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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주 Sep 21. 2023

#1. 여행의 시작

반려견과 함께 떠나는 5박 7일간의 제주여행

코로나 시대가 끝나면서 몇 년간 억제되어 있던 많은 욕구들이 활화산처럼 터져나와 세상을 뜨겁게 채우고 있는 듯 하다. 그중에서도 가장 핫한 것은 여행이 아닐까 싶을 만큼 TV프로그램부터 유튜브, OTT 플랫폼에서는 여행 콘텐츠가 쏟아지고 있다. 지난 몇 개월간 TV앞에 앉아 그것들을 바라보며 20대 시절 훌쩍, 훌쩍 떠났던 여행들을 떠올리는 순간이 잦았다. 아빠의 등산가방들 중 가장 큰 것을 골라잡아 햇반이니 즉석카레 따위로 가득 채워 가난하지만 가뿐한 마음으로 떠났던 여행들이 그리웠고, 그때의 어여쁜 내가 보고 싶어 울렁이는 마음을 들숨과 날숨으로 애써 가라앉히던 나날들.


그동안 신랑은 꽤 바쁜 나날을 보냈다. 갑작스러운 부서이동이 있었던 봄부터 여름이 끝난 얼마 전까지 잦은 야근과 누적된 피로를 달래느라 언젠가부터 주말은 정적인 휴식이 메인이벤트로 자리 잡은 듯했다. 덥기도 참 더웠고. 그러는 와중에도 무색하게도 흘러가는 세월이 아쉬워 우리는 선선한 바람이 불면 그동안 심신을 텁텁하게 만들었던 각종 더위를 삭히러 잠시 떠나보기로 했다.



신혼여행 이후 이렇게 긴 휴가는 정말 오랜만이고 그만큼 설렘과 기대가 컸지만, 딱 그만큼 고민과 걱정거리가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반려견의 존재인데 세상이 점점 펫 프렌들리(Pet Friendly)화 되고 있다고 하지만 반려견과 함께 외출하는 일은 여행지의 선정, 이동수단의 선택, 식당과 카페와 둘러볼 여행지들이 반려견 동반이 불가하다면 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강아지와 함께하는 여행은 인간에게 여행에서 누릴 수 있는 범위를 제한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번 여행은 '반려견 동행 여부'라는 선택에서부터 첫 삽을 뜨게 되었다. 긴 대화 끝에 몇 가지 기준을 세웠고 그것을 따라 여행지를 설정했다.


 1. 반려견과 함께 하기    2. 특정 지역의 일주 콘셉트의 여행    3. 관광지, 핫플, 맛집 등에 얽매이지 말 것


이 세 가지와 더불어 우리가 살고 있는 경남 진주에서 주말을 활용할지라도 쉽게 갈 수 없는 강원도 일주를 해보기로 했고 그 목적지가 더없이 마음에 들었던 이유는 나름 배낭여행러였던 내가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정동진이 우리의 종착지였기 때문이다. (경상남도에서 강원도는 자차로 최소 6시간 이상의 이동시간이 필요하다)



꼭짓점이 생기면 그것을 중심으로 어떤 도형이든 그려내고야 마는 성미의 나는 반나절만에 뚝딱, 여행경로를 정리했다. 진주를 시작으로 안동-단양-울진-동해-정동진-대구를 거쳐 다시 진주로 오는 여정이었고 반려견 동반이 가능한 숙소와 식당, 여행지 등을 엑셀로 정리하여 신랑에게 전송했다. 돌아온 답장은 유쾌했다.

 - 역시 J를 따라야 해.


하지만 누가 그랬던가? 여행의 진짜 시작은 예약부터라고. 아니나 다를까. 코로나가 종식되고 모처럼만의 긴 명절연휴 때문인지 알아보았던 숙소는 모두 예약이 완료되어 있었고 심지어 정동진으로 가는 길의 절반이 국도인 것이었다. 국도가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함께 여행을 떠날 반려견에게는 체력적으로도 무리가 갈 수 있는 경로였다. 지도를 확대해 보니 산길을 오르고 내리며 굽이굽이 돌아 돌아가는 국도는 십중팔구 멀미의 원인이 될 터. "역시 J"일지라도 반려견과 함께 긴 여행을 가는 것은 처음이라 애써 세운 계획에도 구멍이 숭숭 뚫려있었다.

