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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직, 가는 중입니다.

성실함과 꾸준함의 힘

by 유타쌤

“선생님, 저 진짜 이번에는 꼭 50등 안에 들어가고 싶어요.”

한창 2차고사를 앞둔 어느 날, 나에게 다가온 윤선(가명)이가 다짐하듯 말했다. 전교 135등이던 아이가 50등 안에 들겠다고 말하는 모습에 순간 나는 ‘가능할까?’라는 생각부터 떠올랐지만, 그의 눈빛만큼은 누구보다 단단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아이는 이미 계속 가능성의 조짐을 보여주고 있었다.


사실 교사로 오래 있다 보면, 성실한 아이들이 눈에 보인다. 그런 아이들은 무언가 특별히 돋보이지 않더라도 제시간에 오고, 숙제를 빼먹지 않고, 수업을 귀담아듣는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목표가 있다. 성실함은 대개 추상적이지만, 목표가 있는 성실함은 구체적이다.


윤선이도 그랬다. 중학교 때는 상위권을 유지하다가 고등학교에 올라와 한동안 방황했다는 사실을 상담을 통해 알게 되었다. 수업은 어렵고 친구들과의 비교는 끝이 없었다. '그동안의 내 성적은 운이었나 봐'라며 포기하고 싶은 순간들도 많았다고 했다. 그러나 늘 조금의 가능성을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래도 열심히 하면 언젠가는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계속 들었고 무엇보다 지금 공부 말고는 딱히 할 줄 아는 것도 없었기 때문에 늘 그래왔듯이 열심히 학교생활을 했다고 말했다. 모의고사를 본 날에는 대부분 집에 가서 쉬는 친구들을 뒤로하고 자신은 끝까지 학교에 남아 자율학습실에서 오답정리를 하면서 언젠가 이 노력이 결과로 이어지기를 기다렸다고 했다. 그리고 결국, 윤선이는 50등 안에 들었고 고3때는 성적이 더 많이 올라서 국립대 사범대 국어교육과에 당당히 합격했다.


성실한 아이들의 특징 중 하나는, 계획을 세우고 실천하는 데 익숙하다는 것이다. 율희는 매일 밤 10시에 자율학습을 마치고 나면, 집에 가서 간단히 그날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고 '오늘의 나는 80점!', 이렇게 점수를 매기면서 하루를 정리하는 학생이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이 작은 루틴이 하루하루 쌓이면 엄청난 차이를 만든다. “누가 보는것도 아닌데 왜 그날의 자신에게 점수를 줘요?”라고 누군가는 물을 수도 있지만 진짜 성실한 아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만의 루틴이 있다. 이런 행위 자체가 ‘공부하는 태도’를 다잡아주기 때문이다.


이런 아이들은 실패에 덜 민감하다. 처음 세운 계획대로 되지 않으면, 조용히 계획을 수정한다. 시험에서 목표 점수가 안 나오면 좌절보다는 분석이 먼저다. 누군가는 ‘무던한 아이’라고 표현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런 무던함이야말로 성실함의 다른 이름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종종 드라마틱한 성공이나 단번에 일어나는 반전을 원한다. 하지만 교육의 현장에서 내가 경험한 대부분의 변화는 그렇게 화려하지 않았다. 작고, 느리고, 그러나 꾸준한 변화였다. “어차피 잘 안 될 거예요”라고 말하던 아이가 어느 날 “이번에는 진짜 해볼래요”라고 말하면서 꾸준함을 보일 때, 나는 희망을 본다.


꾸준함은 말이 없다. 다짐도 없고, 감정에 휩쓸리지도 않는다. 오늘도 그 자리에 있고, 내일도 같은 자리에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진짜 꾸준함이다. 이런 꾸준함을 가진 아이들이 성장해서 어떤 어른이 될지는 아직 모르지만 나는 확신한다. 성실했던 아이는 결국 스스로를 배신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가끔 아이들에게 말한다.

“네가 목표를 세웠다는 것, 그 자체가 이미 반은 이룬 거야. 남은 반절은, 네가 얼마나 꾸준하게 걷느냐에 달려 있어."

성실한 아이들의 하루는 특별하지 않다. 그러나 그 하루가 모이고, 한 달이 되고, 학기가 지나고 나면 어느새 그들은 다른 세상에 와 있다. 다른 아이들이 한 자리에 멈춰 있을 때, 조용히 앞으로 나아간 아이들. 나는 그 아이들의 등을 오래도록 지켜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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