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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주 Oct 26. 2023

오늘의 귀여움 #3. 식기세척기

그러니까 싸우지 말자



"식기세척기 사자!" 



 설거지는 사람 손으로 해야 제 맛이라는 고지식한 면이 있다. 우리 엄마가 그랬고, 그런 엄마를 닮아 언니도 나도 물걸레 키트를 사용하면서도 이따금 낡은 수건을 찢어 적신 후 마룻바닥을 닦고 음식을 할 때에도 인공 조미료를 최대한 지양하는 보수적인, 고지식한 면이 동년배 또래보다 많은 편이다. 그런 내게 언니의 식기세척기 구입 소식은 적잖이 의아했고 한편으로는 약간의 배신감이 들기도 했지만, 곧바로 튀어나온 질문은 "어때? 좋아?"였다. 

 요즘은 특히 주변에서 식기세척기를 사용하며 달라진 일상과 그에 대한 만족감을 공유하는 이들이 많아졌다. 구입한 가전제품 중 가장 잘 산 것 같다나 뭐라나. 


 집안일이라는 것이 중노동을 요하는 것은 아니지만 막상 하나둘씩 쌓이다 보면 숙제처럼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보다 현실적으로 설명하자면 하루 종일 업무와 사람에 시달린 부부가 퇴근 후 밥을 차리고 치우고 설거지를 하는 일련의 과정은 매일 필요하지만 매일 즐거운 행위가 되긴 어렵다. 너무 피곤하니까! 

 특히 요 근래 부서이동으로 급격히 세진 업무강도로 매일같이 동공이 풀려 귀가하는 신랑에게, 그런 그를 배려하고 싶어 오늘의 설거지를 내일로 미루지 말자는 강박이 생겨버린 내게 매일 해 먹는 밥과 그것을 처리하는 설거지라는 과업은 녹록지만은 않다. 어휴, 이걸 언제 다 해?라는 말이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올 만큼.  

 

 먹고 치우는 게 당연한 거 아냐?라곤 하지만 살다 보면 당연한 일일 수록 대단한 성실함과 인내를 요하는 일도 있는 법. (설거지를 너무 위협적인 일로 표현하는 것 같지만) 



 이런 근황 속에 지난주 오래간만에 친구들과 회포를 풀고 돌아오니 재밌었느냐, 어떤 이야기들을 나누었냐, 다들 잘 지내느냐는 의례히 던지는 신랑의 질문에 "요즘 애들 다 식세기 쓴대. 엄청 추천하더라. 아니, 우리 언니도 식세기를 샀데. 웃기지?" 라며 별 뜻 없이 대답하자 신랑은 기다렸다는 듯이 "우리도 사는 건 어때?"라며 제법 진지한 얼굴로 나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크고 동그란 눈이 축구화를 살 때처럼 반짝이는데 그 와중에 진지한 표정과 앙 다문 입술이 조화롭지 못해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이러면 안 되는데, 너 정말 귀엽다. 



 그가 이런 말을 꺼낸 계기는 아마 며칠 전 고요했던 우물에 던진 돌처럼, 툭 꺼내버린 나의 진심 어린 투정 때문일 것이 분명한데ㅡ바빠진 그에게 부담 주고 싶지 않아 묵묵히 혼자서 티 안 내고 해 오던, 어찌 보면 소소한 집안일들이 점점 소소하지 않게 느껴져서 부쩍 힘에 부친다는 말에 적잖이 놀랐던 모양이었다. 

 그날 이후 며칠간 내 뒤만 졸졸 쫓아다니며 "이건 언제 치워야 해?", "휴지는 언제쯤 주문을 하는 게 가장 좋아?", "이건 어떻게 하면 돼?" 등의 적극적인 애정 공세가 이어졌고 그중 하나가 "식세기 사자!"였으리라. 


 너랑 나랑 설거지 때문에 은근히 스트레스받고 서로 눈치 보는 일 없어지면, 그 정도 돈을 쓸 가치는 있지 않을까?라는 귀엽고 요망한 말에 못 이기는 척 꿰여 어느덧 식세기 이모님을 모신 지 3일 차. 

 

 어김없이 피곤한 몸을 이끌고 돌아와, 반려견 산책을 실컷 한 뒤에서야 부랴부랴 챙겨 먹은 저녁 식사 시간이 끝나자 "오늘은 내가!"라며 신이 나서 주방으로 폴짝 뛰어 들어가는 그. 전자공학과를 졸업한 이과생답게 새로운 기계가 무척 흥미로운가 보다. 저 즐거움이 오래가면 좋겠다며 은근히 놀리는 말을 하는 나에게 메롱이라는 대답을 하는 그를 어찌 귀여워하지 않을 수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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