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불변하다는 말이 있다. 그렇다면 영원은 어떤 모양일까?
초등학교 2학년, 수학 시간이었다. 선생님이 컴퍼스 사용법을 가르쳐주었다. 바늘을 꽂고, 연필을 잡고, 천천히 돌리면 완벽한 원이 그어진다. 그러나 컴퍼스 없이 원을 그리려 하면 늘 실패가 뒤따랐다. 손목은 떨리고, 선은 삐뚤어지고, 시작점과 끝점은 끝내 만나지 못했다. 완벽한 원이란 도구의 힘을 빌려야만 가능한 기적이었다.
지금 아이들과 함께 원을 그릴 때 나는 이렇게 말한다. "완벽한 원을 그리려 하지 마라. 네 손이 가는 대로 그어보렴." 삐뚤삐뚤한 원들이 종이 위에 생겨난다. 그런데 그 불완전한 원들이 오히려 살아 숨 쉬는 듯 보인다. 완벽함 속에는 없던 떨림과 온기가 거기에 있다.
원은 분명 영원의 가장 완벽한 초상이다. 파르메니데스가 꿈꾸었던 '있는 것'의 완전성. 시작도 끝도 없이 이어지는 무한한 선. 하지만 이런 원의 영원은 죽어있다. 유리관 속 표본처럼 완전하되 생명이 없다. 생각해보라. 시계가 둥근 것은 우연이 아니다. 12시에서 12시로 돌아오는 그 무한 반복이야말로 우리가 영원이라고 믿고 싶어하는 환상의 정체다. 하지만 그것은 영원이 아니라 감옥이다. 시간의 감옥.
그렇다면 진정한 영원의 형태는 무엇일까? 나는 매일 아침 일어나 커피를 내리고, 출근하고, 아이들을 가르치고, 집에 돌아와 글을 쓴다. 겉으로는 똑같은 반복이지만, 실제로는 조금씩 달라진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미묘하게 다른 높이에서 같은 궤도를 돈다. 나선이다. 나선 계단을 올라본 적이 있는가? 같은 방향으로 돌지만 계속해서 높아진다. 익숙한 패턴 속에서 조금씩 성장하는 것. 하지만 여기서 헤라클레이토스의 역설이 시작된다.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고 했지만,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같은 강이라고 인식할 수 있는가? 변화 속에서 지속하는 것, 그것이 로고스다. 나선은 이 로고스의 기하학적 형태다.
작년에 한 학생이 물었다. "선생님, 매년 같은 교과서로 같은 수업을 하시면서 지겹지 않으세요?" 순간 나는 웃었다. 그 아이는 모르고 있었다. 같은 텍스트를 가르치지만, 매년 다른 아이들과 만나고, 매년 다른 질문을 받고, 매년 조금 다른 내가 되어 있다는 것을. 교육이란 나선의 원리로 작동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나선에도 함정이 있다. 위로만 올라간다는 서구적 진보 신화. 더 높이, 더 멀리, 더 빠르게. 하지만 누가 위가 아래보다 좋다고 했는가?
뫼비우스 띠를 처음 만든 것은 중학교 과학시간이었다. 종이띠 한쪽을 비틀어 붙였더니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한 면에서 선을 긋기 시작했는데 어느새 반대편 면에 그어지고 있었다. 끝까지 그으면 원점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그 사이 모든 것이 뒤바뀌어 있다. 몇 년 전 아버지가 뇌출혈로 쓰러지셨을 때, 나는 계속해서 아버지를 생각했다. 추억을 따라 걷다 보니 어느새 아버지의 시각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자식을 걱정하는 아버지의 마음으로 나 자신을 돌보고 있었다. 아들에서 시작해 아버지가 되어 돌아온 것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되어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것이 뫼비우스 띠의 신비다.
사랑의 형태도 끊임없이 변신한다. 할머니의 사랑은 어릴 때는 따뜻한 밥 한 그릇이었고, 학창시절에는 용돈 몇 천원이었고, 어른이 되어서는 걱정 어린 전화 한 통이었다. 형태는 바뀌었지만 사랑은 계속되었다. 아니, 바뀌었기 때문에 계속될 수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뫼비우스 띠가 아닐까. 표면이 바뀌어도 본질은 이어지는 것.
때로는 영원이 견고한 각진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한옥의 정사각형 구조를 생각해보자. 동서남북의 완벽한 균형. 마당을 중심으로 배치된 방들. 수백 년을 견뎌온 그 안정감. 하지만 이 안정감을 주던 정사각형을 45도만 돌려보라. 다이아몬드가 된다. 같은 형태가 관점에 따라 안정에서 역동으로 돌변한다. 여기서 깨달은 것이 있다. 영원이란 것 자체가 관점의 문제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형태들, 이 모든 영원의 가면들이 과연 진짜일까? 어쩌면 우리는 변하지 않는 것을 찾으려 하지만, 진정한 영원은 우리가 찾고 있는 바로 그 순간에 이미 사라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템플스테이에서 보낸 하룻밤이 있었다. 새벽 4시, 목탁 소리에 잠에서 깨어 법당으로 향했다. 스님이 반야심경을 독송하는 소리가 고요한 새벽 공기를 가르고 있었다. "색즉시공 공즉시색." 내가 지금까지 찾고 있던 영원의 형태들 역시 모두 생겨났다 사라질 것들이다.
각원사에서 만난 한 노스님이 마당을 쓸며 말씀하셨다. "이 낙엽들을 보라. 떨어지는 것을 슬퍼하지 않고, 쌓이는 것을 기뻐하지도 않는다. 그저 떨어질 뿐이다." 바람이 불면 흩어지고, 비가 오면 썩어서 흙이 되는 낙엽들. 그들에게는 영원의 형태 따위가 필요 없었다. 선불교의 화두 하나가 떠오른다. "뜰 앞의 잣나무." 조주 스님이 제자에게 던진 말이다. "달마가 서쪽에서 온 뜻이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그냥 "뜰 앞의 잣나무"라고 답했다. 거기에는 영원도, 무상도, 형태도, 공도 없다. 그저 있는 그대로의 잣나무가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 잣나무 역시 봄에는 새싹을 틔우고, 여름에는 무성해지고, 가을에는 열매를 맺고, 겨울에도 푸름을 잃지 않는다. 계절마다 다른 모습을 보여주면서도 여전히 잣나무로 남아있는 것. 변화 자체가 그것의 정체성인 것.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영원의 형태가 아닐까.
석양이 지는 바닷가에서 어머니와 함께 모래성을 쌓던 날. 파도가 밀려와 성을 무너뜨릴 때마다 어머니는 웃으셨다. "또 쌓으면 되지 뭐." 그때 나는 몰랐다. 어머니가 웃은 것은 체념이 아니었다는 것을. 그것은 무상을 받아들이는 것의 기쁨이었다는 것을. 영원하지 않기 때문에 완전할 수 있다는 역설적 깨달음이었다는 것을.
결국 영원의 형태란 형태가 없음일지도 모른다. 바람에 흩어지는 민들레 홀씨처럼, 우리의 모든 형태들도 언젠가는 흩어질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완전하다. 영원하지 않기 때문에 완전하다. 그리고 그 홀씨들은 다시 어디선가 새로운 꽃을 피울 것이다. 같은 꽃이 아닌, 전혀 다른 꽃을. 하지만 여전히 꽃인 것을.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영원의 진짜 모습인지도 모른다. 끊임없이 변화하면서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 것. 사라짐으로써 영원해지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