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영주 Dec 05. 2022

깊은 겨울밤 나눈 대화의 기록

너의 안녕을 영원히 염원하며.

고등학교 친구와 오래간만에 얼굴을 마주했고 깊은 겨울밤에 힘입어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중 마음에 와닿고, 길이 기억해두고 싶은 이야기 몇 가지에 대한 기록.




- 인간관계에서의 분산투자, 기둥과 지지대의 필요성.

기억 속에는 꽤 내성적인 편이었던 친구는 올해 초부터 요가 클래스를 수강하며 많은 수강생과 어우러져 가까이 지내는 모습 종종 인스타그램에 올리곤 했다. 그걸 보니 마음이 조금은 놓이더라는 나의 말에 '어떤 마음이 놓였느냐'라고 다정히 묻는 그녀에게 ㅡ삶에 있어 굵고 큰 기둥의 존재는 필수지만 때때로 살다 보면 기둥보다 얇거나 작더라도 여러 개의 지지대가 있는 것이 힘이 될 때가 있더라. 그래서 멀리 지내는 너의 친구로서 나는 너의 지지대가 여럿 생긴 듯이 보여 마음이 조금 편안하더라고 전했다.


사실 정말 그렇다. 결혼을 기점으로 친구와 가족 그리고 경조사를 챙기는 지인과 적잖이 멀리 떨어져 살면서 신상 맛집이 생겼다며 호들갑 떨며 만날 일도, 직장 상사 때문에 열이 차인 날의 퇴근길에 맥주 한 잔 하자며 불러낼 일도, 코로나처럼 갑작스러운 아픔에 문고리 배달을 해줄 일도 불가능해졌기 때문에 내게는 더욱 지인들의 행복이 나의 행복만큼이나 간절하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내 이야기가 끝나자 친구는 쑥스럽다는 듯 고개를 숙여 따듯한 유자차를 홀짝이며, 나의 이야기 덕분에 그분들에게 새삼 고마움을 다시금 느꼈다고 고맙다고 했다. 앞에 놓인 유자차처럼 따듯하고 달근한 저녁이었다.





- 누구나 트라우마는 있지만, 누구나 트라우마에 갇혀 살진 않으니까.

생리 직전 증상으로 아랫배 통증이 심해 잠 못 이루던 새벽에 진통제 먹으려고 약서랍을 열었는데 텅 빈 약통을 보니, 신랑 덕에 시작한 타지생활인데 아플 때 약 하나 제대로 못 먹는 내 처지가 서럽고 애통해지기까지 한다며, '결혼 정말 할만한 일인가?'라는 헤드라인으로 우스갯소리를 늘어놓았다.


친구 역시 비슷한 일이 있었다며 말을 이었다.

라식 수술로 안과에 찾았는데 시력검사를 한 뒤 의사 왈, "공부하는 동안 힘들지 않았느냐, 난시도 심하고 시력도 낮아 압축렌즈안경을 오랜 시간 끼면 오후에 잠이 쏟아졌을 텐데 고생했겠다"는 말을 건넸고 친구는 그 말을 듣자마자 펑펑 울었다면서 ㅡ그 동안 고생했겠다는 말에 위안은커녕 오랜 시간 동안 본인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부모님에 대한 원망이 또다시 몰려와 주체 못 한 일이 있었다면서. (친구는 정말로 고3 입시 때도 취업준비생일 때도 오후마다 쏟아지는 졸음을 이겨내느라 많이 괴로워했다, 비정상적으로.)


나의 진통제처럼, 친구의 시력검사처럼 일상 속 아무것도 아닐 일이 때로는 트리거가 되어 치명적이거나 괴로운 일로 마음을 몰아세우는 일이 모두에게 있다. 일어난 일은 강도 1의 사소함인데, 아무런 자극도 없이 내재화되어 괴로움이 1+1이, 1+1+1+1이 되면서 스스로 곪아 아파하는 그런 일.

이럴 때 친구는 끊어내는 법을 연습 중이라며 비밀의 주문처럼, 속삭이며 알려준 "끊어내기"는 아래와 같다.


1단계. 아, 진통제가 없네

2단계. 왜 내가 아플 땐 약이 없지?

3단계. 나 아니면 약 사다 두는 사람이 없는 거야?

4단계. 아무도 날 챙겨주지 않네

가령 위와 같은 단계로 심연에 빠지는 일이 잦다면, "아 진통제가 없네", "사러 가야지" 또는 "사 와달라고 말해봐야지"로 생각의 꼬리를 끊어내는 것이 내가 나의 마음을 안전하게 지키는 가장 쉽고 빠른 방법이라는 것.


사람은 누구나 치부와 트라우마가 있지만, 누구나 그것에 갇혀 살진 않으니까 우리는 우리만큼은 자유로이 지금 이 순간을 서로의 지지대가 되어주며 살기로 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