고려할 수 있을 때 고려하세요♪라는 라디오 CM이 머리에서 맴돌아 눈의 초점이 흐릿해진 내게 악마의 속삭임이 들려왔다. "때려치워! 무슨 부귀영화를 누린다고 그 고생을 하냐?"


씩씩거리며 애써 속삭임을 외면하고 있는 내게 신랑은 문득 제 노트북 화면을 보여주며 비용차이가 얼마 나지 않으니 차라리 제주도를 가자며 화사하게 웃었다. 화사하게 웃었다는 것은 아마 나의 자체 효과였던 것도 같다. 그의 제안이 마치 구원 같았으니까. 화면을 들여다보니 그의 말마따나 강원도나 제주도 여행 경비 총액의 차이는 크지 않았고, 나는 못 이기는 척 미끼를 덥석 물기로 했다. 크앙!


저녁밥 설거지도 뒤로 미룬 채 자세를 고쳐 앉아 신랑은 이동수단의 가격비교를(배 vs 비행기), 나는 숙소예약과 이에 따른 대략적인 큰 동선을 짜기로 했다. 신입사원에게 첫 임무가 주어진 것 마냥 불같은 집중력으로 밤 11시 40분 경이되자 제주 여행의 6박 8일간의 숙소와 동선이 정해졌다. 둘이 합쳐 약 20년 경력의 사무직 노하우가 이럴 때 참 요긴하네, 라며 안도의 웃음을 머금은 채 잠자리에 들었지만 새벽 세시가 다 될 때까지 설레는 마음에 잠을 이루지 못한 밤이었다. 나대지 마 심장아..!



제주가 강원도이기도 훨씬 전, 10월 연휴에 연차 내고 여행 갈까?라는 말을 듣고 활짝 웃는 내게 신랑은 여행이 그리 좋으냐 물었었다. 그 말조차 내겐 여행과도 같아 그는 원하지 않았을 긴 대답을 주접스럽게 늘어노았었는데 요약하자면 이렇다.

 : 하루를 온통 나를 위해, 내가 좋아하고 원하는 것들로만 채울 수 있다는 자유로움은 떠난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며 그런 하루 안에는 나와 세상, 단 둘밖에 없으므로 그 어떤 외부의  자극과 영향들로 규정지어져야만 했던 나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것. 그래서 여행지에서의 나는 순도 100%의 나로서 존재해도 '되는' 해방감을 얻는 것이다. 이 자유와 해방은 곧 자존감, 독립심, 자립심과 관계가 깊어 "스스로 행복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내 삶의 목표에 보다 한 발짝 더 다가설 수 있는 힘을 준다. 마치 드레곤볼처럼. 그래서 내게 여행이란 늘 설레고 반가운 일이라고 답했다.


음.. 요약 맞겠지?



언젠가 꼭 가보고 싶었던 수풍석 뮤지엄 관람권을 예매했고 시간이 나면 제주여행을 할 때마다 꼭 들렀던 김영갑 갤러리에 가서 엽서를 사기로 마음먹었다. 신랑에게는 오랫동안 마음에 품고만 있었던 바이크 모델을 대여해 드라이브를 다녀오라 일러주며 6박 8일의 반나절정도는 개인 시간을 가져도 좋지 않겠냐고 하니 고맙다고 대답했다. 부부의 단단함을 느낀 대목이었다. (여기서?)



주말에는 반려견 비상약을 타러 동물병원에 갔다가 여행 중 입을 화사한 셔츠를 사고 싶어 백화점에 들르기로 했다. 신랑이 자주 찾는 인공눈물과 립밤도 챙겨두자고 했다. 이런 것들을 다 넣어서 들고 다니려면 백팩도 필요할 것 같아 냉큼 주문했다. "이러려고 돈 벌지"라는 합리화를 감당하는 것은 다음 달의 우리에게 맡기기로 하며.


휴대폰 포털사이트 앱과 소셜미디어 해시태그 검색창은 온통 #제주00 으로 가득하다. 그런 우리를 빤히 바라보는 반려견과 눈을 맞추면 너랑, 우리가, 제주도를? 이라며 또 한 번 마음이 요동쳐 웃음이 터진다.


여행의 시작은 그것을 하겠노라 결정한 순간부터 시작되는가 보다.


매거진의 이전글 여름에 대한 감상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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