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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주 Sep 28. 2022

힘내지 말기로 했다.

허리디스크환자의 재활일기


명의(名醫)에게 진찰을 받기로 했다.

시동생의 추천으로 시작된 '명의에게 진료받기' 미션에 친구와 가족들까지 동원되었지만 쉽지 않았다. 유명세가 높아 분기 단위로 전화예약만 가능했기 때문에 총 3차례 (3개월에 1번씩, 총 9개월)의 예약 실패 끝에, 이른 봄에 8월 진료일정을 겨우 잡았다.


사실 나의 허리디스크는 중증 단계는 아니라서 명의에게 진료를 받는다하더라도 뾰족한 해결책을 얻는다던지 특출난 시술이나 처방을 받을 수 있다는 기대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찰을 받기로 했던 이유는 분명히 이타심 때문이었다. 질병이란 환자만큼이나 지켜보는 이들에게도 묵직한 추를 마음 한켠에 달아주는 일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여름과 함께 진료일정이 성큼 다가왔고 방문 전날까지 귀찮아하는 나를 위해 신랑은 알뜰살뜰 데이트 코스까지 짜두며 동행했다. 무지하게 더운 날이었지만 서로의 침울감을 알기에 "더워 죽겠다"는 흔한 투정 한 번 하지 않고 웃으며 길을 나섰다.





호전될 일은 없다. 허리디스크라는 것이 원래 그렇다. 다만 운동하고 관리해서 악화 속도를 늦춰주는 것이지 그 외에 할 수 있는 건 없다. 신경주사도 되도록 맞지 말고 처방약(진통제)도 임시방편이기 때문에 최대한 복용하지 않는 것을 권한다는 의사의 짧고도 명확한 진단을 끝으로 1~20분 내외의 진료시간이 끝났다. (수영도 좋고 운동은 다 좋다. 무게치는 것만 하지 말라는 당연한 조언도 함께)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그것을 전문가의 입으로 듣는 것이 달갑지만은 않았지만 듣고나니 후련한 마음만큼 엄숙해졌고, 체념한 만큼 눈앞이 깜깜했다.

중증이 아닐지언정 허리를 마음대로 쓰지 못한다는 신체적 한계는 정말이지 달가운 일이 아니다. 알고 있다. 다만 그것으로 인해 내 일상이 우울감에 잠식되는 것을 막기 위해 애써 밝게 마주하고 응대하는 것뿐이었던 지난 1년여간의 재활 기간에 묵직한 추가 하나 더 달린 것이다. 아픈 허리에 대한 책임감과 부담감, 미래에 대한 두려움은 보너스로.



미처 수습하지 못한 혼란을 안고 신랑의 데이트 코스에 함께 올랐으나 여전히 굳어진 표정이 풀리지 않은 모양이다. 어여쁜 그의 정성에 조금이나마 홀가분해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지만, 그것마저 쉽지 않은 나에게 그는 특별하지 않은 문장과 말투로

"그동안 해온 것처럼 하면 돼. 그러니 오늘은 아무것도 하지 말고, 힘도 내지 말자"라고 했다.




매번 나를 대신해 무거운 짐을 이고 지는 신랑에게 미안하고 안부전화 너머 되려 자식의 허리 걱정이 태산인 부모님께 죄송하며 한계선을 정해두고 하루를 지내는 신체의, 마음의 범위가 좁아지는 것이 숨 막힌다.

일을 할 때에도 허리 컨디션에 맞춰 누웠다가, 일어섰다가, 걸어줘야 하는 루틴도 성가시고 짜증 나며 어딘가를 떠날 일이 생기면 허리에 무리가 가는지부터 살펴보는 것도 유난 떠는 것 같아 마뜩치않다. 아등바등 사는 나의 모습이 내 것이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아프지 않았을 때처럼 아무 걱정 없이 뒤고 구르며 방방 거리고 몸을 아무렇게나 구겨놓은 채 잠이 들어도 다음 날 괜찮고 싶다. 하지만 나는 이제 그럴 수 없고 그러면 안 된다는 현실은 변함이 없다는 것이 애써 힘을 내어 질병을 수용하는 와중에도 가랑비처럼 내 마음을 적셔왔던 것 같다.


그래서 그가 건넨 달콤한 유혹에, 안락한 위로에 기대기로 했다.

걷고 스트레칭하는 것, 기본만 하면서 힘내지 않고 지내도 당분간은 괜찮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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