바람의 릴레이가 청춘이 영원을 이루는 방식이다.


오늘도 아이들의 눈빛 속에서 나는 미처 피우지 못한 나의 소망이 다시 피어나는 것을 느낀다. 그렇게 교실 어디에선가 새로 시작된 이상은 다시 자라나 또 다른 세대로 전해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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